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놀라셨죠?
염수정 추기경은 추기경으로 서임된 직후인 1월16일 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발언은)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을 두고 한 얘기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다만 “연평도에서 희생된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의 아픔을 같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24일 염수정 대주교가 ‘신앙의 해’ 폐막미사 강론 중에 “정치구조나 사회생활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발언하자,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교회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염수정 주교의 ‘사제 정치 개입 금지’ 발언이 국가기관 불법 대선 개입 사건에 항의하는 사제들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믿었다.
강론 중 세 차례나 ‘정치 참여 금지’ 반복당시 염수정 대주교는 ‘평신도 교령’ ‘가톨릭교회교리서’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을 인용하며 세 차례에 걸쳐 맥락도 없이 ‘사제의 정치 참여 금지’를 반복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내용이 불쑥 강론 중간에 끼어든 느낌이 역력했다. 도대체 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가 처음으로 ‘대통령 사퇴’를 주장하고 나서자, 서울대교구장이 뜬금없이 남의 교구 사제들의 발언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까? 당시 전주교구장인 이병호 주교는 “내 사제는 내가 지키겠다”고 옹호했는데, 갑자기 서울대교구장이 정부의 입장을 변호라도 하는 듯이 나선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엄단할 것을 요구했고, 여당 의원들은 박창신 신부를 “사제복 입은 혁명전사”라고 매도하는 상황에서, 정부·여당 거들기에 적격인 맞춤형 발언을 남기고도 염수정 대주교는 세간의 해석이 ‘자신의 뜻과 달리 해석되었음’을 왜 그때 해명하지 않았는지 갈수록 궁금해진다.
당시 천주교 사제 2124명이 지난 대선에 불법 개입한 국가기관에 항의하는 시국선언에 서명했다. 이는 전체 천주교 사제 4835명 중 약 43%에 이르는 규모다. ‘보수세력의 아성’인 대구대교구 사제들도 103명이나 서명했다. 수도자들은 4500명, 평신도들은 1만1724명이 모여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연이어 사제들이 교구마다 돌아가면서 시국미사를 봉헌하는 상황에서, 염수정 대주교는 ‘급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던 모양이다. 염수정 대주교의 발언을 대대적으로 환영한 천주교 신자들은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뿐이었다. 실체도 불분명하고 당연히 교회 인준 단체도 아닌 이 사람들이 ‘활빈당’ 등 보수단체와 연합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뿐 아니라 시국선언에 동조했던 천주교 공식 조직인 정의평화위원회 사제들, 심지어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에게까지 ‘종북주교’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녔다.
이 마당에 폭탄이 터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첫 번째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발표한 것이다. 지난해 11월26일이었다. 예수가 가난하고 늘 가난한 이들과 어울렸듯이, 교회도 스스로 가난해지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안온한 성전 안에서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멍들고, 아파하며, 더러워진 교회를 더 원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교회는 우리 친구들과 부유한 이웃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아픈 이들, 일상적으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달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너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루카 14,14)에게 말이다. 교황은 “이 점은 의심할 여지도 혹은 이 메시지를 약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설명도 없다”고 단언했다.
교황 권고문 발표 사흘 만에 표변‘정말 놀라셨죠?’ 하고 되물어야 할 대상은 염수정 대주교였을 것이다. 교황이 새로 선임할 추기경 명단을 발표할 날이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상처받은 이들의 ‘현장’에서 상처를 싸매주는 ‘야전병원’이어야 한다는 교황의 말을 염수정 대주교는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서울대교구가 돈이 많아서 제아무리 교황청에 재정부담금을 많이 낸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수도에 위치한 제일 큰 교구라서 추기경 선임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대주교로 임명한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다른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관습, 관행, 스케줄, 용어들과 구조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를 꿈꾼다”고 말했다. 이어 특별히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평화를 위해 특별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고 촉구했다. 게다가 성소수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교황은 지난해 12월17일 낙태와 동성애를 적극 반대한 보수 성향의 미국 추기경을 전격 교체했다. 졸지에 미국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은 빨간색 모자를 벗고 추기경단에서 축출됐으며, 그 자리에 워싱턴주의 도널드 우웰 추기경이 들어왔다. 그러니 염수정 대주교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염수정 대주교는 ‘복음의 기쁨’이 발표된 지 사흘 만에 자신의 영명축일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구조에 짓눌리지 말고 용감하게 개선하며 변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신다”며 입장을 바꾸었다. 이런 염 대주교의 ‘교회-정치’적 처신에 대해 신뢰를 주기란 쉽지 않다.
때마침 발생한 사건이 있다. 정의평화민주가톨릭행동이란 평신도 단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추기경 서임’을 청원하는 서명운동을 벌인 것이다.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일주일 만에 평신도 7576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염수정 대주교에게는 불행 중 다행일까, 다행 중 불행일까. 속단할 수 없지만 이들이 청원서를 교황청에 보내기 직전에 추기경 명단이 교황청에서 발표됐다. 서명 작업이 1월10일에 마감되고 발송 준비를 하던 1월12일 염수정 대주교가 한국 교회의 세 번째 추기경이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가톨릭행동은 결과와 상관없이 청원서를 교황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청원서는 “독선과 불통의 지도자로 인해 ‘민주주의’ ‘정의’ ‘평화’가 위협받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이미 교회 안에도 뿌리 깊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정화시키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는 복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교회 지도자를 저희는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명자 가운데 서울대교구 신자가 2212명으로 전체의 30%나 된다. 이들은 지난해 11월에 일어난 일을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낱낱이 기록에 담아 교황청에 보내는 청원서와 동봉했다. 교황은 추기경 서임 직후 서한을 보내 “추기경 임명은 승진이 아니니 축하연으로 돈 낭비하지 말라”고 당부할 만큼 치밀하다.
‘사회정의’ 재고 기회 얻었으니 은총이제 답을 말해야 한다. 추기경 서임이 염수정 대주교에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추기경은 여느 교구장 주교처럼 자율성이 충분히 보장된 상전 없는 교회권력이 아니다. 추기경이 되는 순간 로마주교인 교황에게 속한 하급 사제이기도 하다. 그의 명운은 이제 교황에게 달렸고, 그 교황은 ‘프란치스코’다. 서울대교구는 그의 영토이면서 교황의 영토다. 보수적인 베네딕토 교황 시절의 정진석 추기경과는 딴판이다. 그래서 불행일 수 있다. 하나, 이참에 버려두었던 ‘가난한 이들’과 ‘사회정의’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얻었으니 은총이라 해야겠다. 다행이다.
한상봉 편집국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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