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 회장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면서 “형님~” 하고 달려들며 몸을 숙인다. 당장에 포옹이라도 할 듯한 기세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동그란 눈이 더욱 커지고, 양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가면서, 말은 안 하지만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넘쳐난다. 수년 전 재계 총수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행사에서 이건희 회장과 김승연 회장이 연출한 장면이다. 재계 1위 삼성의 위용을 상징하듯, 이건희 회장의 권위의식은 남다르다. 다른 그룹 회장들도 어려워할 정도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은 예외다. 재계에서는 김 회장의 이런 붙임성과 처세술에 놀라워하는 사람이 많다.
<font size="3">아버지와 다른 이재용의 행보 </font>삼성과 한화가 지난 11월26일 한국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삼성은 방위산업 부문의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 석유화학 부문의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토탈을 1조9천억원을 받고 한화에 넘기는 빅딜(대형 사업거래)을 발표했다. 이 회장과 김 회장 간의 평소 친분이 거래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고위 임원은 “회장님들 간의 친분 때문에 삼성-한화 간에는 이전부터 나름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있었고 관계도 좋았다. 그래서 협상이 상대적으로 쉬웠다”고 전했다.
삼성은 이번 빅딜을 두고 “잘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해서 집중하는 사업 구조조정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해온 지금까지의 문어발식 경영과는 사뭇 다르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임원은 이전부터 “규모가 작으면서 이익도 많이 내지 못하는 회사들이 골칫거리다. 솔직히 팔고 싶다”는 얘기를 수차례 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6개월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친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행사 중이다. 이번 빅딜은 삼성의 사업구조 및 경영전략과 관련해 이 부회장이 주도한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핵심 키워드가 부친과의 차별성이라는 것은 나름 상징하는 바가 작지 않다. 삼성전자의 고위 임원은 “그동안 정부 주도의 그룹 간 빅딜은 있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민간 주도의 빅딜로는 처음일 것이다. 단순히 삼성의 사업 구조조정 차원을 넘어 다른 그룹들, 나아가 한국 경제 전체에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선 삼성SDS와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의 주식 헐값 인수와 10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상 상장차익으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삼성의 간판을 내리게 된 삼성테크윈의 주가는 발표 직후 3일간 17.3% 급락했다. 인수자인 한화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주)한화와 한화케미칼의 주가는 각각 5.5%, 5.9% 추락했다. 일단 시장에서는 이번 삼성과 한화 간의 사업 구조조정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본다는 신호다.
사업적 측면에서 타당성이 명료하지 않다면, 빅딜을 단행한 숨겨진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 관심은 당면한 경영권 승계와의 연관성으로 쏠린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종잣돈 마련이라는 목적이 분명했던 삼성SDS 상장 때와는 달리 당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삼성테크윈에는 삼성 3세의 지분이 없다. 삼성종합화학에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지분 4.95%가 있다. 이부진 사장은 이를 팔아 936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 때문에 빅딜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font size="3">세 오누이 계열 분리 사전 포석? </font>
또 다른 해석은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 사장, 이서현 사장 등 세 오누이 간의 향후 계열 분리를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것이다. 삼성으로서는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와 동시에 두 여동생의 계열 분리가 당면 과제다. 삼성이 선택과 집중을 앞세워 주력 사업을 분명히 하면, 나머지 비주력 부문을 떼어내 이부진·이서현 사장에게 넘겨줄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하는 효과가 있다. 실제 삼성은 이번 매각을 계기로 이재용 부회장의 주력 사업부문을 전자 부문, 금융과 서비스 부문, 중공업과 건설 부문 등 세 분야(넓게는 다섯 분야)로 분명히 했다. 이런 구도라면 그동안 언론이 거론해온 것처럼 이부진 사장은 호텔·유통 등을, 이서현 사장은 패션·광고를 각각 맡는 영역 분할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삼성은 빅딜 발표와 함께 삼성전자의 2조2천억원대 자사주 매입이라는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삼성전자 주가는 이틀 새 7% 가까이 급등했다. 자사주 취득은 최근 주가 하락에 따른 대응 외에도 향후 지주회사체제 전환을 통한 이재용 부회장 중심의 지배구조 구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자사주 추가 매입으로 삼성전자의 총자사주는 12.21%로 늘어나게 됐다. 삼성전자의 자사주가 많을수록 향후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했을 때 총수 일가가 지배력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현행 지주회사와 자사주 제도는 재벌 총수들이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회삿돈을 이용해 지분율을 대폭 높여 그룹 전체를 손쉽게 지배할 수 있는 일종의 ‘마술상자’ 역할을 한다.
