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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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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유혹은 그대로… 정말 ‘국민 건강’을 생각했어?

담배 가격 올리고는 진짜 필요한 규제는 뒤따르지 않아… 전국 2만4천여 개 편의점에서
수천억원대의 진열대 광고 중, 당국은 문제를 ‘흡연’과 ‘흡연자’에서 ‘담배’와 ‘담배업계’로 전환해야
등록 2015-01-17 17:32 수정 2020-05-03 04:27

담배 한 개비로 온 나라가 새해 첫머리부터 요란하다. 정부가 담뱃값을 2천원 올리자 세밑엔 담배 사재기가 문제되는가 하면, 개비 담배 판매 단속을 두고도 찬반 여론이 끓어넘친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국민 건강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밝혔지만 ‘세수 확보’ 차원의 정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국민 건강을 위한 고육지책이라면 그보다 선행됐어야 할 흡연 규제 정책에 대한 추가적 논의가 아직 뒤따라오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값비싼 담배를 살지 말지 고민하는 흡연자들이 마주 선 담배 소매점의 진열대는 아직 화려하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KT&G는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문화공연을 후원하며 세련된 기업 이미지를 홍보하고 있다. 개인에게 비용을 부담시키면서 판매업자에겐 변함없는 이익과 ‘국민 건강 저하를 위한 홍보’를 보장하는 아이러니를 해결하지 않는 한 가격정책을 통한 금연정책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_편집자


담배는 정치적이다. 태생부터 그러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이른 콜럼버스가 쿠바 원주민들이 피우던 타바코를 가지고 돌아온 뒤부터, 담배산업에서는 줄곧 규제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세수를 확보하려는 정부와, 이를 교묘히 피해 돈벌이하려는 기업들의 힘겨루기가 끊이지 않았다. 끽연자들의 신체가 권력투쟁의 장이 되었다. 일본의 환경사회학자 도다 기요시는 흡연을 ‘구조적 폭력’, 일종의 테러로 간주하고 담배회사를 ‘죽음의 상인’이라고 규정했다. 국제사회가 담배의 해악에 함께 대처하자는 취지로 2003년 세계보건기구(WHO) 차원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을 채택하고 협약의 내용을 이행해나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비가격 규제는 가격 규제 이상으로 중요

“모든 전염병은 질병과 죽음을 확산시키는 감염 수단, 즉 매개체를 가지고 있는데 담배 전염병의 경우 그 매개체는 담배산업과 그들의 사업전략이다.” 2008년 WHO가 발행한 세계 담배전염병 실태 보고서의 일부다. 4천여 종의 화학물질과 50여 종의 발암물질, 100여 가지의 독성물질로 유발되는 이 ‘전염병’을 비싼 값에 꾸준히 팔아치우기 위해 20세기 내내 다국적 담배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은 고도로 발달해왔다.

오미영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담배회사는 담배 제품 생산에서부터 가격, 유통, 프로모션에 이르기까지 마케팅의 모든 요소들을 전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전략을 실시하고 있다.” 고가·중가·저가 등 가격대가 다른 담배 브랜드를 생산해 경제력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이 담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판매 단계인 소매점에서 자사 제품이 가장 좋은 위치에 진열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광고·홍보 금지 등의 비가격적인 규제는 가격 규제 이상으로 중요한 금연정책으로 꼽힌다. 정부는 지난해 9월 ‘금연종합대책’의 하나로 담뱃값 인상안을 내놓고 올해 1월 전격 단행했지만 진짜 필요한 규제들은 뒤따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분석한 FCTC 이행률 자료에서도 한국 정부의 담배 규제가 가격 규제에 치우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에서는 한국 정부가 협약 제6조 담배 수요 감소를 위한 가격·조세 조처의 경우 국제 평균인 62%에 견줘 66%의 이행 수준을 보인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제9조 담배 제품 성분에 관한 규제 항목에서는 국제 평균(48%)의 절반에 가까운 25%, 제13조 담배 광고·판촉·후원 규제 항목에서는 국제 평균(63%)의 4분의 1 수준인 15.4%에 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담배회사의 공세적인 홍보전략에 얼마나 무방비한지는 소매점에 가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화제의 신상!” “맛! 멋! 향의 탄생” “상쾌하게 체인지” “Be free to choose(내가 선택하는 즐거움)” “변함없이 부드러운 맛”. 편의점 담배 진열대 곳곳에 나붙은 담배 광고 문구다. 2천원 인상된 가격을 안내하는 가격표가 빼곡히 붙었지만 휘황한 광고는 변함없다. 휴양지에서 마시는 한 잔의 칵테일을 연상케 하는 광고부터, 제임스 딘처럼 ‘간지 나는’ 모델이 반항기를 뿜어내는 전통적인 광고까지 콘셉트도 다양하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까지 번쩍거리니, 계산을 기다리다보면 광고에 눈길이 옮겨간다. 담배를 피워 무는 순간, 언제라도 광고판 속 모델처럼 쿨해질 것 같다.

