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사회학 강사인지라, 세상 문제를 따지는 것이 일상이다. 주장에는 다양한 반론이 있기 마련인데, 가끔은 터무니없는 논리를 만나기도 한다. “예전에는 안 그랬느냐”면서 면박을 주는 사람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내가 양극화를 언급하면서 불평등이 심각해짐을 말하면 “자본주의국가 중에 불평등이 없는 곳이 있느냐”고 하고, 급증한 자살률 수치를 언급하면서 경쟁의 이면을 직시하고자 하면 “경쟁이 있는 곳에는 늘 자살이 존재하기 마련”이라 한다. 어찌 이렇게 ‘달라진’ 사회적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을까. 아마 ‘오십보백보’라는 입장일 듯한데, 명백히 틀린 논리다. 왜냐하면 오십보백보는 별 차이 없이 다 마찬가지가 아니라, 엄연히 두 배 차이이기 때문이다.
<font size="3">‘이기적 인간’ 자본주의 성공의 조건 </font>애덤 스미스가 에서 “식탁에 음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과 양조장 주인의 자비심이 아닌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의 속성을 언급한 것이 1776년이니, ‘이기적 인간’이 되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조건일지 모른다. 하지만 ‘늘’ 그랬겠지만 최근엔 너무 노골적으로 요구된다. 이젠 사회가 공식적으로 강요한다.
대학생들의 취업 준비 과정을 한번 볼까. 젊은이들은 돈을 내면서 ‘압박면접을 이겨내는 법’을 배운다. 취업 컨설턴트들은 “압박면접은 구직자가 어떤 불가능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면서, 머릿속에 각인해놓아야 하는 말을 외치게 한다. “나는 지금부터!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 그래도 입 밖으로 쉽게는 말하지 않았던 ‘각자도생’이 이제는 공식 슬로건이 된 세상이다. 취업을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들어온 양보의 미덕을 포기하길 강요받는다. 양보의 포기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공감이 풍부했던 시기가 한국 사회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제와 군부독재가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둔 ‘성과 위주’의 산업화(근대화)를 저돌적으로 추진할 때부터 이미 사회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가시적 성장’이라는 당근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가 냉정한 건 알겠지만, 과거와는 달라진 물질적 풍요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성장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 전체가 저성장일 수도 있고 특정 세대가 성장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사회안전망 구축에 무심했던 성장의 패러다임은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어찌 보면 인간 본성이라 할 수 있는 공감에 관한 촉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자살률이 1990년만 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16.2명(10만 명 기준)의 절반 남짓한 8.8명이었는데 2010년에는 OECD 평균 13.3명의 2.5배 수준인 33.5명이 됐다. 2013년 기준으로 10년째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 변화는 단지 경제적 요인 때문만이 아니다. 누가 경제적으로 나락에 빠진다 하더라도,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공감’이 묻어 있다면 당사자가 느끼는 비참함의 ‘체감’은 낮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런 것에 관심이나 두었던가?
<font size="3">달라진 시대에 등장한 달라진 차별의 모습</font>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런 추세는 가속화된다. ‘일을 해도’ 가난할 수 있는 근로빈곤층이 등장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개인의 불행에 대한 책임이 사회에도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로는 시야를 돌리지 않았다. 일단 ‘나’ 먼저, ‘나’부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젊은 세대에게 물 흐르듯이 침투되었다. 그 결과 100명 중 90명이 정규직으로 들어가던 시대가 30명, 20명만이 통과하는 바늘구멍이 되었지만, 이들은 ‘스스로’가 그 행운을 누릴 것이라 착각한다. 아무도 사회구조의 문제를 따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어떤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만 국한시킬 때, ‘공감의 촉수’는 사라진다. 우스갯소리로 요즈음의 ‘연대’는 서울 신촌의 그 ‘연대’만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연대’에 관한 학내 언론의 기사 하나가 꽤나 시끄러웠던 일주일이었다.
이 논쟁은 사회적으로 전혀 생산적이지 못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역시 연대 녀석들 공부만 할 줄 알았지’라는 일반 네티즌의 냉소였고, 둘째는 그 냉소에 대한 반응으로 “연세대 신촌캠퍼스가 원주캠퍼스를 ‘그렇게’ 대우할 리 없다. 기사는 일부의 사례를 가지고 와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쟁은 연세대와는 애초에 상관없는 것이었다. 달라진 시대에 등장하는 달라진 차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딱 그것뿐이었고 공교롭게도 기자의 시야에 연세대의 ‘어떤 사례’가 적합하게 걸린 것뿐이었다. 이 밑밥에 ‘나는 과연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사회구조와 ‘자신’의 관계를 대입해보는 것이 당연히 생산적인 논의일 게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왜? 그런 능력은 취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지금의 시대는 특정한 현상을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직시하는 촉수가 거세돼 있다.
첫 번째 반응, 그러니까 ‘연세’만 죽어라고 씹어버린 대학생들은 그 기사에서 ‘우리 학교도 비슷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야 함이 마땅하다. 시대의 물줄기가 연세대에만 압박을 가했을 리는 천부당만부당 아니겠는가. 서울대 정시합격생들이 기회균등·지역균등으로 선발된 수시합격생들을 기회충·지역충이라고 ‘아주 일부가’ 비하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서울대만의 에피소드가 결코 아니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일부’지만 ‘늘’ 발견된다. 나는 에서 이런 사례를 여럿 수집했는데, 책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서강대 학생의 한탄을 간단히 말할까 한다.
