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할배들은 처절하게 싸웠다. 765kV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를 위해 ‘한전놈들’의 포클레인 바가지에 들어가기도 했고, 쇠사슬 묶고 길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공사를 못하게 지키느라 잠 한숨 제대로 못 잔 날이 숱하다. 길게는 9년, 본격적으로는 공사 강행 시작 전인 2011년부터였다. 그렇지만 아침에 일어나 들창을 열면 숫자 이름 붙은 송전탑이 자라는 모습이 매일 할매·할배의 눈앞에 펼쳐졌다. 나지막하게 밀양을 품은 산자락마다 턱하니 꽂힌 송전탑은 하루하루 목구멍을 죄어오는 느낌이다. 지난 6월11일, 마지막 남은 움막이며 농성장까지 모두 철거한 ‘패배’의 행정대집행 이후 억울함은 더 커졌다. “억울하지” “깝깝하다” “우리가 틀릿나, 우리가 머 잘몬했노”. 할매·할배들의 반문과 한탄은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방방곡곡서 모인 60여 명, 붓들고 투쟁!그런 할매·할배들이 다시 마음을 동여맸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라는 현수막을 마을마다 걸었다. 짓밟힌 움막보다 더 튼튼한 컨테이너를 송전탑이 지나는 4개 면 6개 마을에 하나씩 갖다놨다. 2개 마을엔 기존에 쓰던 마을 건물에 벤치도 놓고 칠도 해서 단장했다. 7월4~6일,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바다 건너에서 할매·할배들의 ‘재부팅’을 응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구대 회화과 학생 6명, 홍익대 미술대학 학생 20여 명, 8살·10살 아이를 데리고 경남 함양에서 온 엄마, 그 엄마의 서울 사는 친구, 20대 중반 커플, 경기도 과천에서 같이 교회 다니는 6명을 비롯해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인천 공동체 기찻길옆작은학교 회원, 판화가 이윤엽, 미술가 전진경, 사진가 정택용·정운·장영식, 대만에서 원전 반대 운동을 하던 대학교수와 학생 등 60여 명이 할매·할배의 새 출발 터전이 될 회색빛 컨테이너에 알록달록 색을 입히러 왔다. ‘붓들고 투쟁’이다.
7월4일 오후 1시, 경남 밀양시 단장면 동화전마을. 농부 김정회(41)씨가 ‘지이이잉’ 굴착기 소리와 함께 등장했다. 트럭에 올려진 굴착기가 커다란 삽을 지렛대 삼아 트럭에서 내려와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은 ‘도시에서 온 손님’들에게 묘기였다. “오, 영화 보는 것 같아.” 감탄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김정회씨는 동화전마을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장이다. 전체 120가구 가운데 여전히 송전탑 건설과 관련해 보상금을 받지 않고 반대하는 가구는 19가구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나눠 하던 많은 일들이 김 위원장의 몫이 됐다. 이날 김 위원장은 미리 만들어둔 사랑방 옆에 화장실을 짓기 위해 굴착기 묘기를 펼쳤다. 흙을 파고 직사각형의 건물 하나를 덮으니 화장실이 뚝딱 완성됐다. 옆에 무성하던 밤나무 가지를 쳐내서 진입로도 훤해졌다.
김 위원장이 화장실을 만드는 동안 판화가 이윤엽, 현장미술가 신유아, 조주헌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등은 민무늬 컨테이너 외벽에 그림을 채웠다. 마을 주민들은 “대추나무나 밤나무 그려주이소”라고 했다. 동화전마을 곳곳엔 대추나무와 밤나무가 무성하다. 동화전마을에는 이미 지난해 10월 95·96·97번 3개의 송전탑이 들어섰다. 송전탑 공사 소리 때문에 마음의 병까지 얻은 주민 권귀영씨는 그림일꾼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면서 “우리 록키(강아지) 집도 좀 칠해주이소” 하며 애교 섞인 웃음을 띠었다. ‘록키’는 권귀영씨와 함께 송전탑 반대 데모마다 따라다닌 ‘데모꾼’이니 자격이 있다는 얘기도 보탰다. 마을 주민들과 도시 연대자가 이야기를 나누며 ‘붓들고 투쟁’ 작업은 진행됐다. 이날 동화전마을에는 그림일꾼들 외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가 제자 여남은 명과 함께 마을에 왔다. “밀양에 놀러” 왔다는 조한 교수와 제자들은 ‘록키네’에서 숙식하며 파농사를 돕고, 권씨가 연대자들에게 대접하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돕는 등 ‘살림’을 살았다. 일찌감치 송전탑이 들어선 동화전마을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이웃마을 송전탑을 막기 위해 바지런히 뛰어다녔다. 동화전에선 일찌감치 도시민들로부터 출자를 받아 농사를 짓는 ‘한평 프로젝트’ 실험을 하는 등 ‘송전탑 이후’를 고민해왔다. 조한 교수는 “이제 밀양은 즐거워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 투쟁이 부담이 되면 안 되고, 함께 즐겁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한 교수는 동료 연구자, 지인, 제자들과 함께 밀양에서 탈핵·탈원전·다른 삶을 일구는 생명평화마을을 만드는 데 손을 보탤 생각이다.
