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008ABD">영화 에는 많은 수식어와 설명이 덧붙는다.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한국 상업영화, 1990년 를 제작했던 이은 명필름 공동대표가 빚어낸 2014년판 ,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제작·개봉비 2억여원을 모아준 5천여 명의 개미 후원자들,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영화사들이 공정한 영화시장 조성을 위해 만든 배급사 ‘리틀빅픽처스’의 두 번째 배급작품, 영화 속 촛불문화제 장면에 직접 출연한 이랜드·기륭·쌍용차 노동자들, 아이돌 가수인 도경수의 스크린 데뷔작….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한다. ‘아름다운 투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줬던 2007~2008년 이랜드 파업을 모티브로 한 영화.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대량 해고와 외주화에 맞서 511일 동안 싸운 기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펑펑 눈물을 쏟게 하는 슬픈 드라마. 엄마로서, 아내로서 가족과 생계를 걱정하는 한편으로, 그들은 끝까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꿋꿋이 버텼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됐다. 비정규직 노동이 바로 나의, 내 엄마의, 내 아내의, 내 딸의 문제라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 , 웹툰 에 이어 영화 로 계속 변주되는 까닭이다.
문득 궁금했다. 이랜드 투쟁의 주인공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화 의 결말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현실에선 그들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부지영 감독)이다.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싸우는, 의 진짜 주인공들을 만나봤다. 기사는 영화 속 장면과 이랜드 투쟁의 과거·현재를 씨줄과 날줄 삼아 엮었다. _<font color="#008ABD">편집자</font></font>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인했다. ‘급식비 못 내서 점심 못 먹으면 운동장 수돗가에서 물이나 먹지 뭐….’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던 2008년 4월의 어느 날. 중학생 작은아들이 가슴을 긁어내리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300일 넘게 투쟁하느라 가족도 제대로 못 챙기는 엄마를 향한 원망을 꾹꾹 눌러담아 문자메시지를 찍어내려가는 동안 아이의 마음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황선영(49)씨는 그때 아이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며온다.
‘드뎌 전기가 끊어졌다.’ 그 전해 겨울 어느 날인가는 큰아들이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차마 답을 보내지 못했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 맞서 길바닥에서 악을 쓰며 싸우고, 버티기에도 벅찼던 나날들이었다. 밤늦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아들은 희뿌연 촛불 하나를 켜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밤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밀린 전기요금을 내라며 엄마인 선희(염정아)에게 편의점 알바비로 받은 봉투를 내민 영화 속 태영이처럼, 속 깊은 아들은 “전기 끊기니까 오히려 집중이 더 잘됐어요”라고 엄마를 위로해줬다.
<font size="3">무조건 빨간 립스틱 바르라던 이랜드</font>황선영씨는 영화 의 주인공 선희처럼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리고 “저 생활비 벌러 나와요, 반찬값 아니고”라던 선희처럼 가족 생계비를 책임진 처지였다. 첫 직장은 무역회사였다. 둘째아이를 낳고는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 2003년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산책을 나갔다가, 한국까르푸 상암점 채용공고 포스터를 발견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사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재취업을 원하는 애엄마에게 대형마트는 최후의 보루다. 대한민국에서 애엄마를 흔쾌히 받아주는 몇 안 되는 직장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원서를 낸 다음날로 당장 출근하라고 했다. 남편이 퇴근하는 저녁 7시부터 황씨의 근무가 시작됐다. 처음엔 계산원으로 하루 5시간을 일했다. 그러다 고객센터로 자리를 옮겼고 근무시간은 8시간으로 늘었다. 그래봤자 월급은 90만원 안팎이었다.
2006년, 많은 것이 뒤틀어졌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팔리지 않는 물건이 창고에 쌓여갔다. 한국까르푸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돼 ‘홈에버’로 이름을 바꿨다. 프랑스 자본이던 까르푸와 이랜드는 확실히 달랐다. 이랜드는 계산원들에게 무조건 빨간색 립스틱(영화에서는 진분홍색 립스틱)을 바르라고 강요했다. 그래야 이가 하얘 보이고 웃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이랜드그룹은 뉴코아 매장에서 계산원 350여 명을 외주화하기로 했다.
