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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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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매일 만나고 있다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현 CJ 회장 1심서 징역 4년 선고
‘최소한’의 형량이란 분석 속 다른 총수 재판 주목
등록 2014-02-18 17:2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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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에서 / 육성시 낭송을 듣고도 울지 않고/ 광주 톨게이트, 빛고을 시민들보다/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섰던/ 백골단 장벽 보면서도 울지 않고/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해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김남주를 묻던 날’, 송경동) 김남주 시인이 타계(1994년 2월13일)한 지 20주기가 됐다. 그로부터 시와 글과 삶을 배웠던 송경동 시인이 ‘스승 김남주’의 시와 글과 삶을 이야기했다. 송경동 시인은 ‘김남주를 기념하는 대신 김남주를 매일 만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만나는 김남주는 20년 전 죽은 혁명시인이 아니라 2014년 지금도 다른 세상을 꿈꾸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김남주들’이다. _편집자

김남주 선생의 20주기를 맞아 몇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주로 문학 행사들이다. 이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문예지에 선생 관련 글이 조금씩 실리는 듯하다.

주로 회고와 문학사적 평가들이다. 생전엔 소나 말이나 닭 같은 짐승이었다면 진즉 죽고 말았을 0.75평의 동굴 같은 ‘납골당’에서 생활하다 지금은 광주 망월동의 옛 묘역에 그보다 작은 망각의 관 속에 묻혀 20여 년을 ‘살고’ 있는 그가 본다면 어쩌면 서운할 일이다. 그는 이미 말하고 갔었다. “사후의 평가? 아나 비평가 너나 처먹고 입심이나 길러라.” 그러면서 말했다. 네가 쓴 시가 깜부기가 될지 보리밥이 될지 그것은 농부에게나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꼴뚜기가 될지 준치가 될지 그것은 어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황금이 될지 똥금이 될지 그것은 어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비싸게 팔릴지 싸게 팔릴지 그것은 임금노동자에게 맡기고 써라(‘시를 쓸 때는’ 중에서)

계승하기 위한 ‘동지들’의 행사 없어

그는 “낡은 세계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려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창작 기량을 향상시킨답시고 문장론이라든가 수사학이라든가 문예이론 서적 따위를 일부러 읽은 적도 없었다.” 그는 믿었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인 것이다. 그 길이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비인간성,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전면전에 시인 자신이 몸소 참가하는 길밖에는 없다.”(‘나는 이렇게 쓴다’ 중에서)

과하게 말해 그가 평소 시와 입에 가끔 올리던 표현을 따르자면 “개 같거나, 좆돼버린” 일일 것이다(그는 병상에서 죽어가며 “개 같은 세상 개같이 살다 개같이 간다”고 했다. 1972년 첫 징역을 선고받은 뒤 “좆돼버렸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리는 더 많은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했던 혁명과 세계관에 관련한 논의가 없어서다. 어디에도 그가 진정으로 목숨을 바쳤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실천과 노선을 평가하고, 비판적이고 반성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동지들’의 행사는 없다. 그가 뼈 속까지 증오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더욱 창궐하는데 그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그의 끝나지 않은 투쟁을 논하는 자리는 찾기 힘들다. 그가 혁명을 위한 무기로 생각했던 ‘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있는데, 그 목적으로 삼았던 ‘다른 세상’에 대한 논쟁은 없다. 다른 세상을 위해 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혁명적 조직’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생전에 ‘벗에게’라는 시에서 “참된 삶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로 향한 끊임없는 모험 속에 있다”고 말하고, “투쟁 속에서만이 인간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혁명은 실천 속에서만이 제 갈 길을 바로 간다”고 했는데, 변화된 세계 속에서 그 ‘실천 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는 짚어지지 않는다. 그런 총체성이 거세당한 김남주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배우고 무엇을 계승할 수 있을까.

