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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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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를 마트라 할 수 없다니요

무역협정 앞세워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해서 안 된다 판결한
서울고등법원 행정부… 미국·유럽에선 무역협정의 ‘직접 효력’ 인정하지 않고 있어
등록 2015-01-21 17:33 수정 2020-05-03 04:27

법원에서 고참 판사들이 즐비하다는 서울고등법원 행정부. 판결 하나로 우리나라 대형마트를 모두 없애버렸다. 상식을 뒤엎는 이런 판결이 어떻게 가능할까? 법에는 대형마트를 “점원의 도움 없이 소비자에게 소매하는 점포의 집단”으로 정하고 있으나, 실제로 이마트나 홈플러스에서는 점원이 구매 편의를 위해 소비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대형마트가 아니라는 게 재판부의 논리다. 법의 취지를 뻔히 알면서 이런 비상식을 당당하게 판결문에 드러낼 정도면 “법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을 조롱하는 수준이다.

당당해서 더 황당한 비상식적 판결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설마 대법관의 양심은 최소한의 상식에 부합하리라 기대하지만), 유탄을 맞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점원이 구매 편의를 봐주는 대형마트, 그래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대형마트가 이제 법률상으로는 대형마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염병 예방을 위한 소독 의무에서 벗어나고 △다중이용시설도 아니어서 실내공기질 관리법도 적용되지 않으며 △소비자 안전을 위한 판매 물품의 결함 정보를 보고할 의무도 지지 않는다. 음악가들도 뒤통수를 맞게 생겼다. 원래 저작권법에 따르면 대형마트 매장에서 음악을 틀면 저작권료를 내야 하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고 그동안 낸 음악 저작권료도 돌려받을 수 있다.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서울 용산구의 한 대형마트. 한겨레 김성광 기자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서울 용산구의 한 대형마트. 한겨레 김성광 기자

심각하긴 해도 ‘사라진’ 대형마트는 쉽게 되찾을 수 있다. 유통산업발전법에서 “점원의 도움 없이”란 문구를 삭제하면 그만이다. 아마 벌써부터 여러 의원이 법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또 남아 있다. 바로 자유무역협정(FTA)이란 복병이다. 법원은 지방자치단체장이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일을 정하면 한-유럽연합(EU) FTA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서비스협정(GATS)에도 위반된다고 보았다. 이들 협정은 서비스 시장 접근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은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를 핑계로 한 “위장된 제한”이라고 판단했다. 심지어 재판부는 FTA가 기본권인 ‘영업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하지 못하도록 한 우리 헌법 정신을 수용한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 처분은 “GATS와 한-EU FTA 조항에 내재된 헌법 정신(영업의 자유)을 간과해 국내 기업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평등 원칙의 관점에서 하자가 있다”고 결론했다. 정부가 대형마트 영업시간을 규제할 경우 국외 기업인 홈플러스는 GATS나 한-EU FTA를 내세워 비껴갈 수 있는데 국내 기업인 이마트나 롯데마트만 제한받아 역차별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법 위의 FTA? 아니올시다!

무역협정을 헌법적 지위로 격상한 것도 문제지만, 곧바로 재판 규범으로 삼은 것은 더 문제다(심지어 재판부는 FTA는 국내법에 언제나 우선하는 특별법으로 봤다). 개인이 무역협정을 근거로 행정처분의 취소를 요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2009년 대법원은 중국산 타일에 대한 반덤핑 관세 부과가 WTO 협정 위반이라는 주장에 대해, 사인(私人)이 ‘WTO 반덤핑 협정’ 위반을 이유로 직접 국내 법원에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를 제기하거나 협정위반을 처분의 독립된 취소 사유로 주장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처럼 무역협정의 ‘직접 효력’을 부인하는 태도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 강하다. 미국은 WTO 협정은 물론 모든 FTA에 대해 미국 내 효력을 부인하고 미국 정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소송에서 원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법률로 규정한다. EU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한-EU FTA에 대해서는 협정 조항을 EU 법원이나 회원국 법정에서 직접 원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유럽이사회 결정이 있다. 거대 경제권과 닥치는 대로 FTA를 체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완충지대가 필요한데 이번 서울고법 판결은 그래서 더욱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온다.

이번 판결의 쟁점인 대형마트 규제가 중소 유통상인, 골목상권 보호를 위해 절실한 이유는 유통 대기업의 해외 진출과 그 발판 노릇을 하는 GATS, FT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 유럽계 유통 대기업 때문에 골목상권이 위협받는 현상은 1990년대 초 남미를 시작으로 동남아시아로 번져갔다. 우리나라는 1996년 유통시장 전면 개방으로 외국계 대형 할인점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소매업 분야에서 국내 유통 대기업은 외국계 대형 할인점과 경쟁을 피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대형마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형마트는 1993년 이마트 창동점 개점을 시작으로 점포 수와 매출액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는데, 1999년에는 점포 수 기준으로 백화점을 추월했고 이후 3년 만에 다시 백화점의 2배를 웃돌았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할인점이 백화점을 누르고 최대 소매 유통업태로 부상하는 데 50년이 걸렸다. 반면 한국에서는 채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할인점이 백화점을 누르는 유통시장의 대변혁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대형마트 수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유통 대기업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기업형슈퍼마켓(SSM)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지각변동 속에 중소 유통업이 초토화되었고, 급기야 정치권이 나서 이른바 SSM 관련법(유통산업발전법·대중소기업상생법) 개정에 나섰다. 이제 대형마트의 규제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허표 수정에 손 놓은 정치인들

이 정도 합의가 있으면 정부가 나서 국제조약, 특히 무역협정과 저촉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간단한 것은 ‘서비스 양허표’에 규제 권한을 명시하는 방법이다. 한-EU FTA만 하더라도 프랑스·벨기에 등 7개 나라는 경제적 수요 심사를 통해 백화점 개업을 인가하지 않을 권한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양허표에 아무런 권한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허표 수정이 필요한데 정부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한-EU FTA 국회 통과 직전 정치권은 “정부는 한-EU FTA 발효(2011년 7월1일) 후 중소 상인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EU 쪽과 협상을 통해 개정하기로 한다”고 합의하고서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당시 여·야·정 합의문에는 모두 10명이 서명했는데, 한나라당 원내대표 자격으로 서명에 참여했던 김무성은 지금 집권여당의 대표이고,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서명한 김종훈 역시 여당 국회의원이다.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한 새누리당의 민생, 서민경제는 신뢰하기 어렵다.

남희섭 변리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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