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0일 저녁 7시. 서울 이태원 해방촌에 위치한 ‘빈가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좁은 공간을 열댓 명의 ‘대출자’들이 가득 메웠다. 간단한 설명이 끝난 뒤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향했다. ‘빈집’으로 세간에 알려진 주거 공동체 6채 중 ‘사랑채’란 이름의 집이다. 1층은 ‘반려동물 가족’과 ‘입양 가족’, 2층은 ‘주거 공동체’, 3층은 ‘재혼 가족’ 사람책이 있었다. 대출자들은 신발을 벗고 미리 신청한 책을 읽었다.
낯선 사람과 가족이 되다‘우리 딸, 우리 가족, 우리 삼남매.’
할머니는 이지은(22)씨와 오빠들을 ‘우리 삼남매’라 부른다. 지은씨에게는 6살, 10살 차이가 나는 오빠 둘이 있다. 소심한 큰오빠는 세심하게, 개구쟁이 작은오빠는 괴롭히면서 지은씨를 챙겨준다. “할머니가 항상 우리 삼남매라고 아껴주시니까 단결이 돼요.” 모두에게 당연한 일상. 하지만 7년 전엔 ‘낯선’ 단어였다. 지은씨는 ‘낯선 사람과 가족이 되다’ 재혼 가족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책이다.
“엄마도 여자인데 외롭겠구나, 처음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재혼 이야기를 꺼낸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지은씨는 어머니의 재혼을 반대했다. 어머니와 지은씨. 가족은 단둘로도 충분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너를 혼자 키우는 게 힘들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처음으로 어머니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지은씨는 재혼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을 읽으며 용기를 냈다.
“서로의 노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의 노력이 컸어요.” 아이들을 공평하게 사랑하고, ‘우리 가정’이라는 느낌을 전해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친딸’처럼 여겨주는 진심에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새아버지는 오빠들 통장으로 용돈을 넣었다. 오빠들의 계좌번호가 적힌 자리에 지은씨의 계좌번호를 더했다. “너무 고마웠다. 나를 이렇게 아빠로 여겨줘서.” 새아버지가 나중에 말했다.
힘든 순간도 있었다. 현행법상 재혼 가족은 성씨 변경을 해야만 한 가족으로 등재된다. 그렇지 않으면 동거인이다. “사람들이 다 원래 제 이름을 아니까 개명을 하기 어렵더라고요.” 엄마가 설득했다. “성을 바꾸는 건 새아버지가 저를 친딸로 인정해주시는 거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친아버지가 반대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서로 만나려 하지 않았다. 중간에서 의견을 중재하는 일은 지은씨의 몫이었다. 어렵고 지치는 과정이었다.
‘담대해라, 담대해라.’ 힘들 때마다 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을 곱씹는다. 삶의 언덕을 오르면서 배운 게 많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본도 가치도 공유하는 주거공동체“어느 순간 고양이가 찾아오더라고요. 묘연(猫緣)이란 말처럼….”
그날 김도훈(39)씨는 서울 홍익대 근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까만 고양이가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약속도 잊은 채 길바닥에 앉아 30분을 놀아줬다. 책임질 자신은 없어 공사장에 두고 왔다. 하지만 고양이가 떠올라 밤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되돌아가 다시 데려왔다. 얼마 뒤 동물병원에서 검진을 받으면서 고양이의 십이지장이 막혀 있단 걸 알게 됐다. ‘고양이와 함께 살아야겠다.’ 고양이 ‘쏠로’와 ‘반려동물 가족’ 사람책이 8년을 함께 살게 된 사연이다.
외항사 선원이었던 아버지는 무뚝뚝했다. 도훈씨가 군에 입대하자 ‘뽀삐’란 이름의 개를 키웠는데 그때부터 아버지가 달라졌다. 집에 일찍 들어와 뽀삐가 오늘 하루는 뭘 했는지 살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를 함께하다 아버지 품에 안겨 뽀삐가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엉엉 우는 걸 봤다.