어느 때나 선한 웃음을 잃지 않아 ‘물봉’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생은 무척이나 구체적이고, 전투적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깔보면 바로 그 낫으로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라(‘종과 주인’)고 했던 이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산다고 노래하는 사람 따로 있고 노래를 위해/ 피를 흘리는 사람 따로 있는가라며 스스로 그 노래를 살고자 했던 사람이다. 권력 앞에서 꿇지 않는 무릎 없고/ 돈뭉치 앞에서 걷어올리지 않는 치마가 없고/ 부패와 타락이 그 본색인 부르조아 사회에서/ … / 누군가 턱짓 하나로/ 총칼의 숲을 이룬 수십만 군대를/ 제 사병처럼 부려먹을 수 있고/ 누군가 손가락 하나로/ 몽둥이와 방패로 무장한 수십만 경찰을 제 하인처럼 부려먹을 수 있고/ 누군가 지시 한마디로/ 꼭대기에서 말단까지 수십만의 관리를/ 일사천리로 부려먹을 수 있는 그런 기계적인 나라에서/ …/ 허위의 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진실의 인간을 허위의 인간으로/ 날조하고 조작하고 왜곡하고 확대하고 축소하는/ 신문이며 라디오며 텔레비전을/ 누군가 한 사람이 독점하고 있는/ 그런 어두컴컴한 나라에서, “맨입의 빈손으로 표를 모아” 선거를 통해 “허위의 인간을 몰아낸다는 것”이, “착취의 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압제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환상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서만 무너진다”고 했던 전투적 인간이었다.(‘환상이었다 그것은’ 중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 있었던가”

혹 그는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엔 감옥에서가 아니라 저 무덤 속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날쑥 쥐새끼들 귀신 씻나락 까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우리에게 얘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달라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따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들 스스로 제 둥지를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아무개와 박아무개가/ 지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하고 지금 우리에게 다시 묻고 싶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혁명시인/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나 자신을 노래한다’ 중에서)

그런 실천을 위해 그는 고교 시절 이미 획일적인 반공교육에 반대해 자퇴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들어간 대학 시절 1972년 10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박아무개”가 이른바 ‘유신’이라는 것을 선포했을 때 그에 반대하는 전국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 을 만들어 전국에 뿌리려 했다. 그 일로 ‘반국가단체 예비음모죄’로 체포돼 근 1년을 살고 나와야 했다. 다시 복학되었지만 말도 안 되는 교수의 수업을 받다 “허허허 허허허” 웃고는 영영 교정을 떠났다. 고향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지금은 고인이 되어 그의 망월동 묘역 옆에 함께 잠들어 있는 고 정광훈 선생, 홍영표, 윤기현 등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만들고, 소설가 황석영, 최권행, 김상윤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기도 했다. ‘카프카’라는 서점을 만들어 광주 지역 학생운동의 거점을 만들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에 이미 무산자들의 무기가 될 프란츠 파농의 을 번역해 내기도 했다.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을 위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의 피 묻은 내의로 깃발을 만들기도 했다는 남민전의 전사로 가입하고 지하 활동에 나섰다.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들에게 빼앗긴 민중의 고혈을 되찾으러’ 동아건설 회장집 담을 넘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그를 수사관들은 ‘강도시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15년형을 받고 감옥을 사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고 수백 편의 투쟁의 시를 써서 은밀하게 밖으로 내보냈고, 파블로 네루다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등의 시를 번역해 저항하는 이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저항시선집 를 펴내기도 했다. 1988년 12월 9년3개월 만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그의 삶과 시를 폄하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를 변호한다는 옹색한 이유로 그에게도 ‘서정시’가 있었다고 별도로 김남주의 서정시를 펴내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시를 ‘관념적’이고 ‘도식적’이라 폄하하거나, 너무 직설적이고 산문투여서 예술성이 담보되지 않는 단순 ‘선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예 ‘예술’의 울타리 밖으로 그를 밀어내려는 시도가 무수히 있어왔다. 거기에 맞서 그는 생전에 “애초에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지 않았다.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바르게 설정하고 지배계급의 허위 이데올로기를 폭로하여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시라는 무기를 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의 시가 ‘너무 전투적이라는 독자의 역겨운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기도 했다.

1994년 2월16일 김남주 시인의 영결식이 끝난 뒤 지인들이 민족문학작가회의(서울 마포구 아현동) 사무실에 들러 고인이 생전 사용하던 책상 위에 영정과 국화꽃을 올리며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왼쪽). 1988년 12월21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김남주 시인이 마중 나온 어머니 문일심씨 및 지인들과 함께 교도소 정문을 나서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1994년 2월16일 김남주 시인의 영결식이 끝난 뒤 지인들이 민족문학작가회의(서울 마포구 아현동) 사무실에 들러 고인이 생전 사용하던 책상 위에 영정과 국화꽃을 올리며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왼쪽). 1988년 12월21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김남주 시인이 마중 나온 어머니 문일심씨 및 지인들과 함께 교도소 정문을 나서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80년대는 피와 학살과 저항의 연대였고, 나는 그 연대에 인간성의 공동묘지인 파쇼의 감옥에 있었다고, 일부의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이제 와서 80년대의 시문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반성하자고 하는데 나는 그들의 앞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늘의 현실이 어제와는 다르다고 해서 어제의 역사적인 실천과 그것의 문학적 대응을 오늘의 잣대로 잰다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저의마저 감지케 한다.”(옥중시전집 머리말 중에서)

