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에 사는 치과의사 배용환(32)씨는 일요일인 지난 7월20일 아침 8시40분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직장인 아내도 함께다. 일요일 낮 결혼식을 올리는 센스 없는 친구 탓은 아니다. 황금 주말에 맞벌이 부부가 향한 곳은 서울 대학로에 있는 ‘벙커1’의 지하 강당. 의 팬이라면 김어준 등을 떠올릴 공간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난해한’ 한국어를 쏟아낸다. “전반부인 1920년대까지의 핵심은 측정이 대상을 교란시킨다는 것이죠.” 물리학자라는 그 남자의 말을 당신과 나의 언어로 번역해보자면 이쯤 될 듯싶다. “(감히) 양자역학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font size="3">‘먹고사니즘’, 이게 다가 아니야</font>이날 ‘벙커1’에서는 김상욱 부산대 교수(물리교육)와 필진인 파토(본명 원종우·44)가 진행하는 과학 토크쇼 ‘좀더 찔러보는 양자역학’이 한창이었다. 배씨를 ‘과학 덕후’라고 짐작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일요일 오후 2시 양자역학 강연을 들으러 온 200여 명 중 평범한 1인일 뿐이다. 여기엔 날렵한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도 여럿 눈에 띈다. 연령·성별·취향도 다양한 이들은 새로운 쾌락을 탐닉했다.
어른들을 위한 ‘과학’이 찾아오고 있다. 소풍이나 체험학습으로 과학관을 찾았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과학 토크쇼, 과학 팟캐스트, 과학책 읽기모임 등으로 속속 귀환하고 있다. 성인과학은 초등과학 학습만화보다 더 어렵지만, 덕분에 녹슨 뇌신경 세포 속 욕망의 도파민을 자극한다.
청중은 양자역학 강의가 ‘재밌다’며 양자역학보다 더 난해한 반응을 내놓는다. 어려운 과학이론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배씨는 “원래 실생활에 도움 안 되는 게 더 재밌다”고 답한다. 그는 운전 중에는 과학 팟캐스트 를 듣는다. 이 팟캐스트의 진행자 파토도 ‘먹고사니즘과 관계없음’을 인기 비결로 꼽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라고 배우잖아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거기에만 몰두하게 되죠. 그런데 과학에는 ‘이게(생존이) 다가 아니다’라는 감동이 있어요.”
이렇게 ‘어른을 위한 과학’의 중심에는 팟캐스트 가 있다. ‘옆집 할머니도 알아듣는 과학’이라는 모토로 지난해 5월 시작한 이 방송은 애플 아이튠즈 팟캐스트 전체 순위에서 3위까지 올랐다. 과학 콘텐츠로는 이례적이다. 1년째 방송에 출연하고 있는 익명의 천문학자 K박사는 좌뇌의 즐거움을 말한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감성적 쾌감을 얻을 만한 데는 많은 것 같아요. 과학을 통해 지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이제 아는 거죠.” 그래서인지 이 방송, 결코 말랑말랑하지만은 않다. 필요할 땐 제대로 하드코어다. 지난 3월 방송된 ‘우주, 1주일 새 무한대배로 커지다’의 주제는 ‘인플레이션 이론’(빅뱅 직후 소수점 단위의 몇 초 사이에 우주가 급격히 팽창했다는 이론)이었다. 올 3월에야 증거가 발견된 천문학 이론에 겁도 없이 덤벼본 것이다.
천문학 책을 쓰고 공개 강연도 하지만 익명을 고집하는 K박사는 아직 자신이 베일에 싸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려운 과학 이론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의 시크한 발언은 안드로메다쯤 떨어져 있는 줄 알았던 과학자들도 같은 지구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아주 유명하신 천문학계 원로 한 분이 강의하면서 하신 말씀이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해서는 다 아는 척하는 거다. 지가 알면 뭘 알겠느냐’라는 거예요.”