고양이 쏠로와 지낸 지 1년쯤 지났을 때다. “그거 아세요? 1년 만에 완전 달라지셨어요.” 회사의 여직원이 한마디 했다. 이전엔 허공에 발이 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도훈씨 스스로도 이젠 땅에 발을 딱 붙이고 사는 기분이다. ‘부부는 닮아간다’더니 성격과 생체리듬도 고양이와 비슷해졌다. “오히려 부부보다 더 좋죠.”
고양이 수명 15년이라는 정해진 시간. 도훈씨는 온전한 책임감을 처음으로 느꼈다고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잘 보살펴줘야겠다.’ 그걸 느낀 순간 어른이 된 듯하다.
“갈등 조정은 어떻게 하나요?” 주거 공동체 ‘빈집’에서 4년째 살아온 나마스테(27)에 따르면 방법은 많다. 빈집에선 일주일에 한 번 회의를 한다. “청소가 잘 안 된다”는 식의 불만이 나올 때가 있다. 예민한 소수를 우선 배려해 청소를 더 꼼꼼히 한다. 해결이 안 되면 다른 빈집으로 옮겨가도록 하기도 한다.
빈집은 2008년 서울 남산 해방촌에 둥지를 텄다. 유럽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던 한 커플은 현지인들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여행자들이 아무나 쉬었다 갈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해방촌 언저리에 32평의 방 3개짜리 집을 얻어서 누구에게나 열어뒀다. 지금은 6채의 빈집에서 30~40명이 머문다.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 입양개인 공간을 두지 않는 건 빈집의 원칙이다. 경제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초기 멤버들이 주머니를 털어 보증금 수천만원을 마련할 때 ‘공유’라는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공간만 공유하는 게 아니다. 공동체 은행 ‘빈고’에 돈을 모으고 그렇게 모인 출자금은 또 다른 빈집의 보증금이 된다. 자본을 공유해 공동체 공간을 확대하는 셈이다. 가치도 공유한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채식주의, 반자본주의를 실생활에서 실험한다. 각자의 재능 역시 공유한다.
“엄마, 낳아준 엄마는 날 떠나보낼 때 얼마나 슬펐을까요?” 샤워하고 나온 7살 막내딸 희은이가 말했다. 엄마는 목이 콱 막혔다. 희은이의 몸을 닦으며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잊지 못해. 낳아준 엄마도 희은이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이가 들면 꼭 만나도록 하자.” 세 딸의 엄마 김경아(44)씨는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 입양’ 사람책 주인공이다.
“나도 엄마 뱃속에서 나왔죠?” 생후 29개월, 어린이집에서 성교육을 받고 온 막내딸이 물었다. “그렇지, 너도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 그리고 너에겐 낳아주신 엄마가 따로 계셔.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지만 우린 너를 지켜줄 거야.” 김씨는 희은이에게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 때부터 입양을 소재로 한 동화책을 읽어줬다. 낳아준 엄마를 궁금해하는 희은이에게 아는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줬다. “입양은 그 아이의 역사예요. 알린다면 부모가 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김씨는 3년 전부터 ‘반편견 입양교육’ 강사로 활동했다. 입양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당시 희은이와 사이가 틀어진 단짝 친구가 희은이의 비밀을 퍼뜨리고 다녔다. 희은이는 엄마에게 입양 교육을 제대로 해줄 것을 부탁했다. 강사로 활동하던 김씨는 희은이네 학년 전체에 입양 교육을 하게 됐다. 나중엔 김씨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도리어 소문을 퍼뜨린 친구에게 ‘그렇게 놀리는 것 아니야’라며 화를 냈다.
“낳지 않은 아이와의 관계에서 어려울 때가 있지 않으세요?” 대출자가 질문을 던졌다. “제가 낳은 아이랑도 어렵더라고요.” 김씨가 웃었다. 그녀는 입양아라서 특별히 다르다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도 결국 인간관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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