그 과정을 간단한 예시로 살펴보자. 1단계로 삼성전자를 지주회사(계열사 주식과 자사주 보유 회사)와 사업자회사로 분리한다. 동시에 삼성전자지주회사는 자사주를 사업자회사 지분으로 전환해 지배력을 확보한다. 또 삼성전자 주식 4.7%를 보유한 삼성 총수 일가는 삼성전자지주회사와 삼성전자자회사에 각각 4.7%의 지분을 갖게 된다. 2단계로 총수 일가는 자회사 지분을 지주회사에 현물로 출자하고, 대신 지주회사 주식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총수 일가의 지주회사 지분은 4.7%에서 20% 수준으로 껑충 뛴다. 총수 일가는 자회사 주식을 한 주도 쥐고 있지 않지만, 지주회사를 통해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총수 일가→삼성전자지주회사→삼성전자자회사→삼성전기 등 다른 전자 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삼성 전문가들은 3단계로 삼성물산, 나아가 삼성SDI도 각각 지주회사와 자회사로 나눈 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SDI 지주회사 3곳을 모두 합병하면 금융을 제외한 나머지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font size="3">허점만 노려도 지분 4.7%→40%로 뻥튀기 </font>
4단계는 총수 일가 지분이 45.56%인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을 삼성지주회사(전자·물산·SDI 지주회사의 합병회사)와 합쳐서, 삼성홀딩스(삼성의 최종 지주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총수 일가의 지분을 30~40%로 높여, 외부의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에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또 이후 삼성홀딩스를 적당히 분할한 뒤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 사장, 이서현 사장 간에 주식 맞교환을 하면, 계열 분리와 안정적 지분 확보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삼성 3세 승계와 지배구조 구축 작업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총수 일가가 추가로 투입한 돈은 거의 없다. 단지 현행 지주회사와 자사주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활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삼성 3세들이 이를 현실화하려면 적잖은 난관을 뚫고 가야 할 전망이다. 시민단체들과 정치권에서는 현행 지주회사와 자사주 제도의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정미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금융개혁위원장(변호사)은 “선진국에서는 회사를 인적 분할할 때는 자사주를 바로 소각하도록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의원이 대표발의한 보험업법 개정 움직임도 더욱 탄력받을 전망이다. 현행 보험회사 자산운용 규제는 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이 총자산의 3%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데, 다른 금융업법과 달리 계열사 주식 가치를 시가 대신 취득원가로 계산하도록 해서 ‘삼성 특혜법’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보험업법이 개정되면, 삼성생명은 현재 갖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 7.6%(시가 15조원어치)를 대부분 처분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삼성 총수 일가→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나머지 삼성 계열사로 이어지는 삼성의 현 지배구조가 깨지게 된다. 경실련이 11월26일 개최한 ’삼성 경영권 승계 및 소유지배구조 문제의 진단과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보험업법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 그리고 지주회사와 자사주 제도의 개선 필요성에 대해 입을 모았다.
삼성의 3세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계열사 임직원과 투자자들의 반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미 삼성테크윈 노동자들은 공장별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매각 저지 운동을 시작했다. 삼성테크윈 제2공장의 경우 이틀 만에 전체 직원 1650명 중 1100명 이상이 비대위에 참여하는 등 호응이 뜨겁다. 삼성테크윈 제2공장 비대위 관계자는 “‘삼성고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입사해 노조도 만들지 않고 삼성맨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했는데, 회사의 일방적 결정에 허탈감과 함께 분노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삼성테크윈 비대위는 내년 1월 초로 예상되는 한화의 실사 저지는 물론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도 불사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이 70년간 고수해온 무노조경영도 중대한 고비에 봉착할 전망이다. 삼성테크윈 노동자들은 결국 노조가 없는 것이 회사의 일방적 결정을 초래한 원인이라 보고 노조 결성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삼성테크윈의 이런 움직임은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등 나머지 매각 대상 계열사는 물론 다른 삼성 계열사들로도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font size="3">매각 저지 운동 시작한 삼성테크윈 </font>
삼성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3세들에게 헐값에 넘기면서 세금 없이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는 ‘묘수’를 찾았다. 하지만 이후 15년 이상 거센 사회적 논란을 초래한 것은 물론 삼성 3세 승계의 정당성까지 위협하는 ‘원죄’가 되었다. 2010년 삼성특검 재판에서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 주식 헐값 인수 사건에 대한 사법적 처리가 종결됐지만, 최근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의 상장을 계기로 10조원이 넘는 상장차익을 둘러싼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영선 의원은 불법이익 환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의 3세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총수 일가에 혜택을 주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와 투자자에게 큰 손실과 희생을 안기고, 기존 법체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국가 경제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 재연된다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위험성이 크다.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의 3세들은 이제 ‘누구를 위한 삼성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이냐’는 국민의 근본적 물음에 직면하게 됐다.
곽정수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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