<font size="3">‘그들만의 상황’이 아니다</font>요즈음은 대학 신입생이 동아리에서 선배를 처음 만나서 하는 대화가 과거처럼 “학과가(전공이) 뭐야?”에 그치지 않는다. “정시로 들어왔어? 수시로 들어왔어?” 그리고 “어떤 수시로 들어왔어?”까지 동반된다. 그 학생이 ‘가톨릭전형’임을 밝혔을 때, 선배는 “가톨릭? 오? 그거 거룩하고 성스럽네. 그런데 뭐 기도 열심히 하면 들어오는 거야?”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이런 ‘일부의 상황’은 연세대의 상황이 ‘그들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즉, 마찬가지의 이유로 다른 결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굳이 이렇게 넓히지 않는 것은, 괜히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어떤 결핍이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보단 일단 경쟁 상대의 결격사유를 확보하는 것이 ‘양보하지 않는 걸’ 강요받는 이들에게는 훨씬 합당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반응에서 나타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주장하는 이들은 정말 성급해 보인다. 일반화는 특정 성향을 가지는 비율이 전체 표본에서 ‘압도적으로 클 때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비율이 ‘아주 일부라 할지라도’ 시간의 축을 놓고 어떤 유의미한 증가(혹은 감소)의 그래프가 그려진다면 “이런 변화에는 어떤 사회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라는 연관된 설명이 동반될 수 있다. 학력주의에 근거한 차별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과시’에서 ‘멸시’의 형태로 변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태초부터 ‘스카이’는 있어왔지만 ‘지잡대’가 신조어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즉, 수면 밑에 있었던 논리가 일상 안에 ‘일부’ 침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일부’라는 단어에만 매몰돼 해석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너무나도 심각하다는 한국의 자살률 33.5명은 10만 명당 기준이다. 이는 100명당 0.03%에 불과한 수치다. 99.7%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냉정하게 말해 자살은 아주 ‘일부’의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미세한 수치의 조용한 상승곡선을 ‘오십보백보는 두 배 차이’라는 지점에서 이해하고 그 차이를 야기한 사회적 이유를 찾는 것, 그게 우리의 일상적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연세대 학생들은 지금 그렇게 한가할(?) 때가 아니다. 이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그나마 ‘연세’라는 이름으로 확보할 수 있는 ‘명문’이라는 이미지가 타격을 입는 건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연세대 학생들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다”라는 황당한 반응을 쏟아낸다. 아니 연세대 학생들은 날 때부터 인성마저 갖추고 있었단 말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난 비관적이다. 이유는 그 역할을 해야 할 ‘대학’이 완전히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쪽으로 ‘환골탈태’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야 언제나 거침없었다지만 그나마 대학이 그 속도를 제어하는 역할을 한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이 자본을 숭상하는 기업의 논리에 완전히 예속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금의 대학은 작금의 사회적 문제를 성찰할 의지가 전혀 없다. 오직 취업을 위해서 진격 중이다. 컴퍼니가 돼버린 캠퍼스의 풍경은 처참하다. ‘진로와 적성’ 강의는 대기업별 성향을 소개하고, ‘글쓰기’ 강의는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 작성 요령을, ‘토론의 실제’ 강의는 면접 대비 연습을 가르친다. ‘CEO 특강’으로 한 학기 수업이 진행되는 과목은 이제 낯선 것도 아니다. 이제 대학의 목적이 학생들을 ‘잘 훈련된 회사원’으로 키우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만을 생각하라’는 이 시대의 성공 매뉴얼은 대학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강조된다.
<font size="3">비판의 협소함, 이견에 대한 예민함</font>이 공간에서 ‘공감’ 운운하는 ‘비판적 사고력’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효율성을 유일한 잣대로 삼은 대학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는 낭비에 불과하다. ‘그럴수록’ 좋은 대학이란 인증을 받는다. 민주주의적 시민의식은 대학평가 기준에 포함돼 있지 않다. 대신 취업률은 만고진리가 되었다. 그 취업률 때문에 구조조정의 철퇴를 맞는 학과들이 바로 ‘인간의 공감 능력’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학과들이다. 공감 능력의 부재로 나타나는 여러 사회적 특징들을 심각하게 짚어내고, 그것을 공공의 영역에서 활성화할 능력이 있고, 그래서 책임을 져야 하는 학문이 씨가 마르고 있다는 것이다. 씨가 마르면 당연한 주장이 무척이나 낯설어진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으면 불평불만이 가득한 ‘투덜이’로 찍히고 자본주의의 결과를 인간성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논하면 ‘몽상가’의 타이틀을 얻기 십상이다. 그런 구조 속에서 ‘좋은 게 좋은 거다’와 같은 말만 넘쳐나고, 이는 ‘나쁜 건 나쁜 거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은폐해버린다.
이런 비판의 협소함은 이견에 대한 예민함을 높인다. 그런 구조 속에서 한 학교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무서워진’ 논리를 짚어보자던 기사의 취지는 완전히 삼천포로 빠져 논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논쟁은 또 반복될 것이다.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저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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