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C21A8D">[서초동, 그의 죽음]</font> 치솟은 마천루는 월급쟁이들의 꿈이다. 밑바닥에서 맨몸으로 시작한 임금노동자들은 그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려 기꺼이 청춘을 내놓는다. 나이 서른하나에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에 입사한 염호석(35)씨에게도 언젠가 그러한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파란 로고를 가슴에 새기고 ‘삼성맨’으로 성공하길 소망했을 것이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우뚝 솟은 삼성전자 본사가 목숨을 건 싸움의 상대가 될 줄을 4년 전엔 알지 못했을 것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골리앗 상대로 작은 첫 승리 거둔 다윗들</font></font>그 욕망의 바벨탑 아래서, 그의 장례를 치렀다. 세상을 떠난 지 45일 만에 겨우 주검 없는 상을 치렀다. 지난 6월30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1천여 명의 동료들은 경찰이 ‘탈취’해간 그의 주검 대신 신발 두 짝, 환히 웃는 사진, 그가 꿈꿨던 ‘정동진’의 모래를 올려두고 염씨를 추모했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양산센터분회장이던 염씨는 지난 5월17일 낮 강원도 강릉의 한 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런 유서를 남겼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마천루의 유리벽이 화려하게 반짝일수록, 뒤편에 드리울 그림자가 길고 짙은 것을 아는 사람만 안다. 그 그림자를 걷어내려 전국의 40여 개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이 1년 전의 일이다. 염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결국 살아서 이 높은 유리벽을 넘지 못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76년 역사에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붙일 자리는 없었다. 대신 죽음으로 염씨는 이 완고한 유리벽에 균열을 냈다. 유언은 그가 숨진 지 40여 일 만에 실현됐다. 6월28일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염씨의 죽음에 대한 대책 마련과 센터별 단체협약 기준이 되는 ‘기준 단체협약’ 체결 등을 두고 협력사들과 협상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주십시오. 저희가 승리하는 그날 화장하여 이곳(정동진)에 뿌려주세요.” 마지막 당부대로 동료들은 승리한 그날 염씨의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가 싸웠던 삼성전자 본사 앞, 마지막 쉴 곳으로 정한 정동진, 그의 삶터였던 양산을 차례로 찾았다. 상여 행렬은 삼성전자 본사 앞 거리를 빼곡히 메웠다. 염씨가 숨진 직후부터 40여 일 동안 파업과 노숙농성을 이어온 850여 명의 조합원들과 100여 명의 연대단체 회원들이다.
도심에서 더위와 불편, 외로움을 견디던 노숙농성이지만 이탈자는 없었다. 모인 이들은 모두 염씨에게 빚을 지고 있노라고 했다. 양산분회에서 그와 친형제처럼 지냈던 염태원(39) 조합원은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싸움은 ‘호석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호석이가 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가 기억납니다. ‘형, 호석이에요. 고맙단 말조차 하지 못하고 갑니다. 우리 지회는 꼭 승리할 겁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권영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이제 그를 보러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꼭 이겨서 당신을 보러 가자고 성화였던 동지들입니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누구의 아픔도, 누구의 고통받는 모습도 보기 힘들다던 당신을 이제 보러 갈 면목이 생겼습니다.”
협력사의 노조원들이 본사 문지방을 넘는 것만은 끝내 두려웠던 것일까. 삼성전자 본사 입구마다 경찰이 막아서고 있었다. 폴리스라인은 조합원들을 둘러쌌다. 장례식장에 들어가 고인의 주검을 빼앗았던 경찰이, 고인을 추모하는 행렬에 선을 긋고 “이 선을 넘지 말라”고 했다. 조시를 읽기 위해 무대로 나오던 송경동 시인이 폴리스라인을 냅다 발로 차 넘어뜨렸다. 경찰이 그를 제압하려다 이내 물러섰다. 폴리스라인을 모두 자빠뜨리며 무대에 오른 시인은 울분을 토했다. “저는 폴리스라인 속에선 이 추모시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져올 것은 추모시가 아니라 이 분노였을 겁니다.”
그 단단한 마천루를 향해 1천여 명의 노동자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삼성전자는 들으라. 더 이상 노동자를 착취하지 말라. 노동자를 사람답게 대접하라.” 누구도 이기지 못한 골리앗을 상대로 작은 첫 승리를 거둔 다윗들의 목소리가 빌딩을 때렸다.
<font color="#006699"><font size="3">760년 걸려도 무노조로 돌아갈 순 없을 것</font></font><font color="#C21A8D">[양산, 그의 싸움]</font> 4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45일 만에 돌아왔다.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다.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의 지상 주차장에서 밤을 지새우는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조합원들의 표정에도 설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염씨의 하관식을 하루 앞둔 6월30일 자정, 조합원들은 주전부리도 없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강술을 마셨다. 승리의 건배이자, 죽은 벗을 기리는 음복이다. 일찌감치 돗자리에 누운 이들도 염씨가 생전에 일했던 양산센터 앞에서 노숙을 하자니 잠이 곧 쏟아질 리 없다. 광안센터분회의 박정애(45)씨도 꼬리를 무는 상념에 잠들 수 없었다.
