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스스로 사법부에 제출한 증거를 무더기로 철회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현철)는 지난 3월27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재판부에 낸 증거 36건 중 20건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중국 정부가 ‘가짜’라고 밝힌 중국 공문서 3건도 포함돼 있다. 한 달 넘게 위조 문서가 아닐 가능성을 고집하다, 결국 인정한 셈이다.
이로써 유우성(34)씨에 대한 간첩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입증도 뿌리째 흔들렸다. 검찰의 공소사실은 이렇다. ‘2006년 5~6월 북한에 다녀온 뒤, 2012년 7월까지 간첩 활동을 했다.’ 유씨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2006년 5월23일 북한에 들어가 5월27일 중국으로 나온 이후엔 방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2006년 5월27일 이후 북한-중국 출입경기록이 쟁점으로 떠오른 이유다. 지난해 11월, 검찰은 허룽시 공안국 명의로 된 유씨 출·입경 기록을 재판부에 냈다. 2006년 5월27일 오전, 중국으로 나왔다 같은 날 다시 북한에 들어간 뒤 그해 6월10일 중국으로 나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유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변호인단이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공안국에서 발급받은 전혀 다른 내용의 출·입경 기록을 내놓자, 검찰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삼합변방검사참(세관)의 정황설명서, 허룽시 공안국이 선양에 있는 한국총영사관에 보낸 사실확인서 등을 내놨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세 문서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통보했다. 철회된 증거에는 변호인단 주장을 뒤집기 위해 법정에 제출한 중국동포 임아무개(49·전 중국 공무원)씨 자술서도 포함돼 있다. 앞서 임씨는 와의 인터뷰에서 “자술서를 직접 쓰지 않았다”고 밝혀, 또 다른 증거조작 의혹이 일었다. 지난해 8월 유씨는 1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북한 국적이라고 속여 탈북자 정착지원금을 받은 혐의(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2565만원을 선고했다. 검찰은 1심에서 북한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지만, 검증 결과 중국에서 찍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지난 1월 유씨는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나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증거를 날조·은닉했다”며 수사 담당자를 경찰에 고소했다.
핵심 물증은 철회했지만핵심 물증을 철회했으나, 간첩 혐의에 대한 공소 유지는 강행한다. 증거 철회 다음날인 3월28일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이현철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은 “피고인이 간첩이 분명함에도 혼란을 일으킨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강욱 변호사(법무법인 청맥)는 “일부 증거에 문제가 있을 뿐 간첩이라고 단언하는 태도는 현대 문명사를 부정한 마녀사냥”이라며 “아무리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어도 적법한 증거를 통해 유죄판결이 나야 간첩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항소심 결심공판 예정일이었던 이날,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흥준)는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유씨에 대한 추가 심리를 진행하기로 했다. 검찰은 유씨가 신분을 속이고 탈북자 정부지원금을 탄 부분에 대해 법정형이 더 높은 사기죄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공소장을 변경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변호인단은 “신속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반발했다. 유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유일한 직접 증거는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여동생 유가려씨가 ‘오빠가 간첩’이라고 한 진술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여동생은 국정원의 협박·회유를 받아, 거짓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여동생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진술 내용 가운데 일부가 객관적 증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형사절차 신뢰 송두리째 무너져국정원과 검찰이 연루된 ‘증거조작 사건’의 진상과 배후는 철저히 규명돼야 한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윤갑근)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문서 위조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3월23일 대공수사국 권아무개(52) 과장이 자살을 시도한 여파로 수사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 과장은 가짜 문서 중 하나가 나온 주선양 한국총영사관 부총영사로 근무했다. 공문서를 위조해 전달한 국정원 협력자 김아무개(61)씨와 공문서 입수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대공수사국 김아무개 과장(일명 김사장)에 대해 사문서위조·모해증거위조 등 혐의로 기소할 방침이다. 국정원과 더불어 검찰도 이 사건의 책임 당사자다. 수사 공정성을 담보해야 할 검찰이 가짜 증거를 사법부에 냈다. 독재정권을 지나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척됐다고 여겨지던 형사사법 절차에 대한 신뢰가 다시 무너졌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검사들은 국정원에서 공문서를 받았음에도 법정에선 ‘대검을 통해 입수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검찰 출신 김희수 변호사(법무법인 창조)는 “공안 사건을 수사하는 국정원 직원의 법률적 신분은 특별사법경찰관에 불과하다. 수사를 지휘하고 감독하고 공소를 유지하는 모든 책임은 검사가 져야 한다”며 “검찰이 혐의 사실과 관련된 중대한 물증에 대한 확인 의무를 소홀히 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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