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영원한 정리해고자’라고 대못을 박은 날(11월13일)로부터 일주일 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20여 명은 1박2일로 강원도를 함께 다녀왔다. 머리를 식힐 겸 떠난 길 위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러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이 ‘대법원 판결 이후’에 관한 이야기를 에 보내왔다. _편집자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눈치 없이 날아든 기자의 질문에 당황했다. 입술이 말랐다. 답변은 궁했고 머릿속 단어는 쓰러진 채 좀체 일어서질 못했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멈춘 머리와 달리 입은 어떤 말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에 자국이 남지 않아 지금도 모르겠다. 다리는 떨렸고 손엔 땀이 났다. 시간이 멈춰선 것만 같았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 판결은 짧았다. 2천 일을 기다려온 선고였지만 대법원은 판결문을 읽는 데 20초가량만 썼다. 쌍용차 해고 무효 확인 사건 ‘원고 노석주 외 152명. 피고 쌍용자동차 주식회사.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대법원은 돌려보낸다고 했지만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지난 2월7일 서울고법이 판결한 정리해고 무효가 유효가 되는 순간, 6년의 지난 시간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흔들리던 촛불이 ‘훅’ 부는 바람에 맥없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대법원을 향해 있는 힘껏, 토악질을 해대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흔한 절규 섞인 외침도 없었다. 물방울 떨어지듯 흐르던 시간이 기어코 얼어버렸다.
2천 일을 기다려온 선고였지만…판결 이후 대법원은 비판의 난지도가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서울고법에서 부당하다고 판결한 정리해고가 어떤 이유로 대법원에서 뒤집혔을까. 서울고법의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 판결은 잘못된 것일까. 그 열쇠는 대법원 구성과 자본과의 카르텔에서 찾아야 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으로 구성된다. 우리 삶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성이 다양해야 하는 이유는, 한 사회의 목소리와 처지가 나날이 갈라지고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처럼 대법원이 일방적 색깔로 나아간다면 그만큼 이 사회에서 구석으로 몰리게 되는 사람은 늘어나게 된다. 그 예가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한 가지 색으로 전열을 정비한 채 이견 없이 밀어붙였고 쌍용차 해고자들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믿을 구석이 있던 쌍용차는 선고를 앞당기라고 종용했고 변호인단을 19명으로 구성했다. 실로 매머드급이다. 그 가운데는 대법관 출신 2명과 고등법원장 출신 1명도 껴 있었다. 항소심 재판까지는 없던 인물들이다. 2심까지 쌍용차의 변호는 I&S법무법인이 맡았다. 그러나 패소하자 법무법인 세종, 바른, 동인 3곳을 긴급 투입했다. 돈과 권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세종의 김용담, 바른의 박일환 변호사는 대법관 출신이다. 동인의 김진권 변호사는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이다. 초록은 동색이었고 가재는 게 편이었다. 독수리 죽은 자리에 앵무새가 지저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 다잡을 새도 없이 시간은 속도를 냈다. 해고자들은 술잔 앞에 맥없이 쓰러졌고 쏟아지는 문자에 심란했다. 정리해고 사건이 자본을 향해 신작로를 만들었다. 그 길에서 오늘은 쌍용차 해고자들이 로드킬 당했지만 내일은 또 다른 선한 이들의 로드킬이 예견되고 있다. 정리해고를 향한 제한속도는 풀렸고 경찰관은 철수했다. 그야말로 신세계가 자본 앞에 펼쳐진 것이다.
법대에 앉은 앵무새들의 지저귐대법원 선고가 나던 11월13일에 날아든, 그러나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판결의 부당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순서를 매기면 되는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비루하게 살아가는 집안 이불을 들어 생활 곳곳을 보여주면 달라질까. 쌍용차 노동자들이 이 모든 시련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결기를 만천하에 떨치면 상황은 달라질까. 생각은 복잡하고 길은 덤불에 덮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앵무새가 생각났다. 대법원이 권력과 자본의 입맛에 맞는 단어만 취사선택하는 모습이 천생 앵무새 같았기 때문이다.
소설 를 끄집어낸 이유다. 는 미국 소설이다. 워낙 오래전에 봤던 책이라 줄거리가 해진 채 기억에 남아 있다. 는 재판에 관한 소설이다. 인종 갈등을 다뤘고 저자가 성장한 이후에 쓴 회고담에 가깝다. 백인이 미국 사회의 공기를 장악하던 때 흑인은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마침 흑인이 피의자로 몰렸고 사형에 임박했다. 그러나 흑인에겐 죄가 없었다. 백인들이 누명을 씌운 것이다. 배심원 또한 백인 일색이었다. 인종차별의 시작과 끝은 배심원 구성이 틀어쥐고 있었다.
대한민국 대법원을 생각해본다. 특히 쌍용차 재판의 주심을 맡았던 박보영 대법관은 소수의 목소리를 잘 들으라며 임명된 사람이다. 그 소수 배려의 몫조차 해고자들을 위한 몫은 아니었다. 이것은 야속한 문제로만 타박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서 있는 법대가 지금처럼 견고하다면 참사에 가까운 일은 반복될 것이다. 이는 재앙의 전조에 관한 문제로 다뤄야 한다. 그들이 들춰봤던 서류 뭉치엔 우리의 눈물이 묻어 있지 않았을 테고 읽어내려갔던 활자가 세월을 증언할 수 없다. 기울어진 사법 정의를 세우는 것이 기계적 중립이 되어선 안 된다. 약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낮춰 귀를 더 가까이 대는 수고스러움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생각도, 의지도, 관심도 없었다. 이는 한국 사회 노동의 심각한 앞날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무고한 이들, 즉 앵무새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인종차별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스카웃은 7살 때 겪은 일을 커서 회고한다. 쌍용차 정리해고 재판에 9살 아들 녀석이 따라왔다. 평소보다 더 밝게 뛰어놀았고 과장된 몸짓도 곧잘 했다. 4살 때 겪었던 파업 경험에서 얻은 불안을 달래는 나름의 방법이다. 결국 우리는 법대에 앉은 앵무새들의 지저귐을 무력하게 들어야 했고 ‘모든 편견과 차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인 앵무새는 죽었다. 아이는 대법원 선고 이후 이틀 동안 구토 증세를 보여 학교를 가지 못했다.
다시 서야 하고 내일을 살아가야 할대법원 선고가 있던 날 경남 밀양의 할머니들은 대법원 건물 앞에서 오열했다. 그들도 이 사건의 원고다. 해고 사건이 아닌 고통과 아픔과 시련의 원고다. 다시 서야 하고 내일을 살아가야 할 우리 주변의 원고 대리인이다. 바로 그들을 죽인 것이다. 평생 해코지 없이 살아온 이들의 삶을 훼방 놓고, 뿌리를 들썩이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파리 떨구듯 제 살점 떨궈가며 시련의 계절을 버티고 살아가는 이 선량한 앵무새를 죽이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숱한 고통과 괴롭힘의 기둥뿌리는 어디인가.
우리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법대에 앉아 오늘도 권력과 자본의 태평성대만을 하릴없이 노래하는 저 앵무새를 죽이지 않는다면 눈물 떨궈 희망의 씨를 뿌리는 선량한 앵무새는 결코 살 수 없다. 앵무새를 죽여야 앵무새가 사는 역설과 비탄의 시간 속에 우리가 서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nomadchang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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