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아시아의 청년 사회혁신가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웃음 뒤엔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로 인한 눈물도 함께 있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들에겐 ‘생존’ 자체가 녹록지 않은 첫 번째 목표일지 모른다. 국내에서 성공한 청년 사회혁신가로 꼽히는 4명을 만나본 까닭이다. ‘사회적 가치’와 ‘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았는지, 왜 굳이 소셜벤처라는 험난한 길을 택했는지, 그 길을 뒤따르려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더 궁금한 이야기가 있다면 7월3일 서울시청에서 열리는 ‘청년, 아시아 미래를 열다’ 국제포럼 행사장으로 오시길.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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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보청기업체 ‘딜라이트’, 국내 첫 셰어하우스 브랜드 ‘우주’(WOOZOO), 사회혁신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허브 서울’, 저소득층 학생에게 무료 미술교육을 제공하는 ‘앨리’, 악성 댓글을 없애는 ‘시지온’.
28살 청년은 무지갯빛 꿈을 꾼다. 그의 꿈이 담긴 회사는 5곳. 그동안 모은 10억원도 탈탈 털어 담았다. 일부 지분만 투자한 회사도 있지만, 딜라이트와 우주는 창업자이자 최대주주다. 화려한 이력과 달리 평범한 학생 같은 차림으로 나타난 김정현 딜라이트 대표는 “딜라이트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뒤로는 월급을 못 받아, 쓸 돈이 없어져 걱정”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 소박한 청년의 도전은 그러나 대단했다.
2010년 창업한 딜라이트는 보청기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개당 수백만원이나 하던 보청기 가격을 34만원으로 낮춰 내놨기 때문이다. 저소득 난청인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아 거의 공짜로 보청기를 살 수 있게 됐다. 맞춤형이던 제작 방식을 기성복 만들듯이 표준화하고, 유통구조를 대리점 대신 직영점과 인터넷으로 바꿔 가격 거품을 걷어낸 결과다. 창업 아이디어는 사회적 기업을 연구하는 대학 연합동아리 ‘넥스터스’에서 다뤘던 인도의 보청기 사업 실패 사례에서 얻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중고품 중개 매매로 돈을 벌었던 타고난 사업 감각도 한몫했다. 아이디어만으로 고용노동부 주최 소셜벤처 경연대회 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고, 벤처캐피털 등의 투자를 받아 회사 몸집을 키웠다. 직원 40여 명이 일하는 딜라이트의 올해 매출은 70억~8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딜라이트 부사장 출신의 김정헌 대표가 창업하고 김정현 대표가 지분 80%를 갖고 있는 ‘우주’는 주거문화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대학생, 외국인 유학생 등 주거 취약계층들이 하숙집과 원룸 대신 영화·야구 등 공통의 관심사로 디자인된 공간에서의 공동생활을 선택한다. 우주는 서울에만 13곳의 셰어하우스를 운영 중이고, 창업 1년 만에 매출 10억원을 달성할 전망이다.
“난청이나 주거 문제나 모두 경제적 이유로 기본권을 못 누리는 거잖아요. 이왕 돈을 벌 거면 많은 사람을 돕고 싶었어요.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게 보람 있고 재밌어요.” 김정현 대표가 10억원을 벌어놓고도 ‘사장님’으로 편하게 사는 대신 소셜벤처에 계속 재투자하는 이유다. 딜라이트와 우주는 해외 지사 설립을 고민 중이다.
