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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원자력공동체’ 카드, 그 이면에는…

박근혜 대통령, 유럽원자력공동체 본뜬 ‘한·중·일 원자력안전협의체’ 제안…

전문가들 “국내 핵발전소 안전 문제, 배상 제도 구축 논의 등 열린 조직 되어야”
등록 2014-08-30 15:01 수정 2020-05-03 04:27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한·중·일 원자력안전협의체’ 구성을 언급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한·중·일 원자력안전협의체’ 구성을 언급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동북아는 원자력발전소가 밀집한 지역입니다. 원자력 안전 문제가 지역 주민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유럽연합(EU)이 석탄·철강 분야의 협력을 통해 다자협력을 이루고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만들었듯이,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이 중심이 되어 원자력안전협의체를 만들어나갈 것을 제안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지난 8월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한·중·일 원자력안전협의체’(안전협의체) 구성을 공식 제안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이 안전협의체는 1958년 출범한 EURATOM을 본뜬 이른바 ‘아시아원자력공동체’(ASIATOM)라 불릴 법한 개념이다. 이번 제안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국내외에서 꾸준히 제기돼온, 핵발전소 밀집 지역인 아시아의 안전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그러나 안전협의체의 출범이 단순한 ‘외교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내실 있게 짜이기 위해서는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열린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북한·몽골 참여 가능성까지 열어놨지만

사실 안전협의체는 아주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이날 청와대가 밝힌 내용처럼 그동안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가 유지해온 핵발전 안전 관리와 관련한 논의 기구를 좀더 확대하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1995년까지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에 맞춰 비상통신망 훈련 등을 해왔다. 2008년부터는 한·중·일의 핵발전 규제기관 실무자가 참여해 핵 관련 현안을 협의하는 ‘최고규제자회의’(TRM·Top Regulator Meeting)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TRM은 그동안 6차례의 회의만 열었을 뿐 별다른 논의의 진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한·중·일의 핵발전 관련 정보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는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10월에는 세 나라가 핵발전 사고 정보를 공유하는 ‘원자력 사건정보교환체계’(IEF)를 구축하는 데 합의하기도 했다. IEF의 주요 내용은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날 경우, 24시간 이내에 다른 2개국에 전화·전자우편을 통해 통보한다”는 것이다.

“단계적 탈핵·에너지 전환 위한 협력 시작해야”

광복절에 내놓은 정부의 안전협의체 구상은 한·중·일뿐만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몽골의 참여 가능성까지 열어놨다는 점에서 새롭다. 정부는 9월 일본에서 열릴 예정인 제7차 TRM 회의 과정에서 ‘동북아 원자력 안전 심포지엄’을 열고, 그 결과에 맞춰 2차 심포지엄은 미국·러시아 등을 포함해 11월 서울에서 열어 협의체를 발전시켜나갈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각 정부의 참가자들을 고위급으로 격상시키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안전협의체를 기존 TRM을 확대했다는 뜻에서 ‘TRM+’라는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안전협의체의 성공을 위해서는 여러 나라의 참여를 강조하기보다는, 실질적인 핵발전 안전을 강화할 수 있는 내실 다지기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초 북핵 위기가 일어났을 때 외교적 차원에서 접근한 안전협의체의 추진이 실패한 사례를 보면 그렇다. 이후 우리 정부는 1992년 ‘동북아원자력안전공동협의체’를 제안한 바 있다. 이듬해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에 참석해 “북한 핵 문제의 조기 해결과 동북아 지역에서의 원자력 안전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한국·일본·중국이 참여하는 ‘동북아원자력안전공동협의체’를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연설도 했다. 안전협의체 구성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안전협의체가 성과를 내려면 한·중·일 등에서 핵발전 사고가 벌어질 때 어떤 조치와 배상 체계를 꾸릴지 등 구체적인 논의가 가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의 공동대표인 김영희 변호사는 “현실적으로 안전협의체는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에 존재하는 한·중·일의 핵발전 관련 협력 기구가 일본 방사능 문제 등에서 제대로 구실을 못하면서 실효성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특히 군사시설까지 포함하고 있는 중국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아시아 지역 국가들 사이에 핵발전 사고와 관련한 구체적인 보상 조약 등이 없는 것에 대해 김 변호사는 “안전 문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중·일의 탈핵 전문가가 포함된 안전협의체가 만들어져야 한다. 다양한 우려를 담지 못하는 형식적인 안전협의체는 결국 핵마피아들의 자리를 더 만들어주는 구색 맞추기에 그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안전협의체를 제안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TRM을 주도하고 핵발전 안전 업무를 맡고 있는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주도적으로 이끌지 않은 점을 보면 그렇다.

안전협의체 제안에 앞서 국내 핵발전 안전부터 힘쓰는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원자력 안전 문제가 지역 주민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언급한 박 대통령이, 현재 수명 연장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고리·월성 1호기 등 노후 핵발전소의 안전·방재 문제부터 진지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다울 그린피스 선임캠페이너는 “박 대통령이 사례로 든 EURATOM은 명백히 핵발전 진흥을 위한 협력체다. 유럽 핵발전의 안전성 강화에 실질적으로 해온 역할이 없는 EURATOM을 벤치마킹해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건가. 핵발전의 안전성 강화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유럽이 과거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단계적 탈핵 노력을 시작했듯, 동북아 역시 후쿠시마를 교훈 삼아 지역의 단계적 탈핵 및 에너지 전환을 위한 협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전 보유 11개국 중 밀집도 1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난 8월 초 장하나 의원(새정치민주연합)에게 제출한 ‘원전밀집도 국제비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국토면적 1km2당 원전밀집도가 0.2077기로 원전 10기 이상을 보유한 11개국 가운데 밀집도 1위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그 뒤를 일본(0.1121기)이 이었고, 중국(0. 0017기)은 하위권이었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급격한 핵발전소 추진국이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이 내민 안전협의체 카드는 최근 몇 년간 아시아의 시민사회가 꾸준히 제기해온 핵발전소의 안전과 방사성물질에 대한 정보 공개 등의 내용을 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과연 그가 꿈꾸는 아시아톰 안에는 이런 우려가 담겨 있을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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