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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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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지하실에 햇살을

2000년 이전 건설된 아파트의 지하실 서울에만 580여 개,

‘잊혀진 공간’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 어떤가
등록 2014-08-27 16:44 수정 2020-05-03 04:27
2000년대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의 지하실은 대부분 창고로 쓰거나 그냥 방치해둔 실정이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 도봉구 방학동 극동아파트 ‘햇살문화원’은 지하공간을 주민 커뮤니티 시설로 활용했다(위). 똑같은 구조지만 방치된 지하실(아래)과 대조된다.

2000년대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의 지하실은 대부분 창고로 쓰거나 그냥 방치해둔 실정이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 도봉구 방학동 극동아파트 ‘햇살문화원’은 지하공간을 주민 커뮤니티 시설로 활용했다(위). 똑같은 구조지만 방치된 지하실(아래)과 대조된다.

“요가교실이오? 시행착오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주민들의 참여와 만족도가 높아서 지난해보다 더 잘 운영되고 있어요.”

서울 도봉구 방학동 극동아파트 관리실은 ‘햇살문화원’을 이렇게 소개했다. 지난해 9월13일 이 아파트단지에 문을 연 햇살문화원은 버려진 물건을 재활용해 공예품을 만드는 ‘민들레공방’, 입주민들의 재능기부로 주민들의 다이어트와 건강관리를 돕는 ‘요가교실’ 등의 문화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햇살문화원은 번듯한 상가건물에 있는 공간이 아니다. 허름했던 70평 남짓의 아파트 지하실을 개조해 세운 주민커뮤니티 시설이다. 지하실에 ‘햇살’이 스며든 것이다.

고양이 사는 지하실 막았던 현대아파트

극동아파트와 달리, 대부분 아파트의 지하실은 음산한 분위기다.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이 공간은 천장에 하수관과 난방배관이 얽혀 있고, 바닥에는 폐품이나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때론 길고양이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길고양이의 출입을 막기 위해 이뤄진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74동 지하실 폐쇄’는 버려진 고양이 문제뿐 아니라 버려진 공간에도 주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아파트 지하공간은 왜 생겼을까? ‘주택건설 기준에 관한 규정’이 1999년에 개정되기 전까지 아파트 지하공간은 전시 지하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했다. 2000년대 들어 남북의 정치적 긴장이 완화돼 지하공간이 전시 대피소로만 사용될 필요성이 줄어든데다, 방치되는 공간의 실용성을 고려해 2000년 이후 지어진 아파트의 지하실은 체육시설·회의실 등으로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 이전에 지어진 서울의 581개 아파트단지의 지하실 공간은 대부분 방치돼 있고, 범죄의 공간으로 악용될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서울시립대 ‘창조도시기획 및 재생전략 연구실-Urban Transformer’의 김정빈 교수(서울시립대 도시공학)는 제자인 13학번 강지홍(19)·권혁권(21)씨, 대학원 14학번 김은택(25) 연구원과 함께 아파트 지하실 등을 되살리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버려진 도시의 공간을 다시 살리기 위해 김 교수가 진행하는 ‘Forgotten Space’(잊혀진 공간) 프로젝트 중 하나다.

아이디어는 권혁권씨가 사는 경기도 광명 쌍마한신아파트의 지하공간에서 솟아났다. 아파트가 7호선 철산역 바로 앞에 있어 잠재 수요가 풍부한 상업성 있는 공간인데도 버려져 있는 것이 아쉬웠다고 한다. 권혁권씨는 강지홍씨와 함께 아파트 지하공간 활용에 관한 아이디어를 김 교수에게 제안했고, 김 교수팀은 지하실 재생을 포함해 도시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방향으로 연구를 발전시켜나갔다.

연구팀은 주민들이 직접 버려진 공간에 대한 설계부터 관리까지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단순히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을 넘어 수익을 올리는 공간으로 재활용하는 단계까지 바라본다. 예를 들어 입주자대표회 같은 이용 주체와 건축가 등 여러 주체가 모여 조직체를 구성한 뒤, 주민들의 동의를 얻으면 지하공간 임대 희망자를 모집해 공사를 시작한다. 완성된 공간은 DIY(Do It Yourself) 공간 임대, 청년(2030세대) 창업자를 위한 임대시설로 활용하거나, 주민들을 위한 아파트 주민사업·주민운영체험장·주민커뮤니티 시설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민제안사업’ 등으로 지원금 얻어낼 수도

연구팀은 공사에 들어가는 사업비용을 충당하는 안을 여러 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공공지원 활용이다. 가령 아파트 지하실을 되살려 이 공간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뒤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마을공동체를 위한 주민제안사업’이나, 지역공동체 활성화 지원법에 근거한 우수마을 기업 사업에 제출해 지원금을 얻어내는 것이다. 연구팀은 버려진 공간의 재생을 위한 공동지원이 지금보다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12월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돼 전국에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설치해 마을기업 창업 및 운영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지만 아직 특별법이 초기 단계라 실효성 있게 운용되고 있지 않다.

연구팀은 지하실을 개조해 DIY 공간 등에 대한 임대 신청을 받을 때 1년 이상 기간의 임대료 선불 완납을 유도해 지하실 개조를 위한 초기 사업비용으로 충당하는 안도 제시하고 있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사업자가 완성해서 임대하는 게 아니라, 골조만 완성해 임대하면 임차인이 직접 입맛에 맞게 인테리어를 하는 방법이다. 사업자는 인테리어 공사비를 아끼고 임차인은 직접 인테리어를 하는 대신 임대료 일부를 차감받을 수 있다.

김 교수는 도시공간 활용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바뀔 것이라 예측한다. “재건축 같은 대형 사업은 한계에 도달했다. 소외된 공간을 이용자 수요에 맞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 대형 사업을 통할 때처럼 큰 이윤이 나지는 않지만 버려진 공간을 활용하면 생활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자투리 공간이 10년 뒤 도시 모습을 결정한다

김 교수는 앞으로 방치된 지하공간이 많은 서울 노원구의 아파트 주민부녀회를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하고 아이디어를 제안할 계획이다. 지하공간 외에도 활용할 공간은 수없이 많다. 연구팀은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의 버려진 공간을 젊은 디자이너들의 공간으로 만드는 방안, 서울 강북구 삼양동사거리에 생긴 자투리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 등도 연구하고 있다. 김 교수는 “유럽의 사례를 통해 한국에서도 도시공간 재생이 필요하고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제안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밝혔다. 지금의 한 걸음이 도시 활용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서울 등 도시의 10년 뒤 모습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 장슬기 인턴기자 kingka8789@hanmail.net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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