‘호석이’는 각별한 동생이었다. 올해 1월1일엔 몇몇 조합원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해돋이를 보기로 약속도 했다. 피곤 때문에 이른 아침 “누나, 해돋이 보자”던 염씨의 응석을 받아주지 못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마지막 가는 길이나마 근사하게 보내주고 싶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도 없이”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프다. 먼 길 버스를 타고 오면서 박씨는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자꾸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서 출발해도 (정동진까지) 이렇게 먼 길인데 양산서 출발했다면 얼마나 더 먼 길일까. 그 녀석은 그 먼 길을 혼자 운전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을 했을까. 그때 한 사람만이라도 전화를 했으면 살지 않았을까. 가슴이 갑갑해온다. 살아 마지막이 될, 다시는 못 돌아갈 이 먼 길을 혹시 호석이는 울며 가지 않았는지….”
염씨와 개인적인 연이 없더라도, 그를 보내는 일에 가슴이 고동치는 것은 조합원들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부천센터분회 조합원 오경선(42)씨는 이 길을 출발하기 전부터 불면에 시달렸다. “소풍 가기 전날 선잠 때문에 설치듯, 그랬어요. 1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10분 지났을 뿐이고….” 협상이 타결됐으니 가벼운 마음이 될 줄 알았다. 염씨의 노제가 시작되는 서초동으로 오는 길에 오씨는 눈물을 쏟았다. 양산의 밤에 인터뷰를 이어가면서도 그는 몇 번쯤 눈시울을 붉혔다. “떠난 사람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모두 터져나온 것 같아요.”
모여앉은 이들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다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에요. 10년, 20년 동안 ‘너만 잘하면 된다’를 세뇌받으며 일해온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최종범·염호석 조합원의 죽음 때문에 ‘우리’를 깨우치게 됐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지만 이젠 모두 깨우쳐서 이젠 760년 걸려도 삼성이 무노조 경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아무것도 몰랐던’ 노동자들이 350일 만에 누구도 가닿지 못한 곳에 이른 비결은 무엇일까. 대체로 ‘벼랑 끝 전술’을 꼽는다.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이 실제 누려온 삶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줄기찬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한 동력이었다. “절박함이 가장 컸어요. 이것마저 안 되면 노예 같은 삶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런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조재영·38·포항센터분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근로규약도 없는 환경이었으니까.”(신용길·43·부산광안리센터분회)
<font size="3"><font color="#006699">신새벽 뜨는 정동진은 어디 있나요</font></font>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삼성에서 아직 우리를 노조로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많이 안타깝습니다.”(전상철·31·이천센터분회) “아쉽죠. 과장이나 사원이나 차이 없이 기본급 120만원이니까. 건당 수수료 폐지가 무너지지 않은 것도 아쉽고요.”(신용길·43·광안센터분회) 박정미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이번 협상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되, 섣불리 ‘승리’를 말하는 것은 경계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각 센터별 단체협약을 위한 현장 투쟁이 더 중요한 싸움입니다.”
<font color="#C21A8D">[정동진, 그의 꿈]</font> “호석아, 드디어 정동진에 왔다.” 노제의 사회를 맡은 박성용 통영센터분회장이 외마디를 토해냈다. 바다 앞에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일품이라는 정동진 바다는 이날만은 소리 없이 잔잔했다. 바다도 그를 조용히 기다려온 것처럼.
“바다가 너무 푸르고 고요했어요. 우리 호석이를 위해 한마음으로 모여주는 너무도 따뜻한 사람들처럼요.” 염씨의 어머니 김정순(65)씨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가족의 해체 때문에 6살 이후 마음껏 만나지 못한 아들이었다. 갑자기 “떠나버린” 아들이 무진 원망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이젠 아들을 통해 얻은 숱한 아들딸들이 그를 위로한다. “호랑이 꿈을 꾸고 낳은 아이라 호석이에요. 어릴 때부터 비범하게 영리한 데가 있었지요. 이렇게 떠나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그랬나봐요)….”
그가 ‘정동진’을 말하지 않았다면, 모두를 ‘해 뜨는 곳’으로 불러내지 않았다면, 삼성전자서비스노조는 그토록 승산 없는 싸움을 단호하게 이어갈 수 있었을까. 시인 송경동은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양산센터분회장에게 바치는 시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죽은 이가 사랑했던 정동진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중략) 정말 그 정동진은 어디에 있나요/ 노동자 민중의 신새벽이 떠오르는 곳/ 거짓된 역사를 찢고 새로운 역사가 떠오르는 곳/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지 않고/ 만인이 만인의 행복이 되는 곳/ 누구도 누구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누구도 누구를 차별하지 않는 곳.”(송경동, ‘우리들의 정동진’)
강릉·양산=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김연희 인턴기자 kyhbb72@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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