2007년 7월1일, 2년 이상 일한 계약직(기간제)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하는 이른바 ‘비정규직법’(기간제보호법)이 시행될 터였다. 외주화는 회사 쪽의 선제 대응이었다. 이랜드는 영악했다. ‘이윤이 최우선’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따랐다. 외주화에 이어, 4월엔 홈에버 시흥점에서 18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을 처음으로 해고했다. 18개월 이상 근무자는 고용보장을 하기로 한 노조와의 단체협약도 무시했다. 이랜드뿐만이 아니었다. 대다수 기업이 새로 시행되는 비정규직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위해 업무를 통째로 외주화해 외부 용역업체에 넘기거나, 근속 2년을 앞둔 비정규직을 해고했다. 영화 속 대사의 말마따나 “외주화는 트렌드”였고 “계약직은 파리 목숨”이었다.
이랜드일반노동조합은 비정규직법 시행을 하루 앞둔 6월30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그때만 해도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 다 정규직이 되는 법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아닌 거죠. 이랜드 투쟁은 모든 국민에게 비정규직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 비정규직법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 더 나쁜 일자리인 용역으로 전환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린 싸움이었죠.” 이경옥(56) 전 이랜드일반노조 부위원장(현재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의 회고다.
<font size="3">노동조합의 ‘노’ 자도 몰랐던 이들</font>이 전 부위원장은 영화 속 순례와 많이 닮았다. 어머니처럼, 맏언니처럼 다독이며 각 매장의 노조 결성을 도왔다. 파업이 300일, 500일 넘게 장기화되자 버팀목처럼 노조를 지켰다. 그도 처음부터 뜨거웠던 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물다섯에 결혼한 그는 20년 가까이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다. 남편이 갑작스레 뇌출혈로 세상을 뜨지만 않았어도, 대형 조선업체를 다니던 남편이 고깃집을 하다가 남긴 빚만 없었어도, 2000년 한국까르푸 중계점에 샐러드를 만들러 입사하진 않았을 게다. 100만원 안팎의 월급도 그저 고마웠다. 동료가 과로사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노조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이랜드 투쟁 때 정규직이면서도 비정규직을 위한 싸움에 앞장서다가, 직장에서 해고되고 징역형을 살았다.
<font color="#008ABD">[“아줌마끼리 쑥덕쑥덕해봐야 회사 털끝 하나 못 건드려요.” 외주화에 맞서 ‘더 마트’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회사를 대변하는 최 과장(이승준)이 선희에게 말한다.]</font>영화제작사가 밀고 있는 의 홍보 문구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들의 뜨거운 싸움”이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해고와 파업을 겪으면서 세상에 눈을 떠가고, 가족과 동료와 갈등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도드라지게 하려는 의도다. 이랜드 투쟁의 주인공들 역시 그랬다. “쇼핑하는 고객인 척하고 뉴코아 강남점 점거하러 들어갈 땐 무서워서 달달 떨었어요. 깡패들이 중간중간 숨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박미숙(51)씨는 에서도 전투경찰한테 주인공들이 맞거나 끌려나오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박씨를 비롯해 당시 홈에버 면목점에서 근무했던 노동자 9명은 지난 9월 비공개 시사회에서 를 관람했다.
홈플러스(2008년 이랜드그룹은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매각했음) 면목점에서 만난 여성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2005년 노조가 생기기 전까지는 노동조합의 ‘노’ 자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마땅히 다른 일자리를 못 찾아서, 남편이 사업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싱글맘이라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대형마트 계산원이 된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511일간의 투쟁 마지막까지 버텼던 180여 명 중 일부였다.
<font size="3">이랜드 몸통 흔든 그들의 점거농성 </font>아줌마는 강했다. 한명희(41)씨는 “싸움이 길어지면서 가족들과의 갈등이나 아이 문제 때문에 다들 마음고생이 많았다. 마지막엔 어느 정도 사명감으로 버텼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박씨, 한씨 등 면목점 조합원 대부분은 2007년 당시 정규직이었다. 이랜드에 인수되기에 앞서 한국까르푸가 2003년 상반기 입사자까지는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줬기 때문이다. 월급은 정규직 110만~120만원, 비정규직 80만~90만원으로 어금지금했지만, 적어도 정규직이라면 당장 해고될 처지는 아니었다. 당시 이랜드그룹은 홈에버와 뉴코아에서 비정규직 700여 명을 해고했다. 그런데 정규직이 왜? 그것도 500일 넘게? “옆에 일하는 사람이면 다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음으로는 다 같은 비정규직이었죠.”(마수경·45) “비정규직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정규직 차례잖아요.”(황옥미·53)
아줌마들의 싸움은 그렇게 남달랐다. 1박2일만 점거하자고 들어갔던 홈에버 상암점은 20일간의 점거농성 기간에 따뜻한 공동체이자 해방구였다. 농성장 안에 솥을 걸어 국을 끓이고, 카트는 ‘밥차’로 쓰였다. 계산대 아래 종이상자를 깔고 한뎃잠을 자면서도 ‘파란 스머프’라고 불린 반팔 티셔츠를 맞춰 입은 여성 노동자들은 길게 줄을 꼬아 줄넘기대회를 하고, 종이학을 접으며 투쟁을 즐거이, 기꺼이 이어갔다. 그 투쟁의 기운은 ‘이랜드 불매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2008년 5월 이랜드그룹은 홈에버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의 털끝이 아니라, 몸통을 흔든 셈이었다.