“저 송전탑 진짜 다 뽑아삘 끼다”같은 시간, 상동면 고답마을에서는 대구대 회화과 학생 6명과 기찻길옆작은학교 공동체원 4명이 컨테이너에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할매들이 힘을 내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아 ‘할매 마징가Z’가 송전탑을 날려버리는 그림을 그렸다. 밀양 싸움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할매·할배는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흐름에 있는 힘을 다해 제동을 걸고 있는 마징가Z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들어선 송전탑 때문에 힘이 빠져 있을 할매들에게 기운을 북돋겠다는 의미도 있다. 7월4일 오후, 컨테이너 사랑방의 3면 가운데 2면에 마징가 할매와 ‘밀양은 희망이다’ 글과 꽃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 마을 주민 박순숙(58)씨 등이 다가와 말했다. “아따, 이거는 송전탑 있어서 너무 행복한 마을 같은데. 우리 송전탑 때문에 괴롭대이.” 머리를 모은 이들은 옆면에는 쇠사슬을 휘감은 송전탑을 그렸다. 기찻길옆작은학교 회원 심혜원(19)씨는 “어르신들이 다시 오셔서 쇠사슬 송전탑을 보더니 ‘아, 이제 좋다. 우리는 저 송전탑 진짜 다 뽑아삘 끼다’ 말씀하시는데, 어르신들이 여전히 기운을 내고 밝아 보이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밥은 뭇나.” 7월4일 저녁, 상동면 여수마을에 도착한 박조은미(28·홍익대 회화과)씨 일행에게 마을 주민들이 맨 처음 건넨 말이었다. 여수마을 컨테이너에서는 홍익대 학생 8명과 경남 함양에서 8살·10살 아이를 데리고 온 이선영씨와 그의 친구 모녀 등 13명이 7월5일 오전 10시부터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청와대, 한국전력, 국회를 그리고 그 위에 송전탑을 그렸다. 노란 전기장이 초고압 송전탑에서 빠지직 뻗어나간다. 여수마을 주민들은 오며 가며 “국회가 벼락 맞아야지”라며 그림 그리는 이들의 기운을 북돋았다. 함양에서 온 아이들은 옆면에 ‘송전탑 안 돼요’를 까만 페인트로 쓰며 뛰어놀았다. 엄마 이선영씨가 “밀양에 전기선이 지나가서 할머니들이 피해를 본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할아버지는 왜 없어”라며 웃었다. 이들이 밀양에 도착해 작업 내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밥 뭇나” “밥 무야지” “밥 무라” “마이 무라”였다. 박조은미씨는 “서울에서 삼시세끼 제때 챙겨먹기는커녕 인스턴트로 때우는 게 다반사인 친구들이 세끼 밥상을 들깨미역국·고둥국·풋고추·된장 등 자연식으로 든든하게 받으니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이었다. 고향집이 있다면 이런 거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대자들에게 열심히 밥을 챙겨주는 마을 주민들은 한편으로 마음이 문드러진다. 여수마을 송전탑 반대 대책위 총무를 맡고 있는 김영자(58)씨는 ‘한전놈들’ 생각하면 열불이 난다. 그리고 참 무섭다. “돈 그거 참 무서운 겁디다. 돈이 내가 벌어서 요긴하게 쓰면 좋은 물건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한전이 개별적으로 준 돈이 215만3천원인가 글타는 기라. 그게 개별 보상금도 아이고 공사하면서 소음 나고 믄지 나니까 주는 위로금인데, 위로금 받으면서 ‘이후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한전에 없다’는 약관이 붙어 있는 기라. 참, 그 돈 200만원 쥐어주고 책임은 안 질라고 저거는 쏙 빠지고….” ‘송전탑’은 인심 좋은 시골 사람들에게 돈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자라게 했다.
