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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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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잔인한 항소

순천지원, 한센인 강제 단종·낙태의 국가 책임을 처음 인정한 1심 판결
일본은 국가가 사과했지만 한국은 항소에 나서
등록 2014-05-21 13:53 수정 2020-05-03 04:27
일제강점기 때 강제수용됐던 한국·대만의 한센인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손배배상 청구소송에서, 2005년 10월 일본 법원이 한국 한센인에게는 패소, 대만 한센인에게는 승소 판결했다. 엇갈린 판결에 항의해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센인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결국 일본 정부는 한국·대만의 한센인들에게 모두 보상하기로 했다. 한겨레

일제강점기 때 강제수용됐던 한국·대만의 한센인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손배배상 청구소송에서, 2005년 10월 일본 법원이 한국 한센인에게는 패소, 대만 한센인에게는 승소 판결했다. 엇갈린 판결에 항의해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센인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결국 일본 정부는 한국·대만의 한센인들에게 모두 보상하기로 했다. 한겨레

지난 4월29일 광주지법 순천지원 민사2부(재판장 유영근)는 한센회복자 19명이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단종·낙태를 강제로 당해 고통을 겪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원고에게 손해배상금 3천만~4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국가가 한센회복자에게 자행한 인권침해와 불법행위를 인정한 첫 판결이다. 1950~90년대 한센병 유전이 우려된다는 ‘오해’ 때문에 한센회복자들은 정관수술 또는 임신중절수술을 당했다. 2004년부터 한센회복자의 권리를 찾아주려 일본·한국 법원의 문을 두드려온 ‘한센인권변호단’의 조영선 변호사가 에 글을 보내왔다. _편집자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중략)/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센 시인 한하운은 소록도 가는 팍팍한 길을 ‘전라도 가는 길’이라는 시로 이렇게 썼다. 한센회복자들에게는 버스도, 기차도, 식당도 허용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목욕탕 사용을 거부한 호텔 주인이 공개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한센회복자에게 사과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갈대숲, 보름달… 산모의 30리 길

언젠가 면담하던 한센회복자는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손자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손자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아들이 며느리 모르게 보낸 손자의 사진이다. 아들은 며느리에게 부모 없는 고아라고 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부모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부모로 치부된 것이다. 아들 결혼식을 먼발치에서 노부부는 눈물로 지켜봐야 했다. 단종·낙태로 인해 자식 없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입양한 아들이었다. 아들은 가출한 뒤 현재까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남겨진 어머니는 혹여라도 자식이 돌아올까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못한다. 아들이 보내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섯 살 손자의 사진만이 마냥 웃고 있었다.

경북 안동에 사는 한 한센회복자는 아직도 달 밝은 밤에 밖에 나가지 못한다. 병원 모르게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병원 밖에 나가서 낙태를 하라고 했단다. 정착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낙태를 결심했다. 밖으로 쫓겨나면 구걸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이 소개한 산부인과에서 낙태시술을 받았다. 배에 주사를 놓고 한나절 이상을 기다렸더니 복통이 시작됐다. 아이를 출산했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 사실은 약물 탓에 서서히 죽어가는 아이였다. 놀란 의사와 간호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산모에게 아이를 버리고 오라고 시켰다. 산모는 아이가 든 양동이를 들고 가서 강가 갈대숲에 버렸다. 돌아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꿈틀대며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서도 감히 데려갈 생각조차 못한 채 도망쳤다. 보름달 뜬 밤, 30리 길을 걸어 또 걸어 살기 위해 다시 정착촌으로 돌아왔다. 그날이 평생 아픈 상처로 남았다. 갈대숲, 보름달, 산후처리도 못한 산모의 30리 길. 그 길을 오늘도 걷는 듯하다.

지난 4월29일 광주지법 순천지원 민사2부(재판장 유영근)는 “(국가의 단종·낙태 정책은) 국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했다. 동시에 자손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국가가 자행한 한센회복자에 대한 단종·낙태가 국가의 명백한 불법행위임을 인정한 첫 판결일 뿐 아니라 한센회복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한센회복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뒤늦게나마 인정한 ‘인간 선언’이다. 그러나 80살을 넘긴 노인들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박수도 치지 않고 덤덤하게 일어섰다. 사실 소송에서 이겼다고 해서 이들이 살아온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소록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꿈에 본 고향에 가볼 수도 없다.

원고들의 평균연령 76살

일본에서도 2001년 5월11일 일본 한센회복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 정부의 한센회복자에 대한 강제격리·절멸 정책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조치였음을 인정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리고 한센회복자의 염원을 담아 일본 정부는 항소를 포기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사과가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두 달도 못 된 6월22일 ‘한센병요양소 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일본 한센요양소 입소자 1만여 명에게 강제격리 기간에 따라 800만~1400만엔에 이르는 일괄 보상을 실시했다. 물론 한국의 일제하 소록도 강제입소자 571명, 대만 낙생원 입소자 25명에게도 보상을 했다. 더구나 대만은 대만 정부 수립 뒤 국가가 행한 불법행위에 대해 아예 보상법을 제정해 일괄적으로 배상을 실시하기도 했다.

일본 한센보상법은 전문에서 “한센병 환자는 지금까지 편견과 차별 가운데 막대한 고통과 고난을 강요당해왔다”고 전제한 뒤, “소화 30년대(1955~64년)에 이르러서는 한센병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이 명백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고쳐지지 않고 격리 정책의 변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이러한 비참한 사실을 회개와 반성의 뜻을 담아 심각하게 받아들여 깊이 사죄함과 동시에, 한센병 환자였던 사람 등에 대한 이유 없는 편견을 근절하는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은 5월13일 순천지원 판결에 대해 항소했다. 원고들은 평균연령이 이미 76살을 넘겼고 92살의 고령자도 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계류 중인 632명의 원고(한센회복자)도 고령이고 이미 사망한 분도 있다. 가족도 없이 쓸쓸히 소록도에서 화장당해 납골당에 모셔지는 이들에게 2년, 3년 뒤의 판결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한민국의 항소는 눈물과 한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대한민국은 항소권이 있다고 강변할 것인가.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2년을, 3년을 기다리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과거사 문제에 관해 대한민국이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한센회복자가 가족과 생이별하고 강제격리돼 살아온 눈물값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대만의 전례와 같이 적어도 항소를 취하하고 일괄적인 피해자 배상 법안을 만들어 배상하고 사과해야 한다. 언제까지 대한민국은 한센회복자의 피눈물을 외면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답하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 비난할 수 있나

한하운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한 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굳어버린 나의 얼굴/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이라고 했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천형의 운명을 그렇게 비유했겠지만, 대한민국이 웃음을 잊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여생의 마지막 웃음을 주길 바란다.

조영선 변호사·법무법인 동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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