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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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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지 못하는 ‘요보호 아이들’

만 18세 이상 돼 더는 ‘보호’ 대상자 아닌 가정 밖 아이들의 홀로서기
저소득에 월세방,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힘들어
등록 2014-01-02 12:08 수정 2020-05-03 04:27
추운 겨울이 되면 유독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 있습니다. 이름난 인사가 보육원을 찾아 온정을 베푸는 모습이지요. 우리 주위엔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보육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그러한 경우입니다. 해마다 8천여 명의 아이들이 사회적 보호가 더욱 필요한 ‘요보호 아동’으로 분류됩니다. 부모의 사망뿐 아니라 이혼·학대·방임·빈곤 같은 문제가 아이들을 가정 밖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가정이 아닌 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3만 명이 넘습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보육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2012년 말 기준으로 1만5천여 명은 아동복지시설에서, 1만4천여 명은 조부모나 친·인척, 일반인 위탁가정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리 보호자가 5~7명을 양육하는 공동생활가정(그룹홈)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2400여 명입니다. 아동복지법상 요보호 아동 기준은 만 18살 미만입니다. 그러니까 만 18살이 넘으면 더 이상 ‘보호’ 대상자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대학 진학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경우, 만 18살이 넘은 아이들은 어른이 돼야 합니다. 해마다 2천 명가량의 아이들이 시설 밖으로 나옵니다. 고용의 질은 악화되고 사회안전망마저 부실한 현실에서, 부모라는 방패막 없이 어른이 된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_편집자
지난 12월23일, 요보호 아동인 18살 희현(가명)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생활가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정용일

지난 12월23일, 요보호 아동인 18살 희현(가명)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생활가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정용일

대학 생활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오는 2월 전북 군산에 위치한 국립대를 졸업하는 스물여섯 고승민(가명·남)씨 이야기다. 1996년, 9살 승민은 3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전남에 위치한 한 보육원에 들어갔다. 기억 속 가족은 아버지뿐이다. 자주 술을 찾았던 아버지는, 헛것을 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보다 못한 동네 어르신이 형제를 시설에 맡겼다. 보육원 생활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엔 군대 못지않은 단체 생활이었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형들에게 맞기도 일쑤였다.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해 뛰쳐나간 아이도 있었다. 승민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시설을 나가면 정말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싸움박질을 일삼았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달리 먹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 덕분이었다. 교과서도 갖고 있지 않던 그에게 책을 쥐어주었다. 어른들의 말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던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누군가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희망을 갖기도 하고, 평생 상처가 되기도 해요.”

629명 중 167명 월소득 55만원 미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직업훈련 중이거나 학업이 계속될 경우 ‘보호’ 기간 연장이 가능했다. 통학이 불가능한 거리였지만,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돈을 아낄 수 있었다. 한국장학재단에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은 연간 최대 450만원이었다. 그러나 승민이네 학교의 연간 등록금은 560만원이었다. 부족한 금액은 스스로 메워야 했다. 수업료 외 실습비도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기숙사 통금 시간이 걸림돌이 됐다. 기숙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매달 20만~30만원의 주거비 마련도 그의 몫이 됐다. 학기 중 그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하루 2~3시간만 눈을 붙였다. 학점을 어느 정도 유지해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승민씨는 만 25살이 되면서 더 이상 ‘보호’ 기간을 연장할 수 없었다.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기초생활보장수급(이하 수급) 자격도 유지할 수 없었다. 전자제품 디자이너는 힘든 생활에 버팀목이 된 그의 꿈이다.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여건도 아닌데다, 지방대 출신이라 험난한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다. “보호 기간이 끝나고 사회에 정착할 때까지, 수급 자격이 유지되면 좋을 것 같아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시기라 지출은 많은데 수입이 없다보니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기 어렵거든요.”

