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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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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물물교환으로 통한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이호재 감독의 노머니 여행기,
1년을 경험하고도 모스크바 공항에서 ‘삽질’은 다시 시작되는데…
등록 2014-03-15 16:58 수정 2020-05-03 04:27
무일푼 청년들의 배낭여행기를 담은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이호재 감독(가운데)과 친구들은 물물교환을 하며 유럽에서 1년을 보냈다. 돈 없이 서로의 필요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책정하는 법을 배웠다.CGV무비꼴라쥬 제공

무일푼 청년들의 배낭여행기를 담은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이호재 감독(가운데)과 친구들은 물물교환을 하며 유럽에서 1년을 보냈다. 돈 없이 서로의 필요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책정하는 법을 배웠다.CGV무비꼴라쥬 제공

나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통해 땡전 한 푼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적이 있다. 2009년 가을, 영상을 전공하는 6명의 친구들과 함께 단돈 80만원으로 1년 동안 유럽을 여행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호스텔과 레스토랑 등의 홍보 영상을 만들어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이른바 물물교환 여행이었다. 한 학기 등록금을 내기 위해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로 마련한 돈을 촬영 장비와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는 데 모두 쓰고 그길로 학교마저 관뒀다.

숙식과 맞바꾼 30편의 홍보 영상

애초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내가 정형화된 방법으로 꿈을 이루기에는 재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취업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것과 흡사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위를 점하며 생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꿈에서 멀어져감을 인정하며 원치 않는 시간을 지속하는 것 또한 고통스러웠다. 꿈을 좇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고, 어쩌면 그 여행이 나름의 돌파구가 되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유럽 여행에서 물물교환을 통해 생활을 이어나가는 데 성공하며 예상치 못한 삶의 행보를 맞이했으므로.

우리는 1년 동안 유럽 각지에서 총 30여 편의 홍보 영상을 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두 편의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그 모든 과정은 영상으로 기록해 지난해 겨울 이라는 제목으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기적 같은 일까지 겪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을 먹을 것과 잘 곳으로 바꾸는 단순한 행위가 영화 같은 일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돌아온 지 2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또다시 유럽의 한 호스텔로부터 영상 제작 의뢰를 받았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밤낮없이 실시간 항공권을 검색하는 일이었다. 인천발 영국 런던행 비행기표를 최대한 저렴하게 구매하기 위해 1분에 한 번씩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표를 찾았다. 일주일을 잠복한 끝에 세금을 포함해 1인당 45만원짜리 티켓을 구했다.

지난 여행에 동행했던 나의 친구, 슈퍼스타 하비와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유지이긴 하지만 낯선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 입·출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입국심사대에 당당히 여권을 내밀었다. 돌아온 답은 “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지난 여행에서 충분히 좌충우돌을 겪은 하비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금세 포기하고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콘센트를 찾기 시작했다. 하비에게 왜 당황하지 않느냐고 묻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보자니 안 나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어”라고 말했다. 나의 친구 하비는, 우리가 공항에서 서른하고도 여섯 시간을 더 기다려야 런던행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초상화를 그려드립니다”

그렇게 모스크바 공항 환승 게이트는 단순한 경로가 아닌, 우리에게 또 다른 여행지가 되고 말았다. 바깥에는 눈보라가 불고 있었지만 모스크바 공항의 실내 온도는 높았다. 그야말로 무더웠다. 벗고, 또 벗고, 더는 벗어서는 안 되는 옷차림에까지 이른다. 우리는 한여름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있듯 창문에 꾹 붙어 체온을 식혔다. 자리를 옮겨 노트북 배터리를 충전해가며 시간을 때웠다. 하지만 이것도 대여섯 시간이 한계였다. 슬슬 배가 고프고 갈증도 나는데, 문제는 갖고 있는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이었다. 신용카드는 없고, 돈이 들어 있는 은행카드는 오로지 현금자동인출기(ATM)를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데, 환승 게이트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떡하지’를 연발하는 것 따위는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1년의 히치하이킹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올 것이 왔다. 물물교환!

하비와 나는 종이와 펜을 들고 터미널 내에서 간단한 음식과 음료, 술 따위를 파는 작은 가게를 찾았다. 이곳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며 지루함과 사투를 벌이는 중일 거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는 놀거리였다.

“자, 선착순 한 분 모십니다. 초상화를 그려드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모종의 놀이로 둔갑한 거래라는 게 들킨다면 상대방에게 절대 호기심을 살 수 없다. 우리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것을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이벤트로 여겨야 한다. 실은 그래야 우리도 초상화를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을 덜 수 있다. 하비가 대충 스윽 선을 긋기만 해도 사람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의사소통은 언어보다 몸짓에 더 많이 기댔다. 이런 상황에선 그 편이 더 흥이 난다. 일부러 코를 비뚤게 그리기도 하고, 귀를 기다랗게 늘여 당나귀 귀를 만들기도 했다. 초상화 한 장을 그리고 떠들고 노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을 받은 이들은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 “바텐더, 이 친구들에게 맥주 한 잔씩 내주세요.”

맥주를 잔에 따르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우리를 불렀다. 지루하게 공항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하나둘, 간이 식당으로 모여든다. 이쯤 되니 주인도 신이 난다. 우리에게 한턱 쏠 눈치이기도 한데…. 풍채 좋은 바텐더는 자기 덩치만 한 커다란 햄버거를 우리에게 내주며 말했다. “브레이크 타임!”

즐거움은 덤으로

물물교환은 서로 필요한 물건을 맞바꾸는 단순한 거래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즐거움을 나누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 동등해지고 공평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즐거움이란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므로, 교감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더해진다. 모스크바 공항의 무더웠던 서른여섯 시간, 터미널에 갇힌 빈털터리였던 우리는 지루함과 갈증과 허기를 웃음과 햄버거와 맥주와 바꾸며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이호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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