<font size="3">세월호 이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font>이렇게 “어려운 건 어렵다”고 말하는 쿨한 과학자 앞에서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한 거지’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덕분에 이 팟캐스트의 팬들 중에는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많다. 영화과에 다니는 대학원생 박영민(33)씨도 그렇다. “어렸을 때 과학자가 되고 싶어서 뉴턴 같은 책도 읽었어요. 그런데 수학을 중3 때부터 포기한 거 같아요.” 전형적인 과학을 사랑한 ‘수포자’ 스토리다. 팟캐스트가 새 열망을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일반인들이 오래 품었으나 잊고 지냈던 과학에 대한 로망을 톡 하고 건드려준 셈이다. 어린 시절 로봇공학자를 꿈꿨던 키덜트들이 프라모델을 조립한다면 천문학자를 꿈꾸었던 키덜트는 방송을 듣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내보낸 특별편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는 가장 큰 호응을 받았던 에피소드다.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가 별이 폭발한 초신성에서 왔다’는 내용을 담은 팟캐스트에 청취자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차가운 이성으로 뜨거운 좌절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잖아요. 과학에서 전해드리려는 것은 이렇게 위대한 세상과 거대한 우주가 있다는 거죠. 설사 천국에 못 가도 괜찮아, 이 멋진 세계의 일부로 살아가는 거야, 하는 거죠.” 이렇게 파토는 종교도, 인문학이나 철학도, 힐링 열풍도 고민에 답하지 못한 상황에서 과학만이 가진 힘이 있다고 여긴다. 과학은 한껏 분칠한 미사여구가 아닌 실재하는 현상으로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물음의 실마리를 과학에서 찾은 ‘비과학자’도 있다. 페이스북에서 ‘과학책 읽는 보통 사람들’을 운영하는 이형열(53·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씨는 사회에 대한 오랜 고민을 해결해줄 단서를 과학에서 찾았다. “저는 19세기 이성주의·합리주의에 기초해서 인간에 대해 인식했었거든요. 좋은 교육과 제도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현실에서 비합리적 요소를 깨닫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간을 과학의 눈으로 보니까 비로소 이해가 쉬워지더군요.” 인류가 출연한 500만~600만 년 전까지로 시계를 넓힌 과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비합리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길어야 2500년 역사를 지닌 동서양 철학의 틀로는 인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고 본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US의 대표를 지낸 이씨는 모임을 통해 그런 시각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런 취지로 지난 2월 만든 ‘과학책 읽는 보통 사람들’ 회원 수는 1530명에 달한다. 회원들은 매달 새로운 과학책을 읽고 페이스북 페이지에 인상 깊은 구절을 올리거나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이씨는 말한다. “장기적으로 과학은 우리(인류) 문제를 풀어나가는 보편적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font size="3">연인의 뇌 속에선 무슨 일이</font>‘어른을 위한 과학’은 쿨하다. 가끔은 봄밤에 달뜬 연인들을 위한 로맨틱 코미디가 되기를 꿈꾼다. 지난 4월18~19일 경기도 과천시 국립과천과학관에서는 19금 사이언스 버라이어티쇼 ‘당신이 사랑할 때’가 무대에 올랐다. 이날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은 연인 한 쌍을 무대로 불러내 사랑에 빠질 때 취하는 다양한 포즈를 주문했다. 과학으로 사랑을 해부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남자친구와 함께 온 이승아(24)씨는 “진짜 재밌었다”고 흥분하면서도 “딱히 과학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파토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저는 이 팟캐스트가 시트콤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만드는 사람들이)가 즐겁자고 시작한 거예요.” 이제 과학의 달 4월이면 포스터 그리기와 표어 짓기에 시달렸던 악몽은 잊어도 좋다. 그저 토익 점수와 주택담보대출로 무거운 좌뇌를 잠시만 비워두자. 그리고 당신과 나를 위한 쿨한 과학을 즐기자.
글·사진 김연희 인턴기자 kyhbb72@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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