김형수(27) 트리플래닛 대표도 어린 나이에 ‘사장’이 됐다. 트리플래닛은 ‘다마고찌’처럼 물과 비료를 줘서 나무를 기르는 모바일 게임 회사다. 나무가 자라면 트리플래닛이 수익금의 일부를 내어, 국내외에 실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다. 최근에는 ‘스타숲’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효리숲’ ‘이승기숲’ 등 팬들이 트리플래닛을 통해 스타에게 숲을 선물하는 방식이다. 이용자들이 게임을 할 때 나무에 ‘신혜성’ 같은 이름을 붙여주는 데 착안해 팬클럽, 연예기획사 등에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했다. 게임 속 물뿌리개, 비료 등으로 간접광고를 하는 방식도 나무 심기를 사회공헌 활동으로 많이 하는 대기업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그 결과 2012년 창업한 회사는 단숨에 지난해 매출 10억원으로 급성장했고, 올해도 2배 이상 매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트리플래닛이 지금까지 심은 나무는 48만 그루에 이른다. 국내뿐 아니라 비정부기구(NGO)의 도움을 받아 아프리카와 동남아 등 9개국에 숲 45곳을 조성했다. 모바일 게임으로 번 돈의 절반가량은 나무 심기에, 10~20%는 나무 관리에 쓰인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김 대표는 중·고등학교 시절 영화감독이 되고 싶던 ‘꿈나무’였다. “나무가 뽑혀나가는 묘지 대신 수목장을 해야 한다는 다큐멘터리를 첫 작품으로 만들었어요. 대학 때까지도 다큐를 찍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죠. 다큐나 영화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는 있지만 행동하게 만들 수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찾고 싶었어요.” 군대에서 우연히 모바일 게임을 떠올렸고, 군대 후임이 게임 개발자로 나서줬다.
“초기에 스타트업을 도와주는 건 3F예요. 친구(Friend), 가족(Family), 바보(Foolish).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열심히 꿈을 팔고 다녔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성공할 수 있었어요. 저한테는 돈보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해요.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올 하반기 미국과 중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꿈은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다음 아이템은 북금곰이랑 고래 키우는 게임을 생각 중이에요. 그 수익을 그린피스에 전달해 북극곰 보호 활동에 쓰도록 돕는 거죠.”
소셜벤처의 가장 큰 자산은 상상력이다. 에코준컴퍼니가 지난 4월 출시한 ‘퍼블릭캡슐’이라는 독특한 모양의 물병이 대표적이다. 캡슐 형태의 알약을 본뜬 물병이 하나 팔릴 때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말라리아 치료약을 위한 기금 500원이 적립된다.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플라스틱 물병이라서 자연분해되고, 뜨거운 물을 부어도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친환경 제품이다. 브라운 컬러는 커피 찌꺼기를 이용해 100% 천연으로 색을 냈다. 출시되자마자 구매와 컬래버레이션(협업) 제의가 잇따르고 있다.
이 물병을 디자인한 이준서(37) 에코준컴퍼니 대표는 국내에 ‘에코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소셜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다. 첫걸음이 쉽진 않았다. 대학원에서 그린디자인을 전공한 이 대표는 “지구환경에 도움이 되면서도 모두가 예쁘다고 좋아하는 디자인 작업을 하고 싶어서” 개인신용대출로 2천만원을 마련해 2011년 회사를 창업했다. “처음엔 서울형 사회적 기업으로 인건비 지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고용노동부 인증기업으로 넘어가려고 보니까, 우리가 추구하려는 사회적 가치와 정부가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제품으로 인한 친환경 가치는 인정해주지 않고, 제품을 장애인에게 몇 개나 줬느냐는 식이에요. 국내 투자자들도 무형의 사회적 가치보다는 당장 눈앞에 돈이 보여야 주목하고요.”
그의 가치를 먼저 인정해준 건 해외 디자인 업계였다. 에코준컴퍼니의 첫 제품인 ‘오리지널그린컵’은 세계 3대 디자인대회인 ‘레드닷’ ‘iF’ ‘IDEA’에서 잇따라 상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가격이 1만4천원으로 다소 비싸지만, 지금까지 5만여 개가 팔렸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 등 10개국에서 온·오프라인으로 팔리고 있다. 올 하반기엔 인터넷으로 컵을 구매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벽돌에 새겨 아프리카에 우물을 만들러 직접 갈 예정이다. 이 대표는 “진짜 해보고 싶은 건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제품 디자인”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지난 4월엔 작품 제작 과정에서 하자가 있는 제품을 팔아서 수익금을 아동학대 미술심리치료비로 기부하는 ‘하자마켓’이란 이색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디자이너 42명이 참가했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아시아 퓨전 레스토랑 ‘오요리’. 이곳은 이주여성들을 직원으로 고용해 경제적 자립을 돕는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지혜(40) ‘오요리아시아’ 대표는 소셜벤처 업계의 1세대 ‘맏언니’다. 2008년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에서 시작된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요리 워크숍은 6년 만에 한국과 타이, 네팔에 매장을 둔 글로벌 소셜벤처로 성장했다. 2009년 서울 홍익대 근처에 문을 연 ‘오요리’는 동남아 등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들이 직원으로 일하는 아시아 퓨전 레스토랑이다. 오요리의 목표는 이주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타이 치앙마이에 ‘오요리 더 그릴’이라는 음식점을, 네팔에 ‘미티니’라는 카페를 열면서 아시아로 발을 넓혔다. “이주여성들은 자기 나라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 결혼하러 오는 거잖아요. 결혼 이주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아시아의 빈곤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어요.” 이 대표가 아시아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다.