나아가 그는 생전에 ‘변했다고 이야기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무엇이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캐묻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민주화가 잘 되어간다고 그러네/ 어떻게 잘 되어가느냐고/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청와대도 개방하고/ 각하라는 호칭도 없애고/ 장관 임명장도 서면만으로 하고/ 국무회의 같은 것도 원탁에서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공산권에도 자유의 물결이 일고 있다고 그러네/ 어떻게 일고 있냐고/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디스코장도 생기고/ 청바지를 입고 청춘남녀가 연애도 하고/ 여성들은 허벅지까지 드러난 패션쇼도 하고/ 사기업도 생기고 시장경제도 도입하고// 벗이여 닫힌 사회의 대중은 열린 사회의 대중을 모른다네/ 그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연출하는 텔레비전 속의 연극뿐이라네/ 그들이 알고 있는 자유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 각색한 연극 대본뿐이라네(‘연극’ 전문)

철거민·장애인·노동자·농민의 형상으로

그로부터 ‘민주화’ 20여 년을 더 보냈지만 정말이지 무엇이 ‘민주화’되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를 진정으로 죽이려면, 저 먼 옛날의 무슨 골동품처럼 만들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의 구체적인 물음에 구체적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는 이제 해소되었는지,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팍팍한 가슴에도 있고/ 제 노동으로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고/ 한 사람의 평등한 인간이고자 고개를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허리에도 있고/ …/ 아무도 얼씬 못하게 철가시를 꽂아놓는 부자들의 담에도 있는 삼팔선은 걷혔는지, 그가 그토록 저주하던 “자유의 집단수용소”이자 “인간성의 공동묘지”인 자본주의는 극복되었는지, 극복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지, 백보 양보해 조금이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개량이라도 얼마나 되었는지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답이 없는 이상 20년, 아니 50년, 1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는 우리 곁에 불편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김남주를, 선생을 매일매일 만나며 살고 있다. 며칠 전에는 대전교도소에 가서 4년째 그곳에서 살고 있는 김남주를 만나고 왔다. 그는 전국철거민연합 의장으로 용산 참사 건으로 구속돼 우리 모두를 대신해 살고 있는 남경남이었다. 그는 투기건설자본과 그들을 비호하는 정권과 공권력에 맞서다 벌써 생의 3번째 감옥을 살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저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는 들어와야 할 길 아니었겠느냐고, 그게 오히려 자신이어서 다행이라고 웃어 보였다.

그날 작은 감옥에 갇힌 그를 떠나 높은 감옥에 갇혀 있는 김남주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들은 옥천IC 옆 30여m 높이의 광고탑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야간노동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그들은 3년여 사이 두 번이나 해고당했고, 몇 번이나 고공농성에 나서야 했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한 용역깡패들과 창조컨설팅 등 노조 파괴 노무법인들은 한때 국회와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노동자들에게만 손배 가압류가 주어졌다.

며칠 뒤에는 다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는 또 다른 김남주를 만나러 갈 참이다. 그는 동료 가족들 24명의 주검을 안고 대한문 분향소를 지키다 다시 경찰에게 끌려간 전 쌍용자동차 지부장 김정우다. 합법의 외피를 입고 다시 나타난 독재자의 딸을 퇴진시켜야 한다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망월동 선생의 곁에 묻힌 고 이남종 열사의 서울역 49재 때에 나는 선생을 만날 것이다. 그 모든 자리에서 나는 선생을 매일 만난다. 선생은 그때마다 어떤 때는 철거민의 형상으로, 어떤 때는 광화문 지하도에서 1년 넘게 농성 중인 장애인의 형상으로, 어떤 때는 비정규직 해고노동자의 형상으로, 다시 나락을 태우고 있는 늙은 농민의 형상으로, 어떤 때는 노점상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눈이 초롱초롱한 대학생 동지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런 그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매일매일 의논하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읽고 있으면 저만치 서서 늘 대견한 듯 나를 보고 있는 그를 본다. 이렇게 역사적 생명으로 만날 때 생과 사의 경계란 실제 무의미하고, 1년이든 20년이든 무엇을 평가하기에 너무나 짧은 찰나일 뿐이다.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끄럽게 쑥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전사2’ 중에서)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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