가정 해체와 아동 방임은 빈곤 문제와 연관이 깊다. 가정 밖으로 밀려난 아이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고 미래를 꿈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건복지부와 아동자립지원사업단이 2012년 아동양육시설에서 퇴소한 아동 65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629명 가운데 167명(26.6%)이 자신의 월소득이 55만원 미만이라고 답했다. 응답자 640명 중 157명(24.5%)은 월세방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만 24살까지 머물 수 있는 일시보호시설인 자립생활관에서 생활한다는 이들은 119명(18.6%)이었으며, 정부의 전세자금 지원을 받아 생활하는 경우는 105명(16.4%)이었다.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마저 힘겨운 이들이 많다는 지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일자리는 구하지 못한 채 사회로 나간 이들은 응답자 636명 중 99명(15.6%)이었다. 승민씨처럼 대학 재학 중에 보호 기간이 끝난 이들은 146명(22.3%), 대학 졸업 뒤 시설에서 퇴소한 이들은 150명(22.9%)이었다.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공동생활가정 생활교사인 천지영(27)씨는 “고교 졸업 뒤 취업을 하면 수급이 끊긴다. 그런데 탄탄한 직장을 얻어 꾸준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저임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아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설명했다.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스물셋 김선희(가명·여)씨는 열여덟 되던 해 취업을 했다. 빨리 보육원을 떠나 혼자 살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고교 재학 시절 경북 구미에 위치한 공장에서 하드디스크 만드는 일을 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일은 훨씬 고됐다. 첫 직장 생활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고민 끝에 경북 안동에 위치한 2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한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니가 있는 대구로 건너갔다.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패스트푸드 매장 매니저로 3년간 일했다. 일주일 중 6일, 하루 8시간을 꼬박 일하고 한 달에 140만원을 받았다. 그즈음 시설에서 퇴소했다. 보호 기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전국 10여 곳에 불과한 자립생활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거비를 아낄 수 있었다. 올해 그는 대구에 위치한 2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미혼모를 돕고 싶다는 희망도 생겼다.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은행 이용법도 모르겠더라고요. 시설에 있을 때 요리를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2년 뒤 선희씨는 다시 자립생활관에서 나와야 한다.

부산 부경대 화학공학과 3학년인 조수동(21·남)씨는 얼마 전 제주도 졸업 여행을 포기했다. 40만원 정도의 비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4살 위 형과 경북 지역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다. 부산으로 향할 당시 그의 주머니엔 200만원가량의 돈이 있었다. 2007년부터 시행된 디딤씨앗통장(매월 일정 금액을 저축하면 국가가 월 3만원 한도로 동일 금액을 지원) 저축액과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이었다. 그리고 3년 뒤, 600만원의 빚이 생겼다. 학자금과 생활비 명목으로 대출을 받았다. 교내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지만 자취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엔 늘 벅차다. 대학 생활 1년을 남겨두고 휴학할 생각이다. 레크리에이션 분야로 진로를 바꿀 것이다. 자격증 공부도 하고, 여행도 떠나고 싶다.

가정 밖으로 밀려난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정서적 안정감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홀로서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선희씨에게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박은미 서울장신대 교수(사회복지학)가 2013년 8월 가정위탁 대상자와 공동생활가정에서 살고 있는 중고생 353명을 조사한 결과, 걱정거리를 주로 털어놓는 상대는 친구(응답자 334명 중 31.5%)였다. 아무에게도 걱정거리를 털어놓지 못한다는 아이들은 65명(19.5%)이었다.

“대학을 가고 싶은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요.” 경남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인 김정환(22·남)씨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는 아동자립지원사업단이 2011년부터 운영하는 ‘바람개비 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다. 후배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일이다.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돈 문제로 자주 다투던 부모님이 연달아 집을 나갔다. 집에는 그와 3살 터울의 남동생만 덩그러니 남았다. 하루아침에 소년 가장이 된 것이다.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을 정리해서 밀린 월세를 내고 남는 돈으로 작은 방을 구했다. 전입신고를 하러 간 동사무소에 그의 사정이 알려지면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다. 고교에 진학한 뒤, 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렸다. 동생은 마음을 잡지 못했다. 고교 2학년 무렵 걷잡을 수 없는 우울감에 시달렸다. “금전적 어려움이 가장 크지만, 시설을 나가도 정서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636명 중 84명만 부모·형제와 살아

경기도 안산에서 만난 열여덟 희현(가명·여)이는 웃음 많은 소녀였다. 올해 고교 3학년이었지만, 수능을 치르지 않았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는 싫지만 교복 입은 건 부러웠어요. 나중에 교복 입고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데 끼워줄지 모르겠어요.” 올겨울이 지나면 ‘집’이라고 부르던 공동생활가정을 나와야 한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아버지와 살게 됐다. 방황이 시작된 건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렀다. 혼자 있고 싶어,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결석이 잦다보니, 공부는 더욱 어려워졌다. 고교 1학년 때 집을 나왔다. 친구 집과 거리를 전전하다가 공동생활가정에 들어왔다. 그 역시 앞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일단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한다. 일자리도 필요하다고 했다. 희현이가 공동생활가정을 나서면, 경기도로부터 자립정착금 500만원을 받게 된다. 홀로 살 방과 살림 도구를 마련하기에 충분한 돈은 아니다. 그나마 새 가정을 일군 친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게 돼 한숨 돌린 상태다. 보건복지부와 아동자립지원사업단의 2012년 조사를 보면, 시설을 나간 뒤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는 응답자 636명 중 84명(13.2%)에 불과했다. 266명(41.8%)은 혼자 산다고 답했다. “네가 겪었던 문제로 고민하는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관심요.” 진지한 이야기는 싫다던 아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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