타이와 네팔의 매장에서도 싱글맘, 고아, 무국적 상태인 고산족 등 취약계층이 직원으로 일한다. “치앙마이 음식점엔 얼굴에 흰색 회칠을 한 15살 안팎의 버마(미얀마) 종업원이 많아요. 불법체류 중이니 임금도 제대로 못 받죠. 그 아이들을 보고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이 대표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사람’이다. “좋은 상품을 해외에 내다파는 건 오히려 쉽다. 하지만 오요리는 사람과 부대끼고 사람을 길러내는 게 일이다. 네팔에선 최하계급인 달리트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최상계급인 브라만은 커피 내리는 고상한 일만 한다. 이런 현지 문화에 적응하고 우리를 믿게 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해외 진출에서 중요한 건 돈보다 현지 파트너와의 네트워크다.” 다행히 이 대표는 사람 복이 많았다. 타이에서는 괜찮은 소셜벤처 중간지원조직을 만나 2만달러 투자를 끌어냈고, 네팔에선 고아원 출신 청소년들의 직업훈련을 하고 있는 단체와 손을 잡았다. 해외투자를 받아 합작법인을 설립한 건 국내 소셜벤처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국내에서도 좋은 투자자의 도움을 받아, 오는 10월엔 서울 북촌에 오요리 2호점을 낼 계획이다. 탈학교 청소년, 노숙인 등을 고용하는 서양식 고급 레스토랑이다.
사회 혁신이라는 꿈을 꾸지만, 소셜벤처는 엄연한 사업이다. 돈이 아무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지만, 돈이 없으면 꿈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소셜벤처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4명의 소셜벤처 사업가 모두 굉장히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대답을 내놨다.
“완전히 비영리 형태로 일할 게 아니라면, 결국 흑자를 내고 지속 가능해야 원하는 사회적 가치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가치라는 구호만 외치는 친구가 많다. ‘사회적 기업은 원래 돈 벌기 힘들어요, 도와주세요’라고만 할 게 아니라, 경영에 관해 본인이 더 노력하고 부딪혀야 한다.”(김정현 딜라이트 대표)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비즈니스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화법을 선택하는 거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고민하라. 내가 대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만큼 깊이 사랑하는지를 고민하라.”(김형수 트리플래닛 대표)
“젊은 친구들이 창업하면 무조건 성공할 거라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소셜벤처에 관심 있다면 직접 인턴 체험을 해보고 현실을 느낀 뒤 창업하는 게 좋겠다. 정부도 준비 안 된 창조경제만 외치기보단, 3년 이상 된 소셜벤처에 인턴십 프로그램을 지원해주는 제도 같은 걸 마련해보는 게 어떨까?”(이준서 에코준컴퍼니 대표)
“더 많이 아시아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젊은 친구들이 공적개발원조(ODA) 등 봉사활동 경험은 많지만 비즈니스엔 방점이 안 찍히는 경우가 많다. 소셜벤처는 생태계 사업이다. 우리 회사만 잘돼선 안 된다. 해외투자를 받은 기업이 잘해줘야 또 다른 투자가 꼬리를 물고, 밑에 있는 소셜벤처가 잘 커나갈 수 있다.”(이지혜 오요리아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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