<font color="#008ABD">[‘노조 지도부는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회사와 합의했다. 지도부들의 희생으로 이룬 절반의 승리였다.’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자막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font>2008년 11월, 이랜드일반노조는 회사 쪽과 노사합의를 이뤄냈다. 홈에버를 인수한 홈플러스가 합의문에 사인했다. 비정규직 2천여 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노조 지도부를 포함한 12명은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단서조항을 넣어 끌어낸, 안타까운 승리였다. 그리고 이랜드일반노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회사가 바뀜에 따라, 노조도 홈플러스테스코노조로 이름을 바꿨다. 조합원들이 여전히 애정을 담뿍 담아 “우리 위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김경욱 노조위원장은 지금 정보기술(IT) 관련 회사에서 일한다. 퇴직금 7천만원을 조합원들 생계비로 내놨던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으로, 이경옥 부위원장은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으로, 홍윤경 사무국장은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선교부장으로 여전히 ‘그때 그 사람들’ 곁을 지키고 있다.
<font size="3">무기계약직 전환, 또 다른 싸움의 시작 </font>조합원들도 일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비정규직이던 황선영씨는 무기계약직이 됐다. 지금은 홈플러스 월드컵점 업무지원부서에서 일한다. “고생 많았지? 정규직 됐지?” 파업이 끝나고 복귀하자, 얼굴을 아는 고객들이 반갑게 물었단다. 하지만 황씨는 답을 하지 못했다. 무기계약직이 ‘무늬만 정규직’인 탓이다. 임금체계도 정규직과 다르다. 정규직은 기본급을 받지만, 무기계약직은 기본시급에 각종 수당을 더해준다. 매달 일하는 시간에 따라 월급은 들쭉날쭉이고, 임금인상률 3%를 똑같이 적용하더라도 정규직보다 인상 폭이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전히 월급은 평균 110만원 수준밖에 안 된다. 파업 이후로는 오른쪽으로 돌아눕지도 못한다. 오른쪽 달팽이관에 어지럼증이 생기는 메니에르병을 앓게 된 탓이다. 허리디스크도 후유증으로 남았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라는 식의 막무가내는 없어졌지만, 감정노동은 여전하다. “2012년 한 계산원이 고객의 짐에 계산 안 한 물건이 있는지를 확인했다가, ‘도둑 취급하냐’고 항의하는 고객에게 사과하라며 탈의실에 갇힌 일이 있었다”고 황씨는 전했다. 에서 혜미(문정희)가 탈의실에서 고객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했던 장면은 기막힌 현실의 재구성이다.
홈플러스에는 현재 2개의 노조가 존재한다. 이랜드일반노조가 전환한 홈플러스테스코노조와 홈플러스노조다. 노사갈등의 불씨는 이랜드 때처럼 타오르지만 않았을 뿐 잠복해 있다. 홈플러스는 비정규직과 ‘점오(0.5)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하루 8시간을 근무시키면서도 7.5시간에 해당하는 임금만 지급하는 꼼수를 부려 올해 노조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시나리오를 1년 넘게 고쳤는데 결론은 항상 같았다. 영화 밖 어딘가에서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이 싸움이 행복이냐, 불행이냐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맞서 싸우는 건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10월22일 기자시사회에서 부지영 감독은 ‘열린 결말’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언제나 그렇지 않았던가. 여성 노동자에게 삶은 곧 투쟁이니까.
<font size="3">전태일의 기일인 11월13일 개봉</font>
경찰한테 머리끄덩이를 잡히면서도 선희(염정아)는 소리쳤다. “사람대접 해달라고요.” “이렇게 외치는 우리를 좀 봐달라고요.” 지금 영화 를 좀 봐달라고 외치는 이들은, 정작 이렇게 외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밀 때마다 상품이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산한 삶을 좀 봐달라고. 한 번쯤 생각해봐달라고. 영화 의 개봉일은 11월13일. 그날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기일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font color="#C21A1A">■ 참고 문헌</font>: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지원대책위 기획·후마니타스·2008), (유경순 엮음·그린비·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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