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43)가 한국에서도 ‘록스타 경제학자’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인 피케티의 저작 (글항아리)은 지난 9월12일 한국어판이 발간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출판계에선 피케티 관련 책들이 앞으로도 줄줄이 나올 예정이다. 9월19~20일 피케티 방한과 강연을 전후로는 경제학계를 중심으로 피케티의 주장이 과연 맞느냐는 깊이 있는 논쟁부터 시작해, 피케티를 두고서 ‘빨갱이’ ‘아들 나이의 어린 학자’라는 등 저열한 공세까지 이어졌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피케티한테 왜 호들갑에 가까울 만큼 열광하는 걸까?
세미나 줄줄이 열리고 관련서 출간 대기 중우선 ‘불평등’이란 열쇳말에 주목해야 한다. 피케티는 그동안 주류 경제학이 외면해왔던 소득불평등 구조를 300년간의 방대한 통계자료에 바탕해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소득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나쁜 정치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에서 찾기 때문에 혁명적이고, 급진적’(김공회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연구위원)이라거나 ‘그의 분석 결과는 불평등에 대한 우리 인식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여주는 중요한 발견’(이준구 서울대 교수)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까닭이다.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임금과 저임금. 양극화의 폐해를 온몸으로 느껴온 한국 국민은 미국보다 재분배 정책에 대한 선호도가 2배 이상 높은 69%에 이른다(9월19일 한국재정학회 ‘위기의 자본주의-바람직한 재분배 정책의 모색’ 토론회 발표 자료). 실제로도 김낙년 동국대 교수(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4.87%(2012년 기준)로, 일본(40.5%)·영국(39.15%) 등 선진국보다 높고 불평등이 심각한 미국(48.16%)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이란 단어가 갖는 폭발력은 클 수밖에 없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오큐파이 운동’이 제기했던 ‘1 대 99 사회’에 대한 분노의 잔상도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1~2년 새 마이클 샌델의 ,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등의 책이 큰 인기를 끈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한국 사회가 불평등이란 주제를 논의 불가능한 주제에서 문제적인 주제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고 진단했다. 글항아리가 펴낸 은 출간 일주일 만에 한국출판인회의가 집계하는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7위에 올랐다. 9월18일 기준으로 2만3천여 권이 팔렸고 주문도 1만 부가량 밀려 있다. 800쪽 넘는 분량에다 3만3천원의 가격,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만만치 않은 경제학서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초반부터 ‘미풍’이 불고 있는 셈이다.
출판업계에서는 ‘피케티 현상’이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피케티와 관련된 책이 최소 7권 이상 출판되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저작인 , (마로니에북스) 그리고 피케티를 비판하는 한국 보수주의 학자 7인이 묶어낸 (백년동안)가 이미 출판됐고, 9월22일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6명의 경제학 연구자들이 피케티를 바라본 (바다출판사)가 나온다. 이 밖에도 한울출판사가 유종일·류동민 교수 등의 글을 엮은 피케티 관련 책을, 시대의창은 경제부 류이근 기자가 피케티를 주제로 경제학자들을 인터뷰한 글을 묶은 책을, 레디앙은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원장의 피케티 해설서를 9~10월 중에 펴낼 예정이다. 글항아리는 의 번역을 도왔던 영국 옥스퍼드대학 박사과정의 김동진씨가 피케티 관련 세계 논쟁 지도를 그린 책 을 10월10일 펴내는 데 이어, 피케티 저작인 도 출판한다.
뒤 새누리 ‘경제민주화’ 공약피케티 개인을 넘어서 자본주의 비판 관련 서적이 봇물을 이루는 흐름도 나타난다. (와타나베 이타루·더숲)는 올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최근 한두 달 새 (장하성·헤이북스), (신승철·알렙), (김수행·돌베개), (황태연·중원문화), (강신준·길) 등이 출판됐다.
재계와 보수적 입장의 경제학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피케티의 인기가 기폭제가 되어 ‘부자 증세’ 등 정치적 구호가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여기서 피케티의 두 번째 열쇳말이 등장한다. 바로 세금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완화할 대안으로 ‘돈이 돈을 버는’ 자본수익률을 낮추는 방법을 제시한다. 최상위계층에게 최대 80%의 소득세를 물리고, 글로벌 자본세를 도입해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나라를 옮겨다니는 걸 막자는 것이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재계와 여당 등은 감세가 대세처럼 돼 있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바뀔까봐 걱정하는 거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담뱃값, 주민세 등 쪼잔하게 ‘서민 증세’로 가고 있는데 때마침 방한한 피케티로 인해 ‘부자 증세’ 목소리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9월16일 연 ‘피케티 21세기 자본론과 한국 경제’라는 제목의 세미나에서는 이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피케티가 한국 조세정책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법인세 부담을 높이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피케티가 월드스타라서 일반 국민들이 거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될까봐 걱정이다.”(현진권 자유경제연구원장) “피케티처럼,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면 세금을 줄여서 투자를 활성화해 경제성장률을 올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
지난 9월12일 피케티가 운영하는 ‘월드톱인컴데이터베이스’(WTID)에 한국 통계 연구자료를 등재한 김낙년 교수는 “불평등과 증세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 확장될 거다. 하지만 차분한 연구 결과에 기반한 논의가 아니라, 피케티를 소재로 써서 서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정치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일방적인 피케티 ‘때리기’와 ‘띄우기’로 변질돼가는 논의 지형을 비판했다.
한국 사회의 ‘피케티앓이’는 잠시 지나가는 열병으로 그칠까, 아니면 장기적으로 ‘부자 증세’라는 정책 변화를 끌어낼 ‘신화’가 될까? 아직 판단을 하기엔 이르다. 앞서 가 100만 부 이상 팔리고 각종 강연·북콘서트 등으로 인기를 끌자,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재빨리 ‘경제민주화’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담론은 현실을 움직였지만, 바꿔내지는 못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최근 “개인적으로 피케티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태인 새사연 원장은 “최경환 부총리가 소득 주도 성장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결국 ‘부채 주도 성장’ 위주의 정책을 내놓는 것처럼 여당이 진보 쪽 화두를 선점하는 것에 재미 들린 것 같다. 미국에서도 피케티 열풍이 정책 반영에 미친 영향은 아직 미미하다. 게다가 한국은 야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이라 부자 증세로까지 이어질지는 의문이다”라고 내다봤다.
담론은 현실을 움직였지만 바꿔내지는 못해그러나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담론은 허무하다. 피케티 스스로도 서문에 썼다. “부의 분배라는 문제는 언제나 주관적이고 심리적이며,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고 갈등적인 면을 갖게 된다.” 지난 9월1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피케티가 한국에 던진 첫 메시지는 여기서 한발 나아간다. “지나치게 부의 격차가 벌어지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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