존재하지 않던 수요를 창출해온 담배 광고

편의점 업체는 KT&G 등 담배회사들과 계약을 통해 ‘담배진열공간 임차 및 유지보수비(담배지원금)’ 명목의 돈을 받는데, 매대에 광고판을 설치하므로 광고비나 다름없다. 서울 은평구에서 프랜차이즈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 업주는 “광고비는 본사에서 받아 나눠준다. 보통 4 대 6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월 30만~4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전국 편의점 개수는 3만여 개로 추산된다. KT&G는 전국 2만4천여 개 편의점에서 이런 형태의 담배 광고를 하고 있다. 담배회사들이 수백억에서 많게는 수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을 편의점 진열대에 지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담배는 광고를 통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수요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다국적 담배기업이 진출해 적극적 마케팅을 벌인 신흥시장에서는 어김없이 흡연율이 상승했다.

이런 담배 광고의 영향에 가장 무력한 것은 청소년들이다. 지난해 9월 지역사회간호학회지에 게재된 ‘담배광고 목격과 담배회사의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선호도가 청소년의 현재 흡연과 미래 흡연 의도에 미치는 영향’ 연구 결과를 보면, 청소년들이 편의점 계산대에 진열된 담배 광고와 미디어 광고에 노출될수록 미래 흡연 의도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사에서는 전국 광역시·도에 거주하는 청소년의 98.4%가 ‘편의점·잡지·미디어 광고 등에서 담배 광고를 목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편의점 계산대에 진열된 담배 광고를 목격했을 때 흡연 가능성이 잡지 및 홍보물, 미디어 광고 등으로 목격한 경우보다 높았다.

편의점 진열대를 통한 담배 광고가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는 까닭이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가 2013년 5월 서울 5개 구(강북·서대문·영등포·양천·구로)의 중·고등학교로부터 200m 안에 있는 151개 편의점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 편의점당 LED 광고판·담배모형 등을 포함해 평균 6.3개의 담배 광고가 걸려 있었다. 담배사업법 제7조에서는 게임장, 문구점, 만화방 등 청소년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를 담배 소매점으로 지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청소년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학교 주변 편의점에서는 버젓이 담배를 판매하고 있는 셈이다. 조사 결과를 보면, 편의점 내 담배 진열이 편의점 바깥에 노출되는 경우도 87.4%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담배사업법은 “담배진열장 및 담배소매점 표시판을 건물 외부에 설치해선 아니 된다”고 규정하지만 현실에선 사문이나 다름없다. 소매점의 담배 진열대 설치를 아예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소매점에서 담배 제품의 진열대는 일명 ‘파워월’(Power Wall)이라 불린다. 그 자체만으로도 담배 제품에 대한 광고와 판촉 효과가 엄청나다는 뜻이다. 말버러 등을 생산하는 다국적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자사 누리집에서 ‘소매점 진열 금지’는 대부분의 상업광고가 금지된 상황에서 “담배회사에 남겨진 몇 안 되는 경쟁 수단”이라고 항변한다. 뒤집어 말하면 실질적인 규제 수단이기도 한 셈이다. 영국에서는 2003년 담배 광고가 금지된 뒤, 판매를 촉진하고 주의를 끌기 위해 판매 단계에서의 진열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미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타이·핀란드·아이슬란드·아일랜드·노르웨이 등에서는 소매점 담배 진열대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FCTC 이행 의무가 없는 미국 뉴욕에서도 2013년 3월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이와 관련해 강력한 담배 규제안을 내놨다. 소매업자가 담배를 분리된 진열장 또는 서랍장에 두거나 진열대 커튼으로 가리도록 한 것이다.

미국 보수주의 티파티 운동과 결합한 담배회사들의 이권 압력이 강력한 미국이지만, 정부 관료들의 흡연 규제에 대한 인식은 우리 정부보다 진보적이다. 지난해 3월 미 28개 주 법무장관들은 월마트, 세이프웨이 등 대형 소매업체 5곳에 담배 판매를 중단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담배를 일반 상품처럼 정상 판매하는 것이 금연운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담배 규제 정책을 펼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국영방송과 라디오, 잡지, 신문 등의 광고를 금지한 것은 물론 2012년부터는 꾸밈없는 민무늬 포장에 브랜드와 담배명만 간단히 넣는 ‘플레인 패키지’를 도입했다. 이에 대해 담배회사들은 국제상표권·지적재산권 침해라며 헌법소원을 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연방대법원은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디자인 규제는 사유재산권 침해가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포괄적이고도 일관된 정책 결정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흡연 규제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일관된 정책 결정이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한국의 담배 규제 정책과 건강 불평등’ 보고서(2010)는 “담배 규제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담배 문제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정부는 담배규제기본협약의 취지에 맞게 문제를 ‘흡연’과 ‘흡연자’가 아닌 ‘담배’와 ‘담배업계’의 문제로 전환해야 한다. 담배 규제 정책의 주요 대상이 담배회사임을 전면에 부각시켜야 하며, ‘담배업계의 이익’으로부터 ‘공중의 보건’을 보호하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흡연자를 담배 유행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금연에 적합한 사회적 지지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담배 사용을 줄이도록 해야 한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참고 문헌

‘한국의 담배 규제 정책과 건강 불평등’(2010),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

‘한국 담배의 역사’(2010), 강준만

‘담배광고 목격 경험과 담배회사의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선호도가 청소년의 현재 흡연과 미래 흡연 의도에 미치는 영향’(2014), 신성례 등

‘담배 광고·판매촉진·후원활동에 관한 비판적 고찰’(2014), 오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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