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가 완성됐다.” 국가가 과거사 사건 피해자에게 되풀이하는 주장이다. ‘국가가 범죄를 저질렀지만 피해자가 소송을 3년이나 늦게 내 손해배상할 의무가 없다’는 논리다.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법원은 ‘소멸시효’를 형식적·기계적으로 적용한다. 고문·학살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르고 진실을 반세기 넘게 은폐한 국가에 법원이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활동 요약 보고서’격 문서마저 배척
국가정보원의 정치·선거 개입 사건에서도 국가와 법원은 그랬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은 경찰과 검찰이 압수하거나 임의 제출받은 핵심 증거들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의 휴대전화부터 개인 전자우편까지 “공무상 비밀에 관한 물건”인데 수사기관이 국정원의 승낙 없이 압수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판결문(204쪽)의 3분의 1(76쪽)을 할애해 국정원의 주장(증거능력)을 판단했다. 그 결과 국정원의 정치·선거 개입을 증명하는 결정적 물증인 ‘국정원 X파일’ 2개가 떨어져나갔다.
첫 번째 X파일은 국정원 여직원 김하영(30)씨의 노트북에서 나온 메모장 문서 파일 ‘__.txt’이다. 민주당이 2012년 12월12일 김씨를 고발하자 김씨는 노트북을 경찰에 임의 제출했다. 김씨가 이 문서 파일을 삭제했지만 경찰이 복구해냈다. 문서 파일에는 30개의 아이디와 닉네임 등 김씨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중에 민간인 조력자로 밝혀진 이아무개씨의 인적사항과 그 이름으로 개설된 아이디와 닉네임도 함께였다. 국정원 심리전단의 ‘활동 요약 보고서’인 것이다. 그 문서 파일의 내용을 기초로 검찰은 국정원의 정치·선거 관여 댓글을 찾아낼 수 있었다.
국정원 쪽은 “문서 파일을 증거로 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하영씨가 노트북을 경찰에 임의 제출할 때 “지난 10월 이후 3개월 동안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 글에 대해서만 확인”하라는 조건을 달았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수긍했다. “임의 제출 범위를 벗어나는 게 명백”한데도 “수사기관이 별도의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지 않고 문서 파일을 압수한 것은 영장주의 원칙을 위배”한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X파일은 ‘sseurity.txt’(시큐리티 파일)다.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 소속 직원 김아무개씨가 국내 포털 사이트에 개설한 전자우편의 ‘내게 쓴 메일함’에서 나왔다. 시큐리티 파일에는 트위터팀 소속 국정원 직원들의 이름 앞 두 글자와 269개 트위터 계정, 비밀번호, 활동 일시, 장소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국정원의 트위터 활동을 밝혀낼 핵심 증거다. 이 또한 재판부는 증거능력을 배척했다. 김씨가 법정에서 “이메일 계정을 내가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큐리티 파일 등의 첨부파일은 작성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는 이유에서다.
선거 영향 미쳐도 선거운동은 아냐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했다. “시큐리티 파일에는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일부 기재 내용은 김씨의 구체적 업무 내역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씨가 작성한 것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든다.” 그러나 전문법칙이 적용되는 ‘진술 증거’라서 김씨 본인이 작성했다고 진술하지 않는 한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국정원 직원들이 인정한 175개 트위터 계정과 이 계정에 담긴 11만여 트위터 내용만이 선거법 위반 혐의 증거로 채택됐다. 그 증거를 토대로 봤을 때 국정원의 트위터 활동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선거운동”이라고 할 순 없다며 재판부는 ‘선거법 무죄’를 선고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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