대만·일본서도 오니까 포기할 수 없어부북면 위양마을 주민들은 너른 논 바로 옆에 컨테이너를 세웠다. 다른 마을의 컨테이너 위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다면, 위양마을 컨테이너는 땡볕에 서 있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컨테이너 앞에 플라스틱 상자를 깔아 마당을 만들고 그 위로 검은 그늘막을 덮었다. 위양마을을 꾸밀 사람들은 그늘막을 걷어내고, 그 위를 꾸민 뒤 다시 덮는 작업을 했다. 7월5일 오후부터 작업이 시작돼, 동화전·고답·여수마을에서 작업을 끝낸 사람들이 모두 위양마을로 모여들었다. 이윤엽 판화가와 신유아 현장미술가가 ‘765kV OUT’ ‘우리 다시 시작’ 두 문구를 크게 쓰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넣었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윤나리(30)씨는 비둘기를 그리며 할머니들의 평화를 빌었다. 과천에서 온 전은혜(28)씨는 “이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꽃을 그려넣었다.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일본에서 대만으로 가족이 함께 이민간 마유코(23)는 일본어로 ‘원전 반대’를 적어넣었다. 이들의 작업을 앉아서 지켜보던 손희경(79) 할매는 누군가 “할매, 사람들 여럿이 와서 이래 꾸미니 좋죠” 묻자 “이기야 좋지. 이기야…”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서종범 위양마을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장은 “부산에서 오고, 서울에서 오고, 대만서도 오고 이래 끝도 없이 도와주시려는 분들이 오니까 포기할 수 없는 거라예. 원전 이거 나쁜 거잖아요. 우리가 옳잖아요. 우리는 안 집니더. 끝까지, 저거 다 뽑을 때까지 할 겁니더”라고 말했다. 서종범 위원장은 그렇게 위양마을에 연대하러 오는 각양각색의 시민들에게 집과 먹거리를 제공하며 긴 싸움을 기약하고 있다.
장터·강좌·공연 열릴 컨테이너, 아니 사랑방!밀양에서도 공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평밭마을 컨테이너 단장은 7월6일 오전 완성됐다. 평밭마을 컨테이너 벽면에는 다른 마을과 달리 송전탑 그림이 없다. 할매·할배들의 얼굴이 원색으로 화사하게 그려져 있다. 여든다섯의 나이지만 곱고 활기차신 이사라 할머니, 단단하고 불타는 전의를 갖고 있는 한옥선 할머니, 얼굴에도 마음에도 한 점 구김 없는 이남우 할아버지의 얼굴이 평밭마을에 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작업을 한 이정원(25·홍익대 조소과)씨는 “늘 생활하는 일상이 될 공간이 놀이터 같고 유치원 같은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활기를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밀양의 힘은 바로 이 강인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할매·할배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꾸며진 컨테이너에서는 나눔장터가 열릴 예정이다. 매주 진행해오던 촛불문화제 대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기른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도록 농산품을 진열하고 마을마다 돌아가며 문화 공연, 음식 나눔, 생활용품 나눔 등을 할 수 있는 화합과 친목의 공간이 된다. 이를 위해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와 주민들은 7월7일 ‘미니팜 협동조합-밀양의 친구들’ 창립총회를 열었다. 1만원을 출자하면 조합원이 되고 온라인으로 밀양 주민들이 기른 농산품을 구매할 수 있다. 출자금은 7월10일 현재 400만원이 모였다.
주민들은 이제 컨테이너를 ‘사랑방’이라 부른다. 한전과 합의한 주민들이 많아지면서 마을회관을 쓸 수 없게 된 주민들이 새롭게 만든 공간이다. 사랑방에선 귀농 강좌나 인문학 강좌는 물론 재미있고 따뜻한 공연도 종종 열 예정이다. 패배의 싸움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싸움으로서의 ‘밀양 시즌2’가 이 사랑방에서 시작된다. 밀양에서는 송전탑이 지나는 마을 주민 2200여 가구 가운데 200여 가구가 여전히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싸우고 있다.
밀양=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장슬기 인턴기자 kingka8789@hanmail.net사진 제공 붓들고 투쟁 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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