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과거사 바로잡은 게 죄라면 죄

검찰, 인혁당 사건 재심 무죄판결을 이끈 김형태 변호사 시작으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7명 수사
등록 2015-01-31 13:29 수정 2020-05-03 04:27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2년 9월10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MBC 라디오 에 출연해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튿날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면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사법부 존중 않는 대통령 앞에 검찰은 쭈구리

‘두 가지 판결’ ‘상반된 판결’이란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사형선고와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재심 무죄판결을 말한다. 법원은 극히 엄격하고 명확한 사유가 있을 때 원판결을 받은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열어 실체적 진실을 재확인한다. 그것이 재심이다. 따라서 인혁당 사건에 대해 법원이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면서 1975년의 잘못된 유죄판결을 바로잡은 것이다.

지난 1월2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국가폭력 피해자 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과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검찰의 표적수사를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난 1월2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국가폭력 피해자 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과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검찰의 표적수사를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하지만 박 대통령은 ‘2007년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2007년 1월31일 그의 발언을 들어보자. “(무죄판결은) 나에 대한 정치 공세라고 생각한다. 지난번(1975년)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2007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하나가 잘못된 것이고 이는 역사와 국민이 평가할 것이다.” 5년간 박 대통령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인식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2015년 1월 인혁당 사건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4부(부장 배종혁)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 등 7명을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을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가 첫 번째 대상자다. 김 변호사가 2000년 10월~2002년 3월 별정 공무원 신분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는데 당시 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했고, 이후 변호사로서 인혁당 사건의 재심과 손해배상 소송을 수임했다는 이유에서다. 현행 변호사법 제31조 3항은 “공무원, 조정위원 또는 중재인으로서 직무상 취급한 사건의 수임을 제한한다”고 규정돼 있다.

검찰은 수사 배경을 설명하면서 인혁당 사건이 수사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국가정보원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가족 77명을 상대로 국가 배상금 일부를 돌려달라며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2013년 7월 제기했다. 대법원이 손해배상 지연손해금(이자)을 크게 줄이는 판결(2011년)을 내리면서 30년치 이자가 순식간에 사라져 배상금이 3분의 1로 줄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가집행으로 배상금을 미리 받았던 피해자들의 금융계좌를 가압류했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와 맺은 과다한 성공보수 약정을 알게 됐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사실관계를 하나하나 따져보자.


1. 인혁당 사건이란 무엇인가

유신 시절인 1974년 4월25일 중앙정보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앞서 4월3일 민청학련 주도로 대학생들의 유신헌법 철폐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배후 세력을 인혁당으로 지목한 것이다. 민청학련 관련자 57명과 인혁당 관련자 24명이 국가보안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7명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법무부는 형 확정 18시간 만인 4월9일 사형을 집행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CJ)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가족과 함께했을 뿐
2. 인혁당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998년 천주교인권위원장 때 문정현 신부 주선으로 인혁당 사형수 부인들이 찾아왔다. 인권위는 그저 이 어머니들과,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김형태 변호사 비망록 에서) 인혁당 사건 진상 규명의 불씨는 천주교인권위가 댕겼다. 인혁당 추모 모임을 주선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펴냈다. 또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김 변호사가 맡았다.

인혁당 유가족들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와 함께 422일간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여 ‘의문사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냈다. 과거 청산을 위한 최초의 국가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 2000년 10월17일 출범했다. 김 변호사는 제1상임위원(별정직 1급 공무원)으로 참여했다.

2001년 3월17일 의문사위는 인혁당 사건으로 수감 중 옥사한 장석구(사망 당시 38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한다. 장씨 사건은 인혁당 사건 조사의 출발점이었다.

“(천주교)인권위는 백방으로 (재판)기록의 존재를 수소문했다. 기록의 보존은 최종적으로 검찰 소관이다. 10년이 지나 모든 기록이 폐기되었다는 게 법무부 공식 입장이었다. 기록이 없다는 데야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2001년 나는 장석구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에서)

3. 인혁당 조사 결과에 영향을 미쳤나

2002년 9월12일 의문사위는 장석구 사건 결정문에서 “당시 인혁당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과 중정 수사관 등을 조사한 결과, 이들이 고문을 통해 증거,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조서 등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결정문에는 김 변호사의 이름이 없다. 김 변호사는 위원회의 내부 갈등으로 2001년 12월 중순부터 업무를 하지 않았고 2002년 1월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두 달 뒤 사표를 수리해 김 변호사의 상임위원 재직 기간은 2000년 10월17일부터 2002년 3월18일로 기록돼 있다.

인혁당 피해자들은 재심을 해달라고 김형태 변호사를 찾아갔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전창일(94)씨가 말한다. “인혁당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천주교에서 우리 가족을 돌봐줬고, 진상 규명도 천주교인권위와 함께 했으니 당연히 김 변호사를 찾아갔다. 국가폭력으로 망가진 우리와 그렇게 신뢰를 돈독히 쌓아온 변호사가 또 어디 있겠느냐.” 2002년 12월10일 인혁당 사건의 재심이 신청됐다. 2005년 12월7일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협의회가 인혁당 사건의 고문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 사건의 사형수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 과다한 수임료를 챙겼나

2006년 10월31일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 사건도 김형태 변호사가 맡았다. 수임료는 배상금의 단 1%로 책정했다. 대신 배상금의 10%를 떼어 공익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4·9통일평화재단이 그렇게 탄생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창복(77)씨는 “김 변호사가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수임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수언론은 수임료를 교묘히 과장했다. 등은 김형태 변호사가 대표인 법무법인 덕수가 4천억원 규모의 소송을 독차지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변호사 수임료는 청구액이 아닌 승소액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청구액을 들먹이며 김 변호사가 거액의 수임료를 챙긴 것처럼 쓴 것이다. 또 최근 대법원이 과거사 사건의 이자 기준을 늦추고 소멸시효를 단축하며 손해배상 소송에 잇따라 패소 판결하는 것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수언론은 과장 보도로 지원사격

“수십 년 동안 재조사를 요구하고 검찰청 문이 닳도록 찾아가 진정하고 청와대에도 청원했지만 단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국가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었던 과거사 사건을 맡아준 변호사들을 단죄하겠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1월22일 4·9통일평화재단 등 성명에서)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