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월14일 새벽, 치안본부(현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로 연행된 박종철은 수차례의 물고문 끝에 숨진다. 청와대·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검찰·경찰 등 국가기관은 그의 죽음을 조직적으로 ‘축소·은폐’했다. 22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밝혀낸 진실이다. 그해 3월22일에 또 하나의 죽음이 있었다. 이름 석 자만 겨우 남아 있는 김계원. 그는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 ‘부산 형제복지원’ 수용자였다. 울산 울주군 야산을 개간하기 위해 축사에 갇혀 하루 10시간 넘게 부림을 당하다, 경비원들의 ‘뭇매’를 맞고 숨졌다. 타살은 ‘신부전증으로 인한 사망’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26년이 흘렀다.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아직 단 한 번도 규명되지 않았다.
1975~87년 숨진 사람만 무려 513명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 정권은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이 돼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청소해야 마땅한 잠재적 범죄자’로 보았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시설에 감금했다. 김계원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죽어나간 사람 역시 한둘이 아니었다.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맺고 ‘부랑인’을 수용하기 시작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형제복지원에서 숨진 사람은 무려 513명이었다. 시설이 자체적으로 집계한 수가 이 정도다. 복지원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은 그곳에 대해, 인권유린·성폭행·강제노역 등이 횡행한 ‘생지옥’이라고 증언했다. 굶거나 맞아 죽은 수많은 죽음들은 ‘병사’로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 주검은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는 폭로도 있었다. 국가 정책의 야만성은 사회복지법인의 탐욕마저 묵인했다. 박종철의 죽음으로 위기에 몰렸던 권력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축소·은폐’했다. 박인근 일가는 26년 동안 굳건히, 사회복지법인을 운영 중이다.
말쑥한 정장 차림에 금테 안경을 쓴 남자. 지난 10월23일 서울 강북구청 인근에서 만난 김수철(44·가명)씨는 또래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친형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 2년 남짓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단 사실이다. 어떻게든 잊고 싶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다. 국가가 수용자들에게 덧씌운 ‘사회악’이라는 낙인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통용됐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소년은 제주도에서 자랐다. 14살 무렵, 큰형님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건너갔다. 형님 집에 머물던 어느 날, 부산역으로 놀러간 것이 화근이었다.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소년을 불렀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부터 행색이 초라한 노숙인까지 10여 명의 어른과 함께 버스에 태워졌다. 형제복지원으로 향하는 차였다.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 중턱에 자리잡은 요새 같은 곳이었다. 소년은 큰형님네 주소와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했다. 제주도 집주소를 누군가에게 말했지만 가족을 만날 순 없었다. 복지원 생활은 짐승과도 같은 삶이었다. 수용자들 위로 조장-서무-소대장-중대장으로 서열 체계가 짜여 있었다. 서열의 정점엔 박인근 원장이 있었다. 이렇게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 또한 수용자였다. 완장을 찬 수용자들은 잔혹했다. 언제든 완장을 박탈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로부터 자유를 강탈당한 사람들은, 이렇게 인간성마저 잃어야 했다. 매일같이 아무 이유 없이 맞았다. 장시간 물구나무 서기 기합을 받다 동공 막이 벗겨졌지만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했다. 구타를 당해 픽픽 쓰러지던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성 간 성폭행도 잦았다. 그 역시 피해자였다. 복지원 안에는 3천여 명의 수용자가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새마음 교회’가 있었다. 끊임없이 맞아가며, 하느님의 말씀을 달달 외워야 했다.
14살 소년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유신의 공포정치가 절정이던 1975년 12월,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사무처리 지침)가 제정됐다. 업무 지침만으로 이른바 ‘부랑인’들에 대한 강제 구금이 시작됐다. 국가가 정의한 ‘부랑인’이란 “일정한 거주 없이 관광업소·역·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껌팔이·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사람들”이었다. 1987년 2월에 작성된 신민당의 형제복지원 진상조사 1차 보고서를 보면, 경찰은 부랑인 단속 건수에 따라 근무 평점을 받았다. 구류를 시키면 2~3점이었지만, 부랑아를 복지원에 입소시키면 5점이 주어졌다. 1986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3975명 가운데 경찰이 의뢰한 수용자는 3117명, 구청에서 의뢰한 수용자는 253명이었다. 이렇게 채워진 머릿수만큼 복지원은 ‘국고보조금’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막무가내로 구금이 이루어졌다.
부랑인 단속 건수로 평점 받은 경찰1987년 2월3일치 엔 형제복지원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폭로가 보도된다. 양아무개(당시 26살)씨는 경찰관으로 일하는 부산 형님 집에 가던 중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기 위해 부산역 앞 지하도로에 갔다가 복지원으로 끌려갔다. 서울에 사는 서아무개(당시 32살)씨는 고교 졸업 뒤, 무전여행 중에 부산역 앞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 구금의 이유가 됐다. 복지원으로 향할 당시, 성인이던 이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1986년 어느 날, 김수철씨는 열댓 명 무리에 섞여 5m가 넘는 복지원 담을 넘었다. 누군가가 미리 사다리를 놔둔 모양이었다. 복지원 마크가 선명한 옷을 입은 채 도망쳤다. 경비원들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곤 겁에 질려 덤불 속에서 5~6시간을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우연히 찾은 철길을 따라 어두운 삶의 터널로 들어섰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소년은 구두닦이, 중국집 종업원으로 떠돌았다. 집을 찾아달라며 경찰서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복지원으로 보내질 것이 뻔했다. 가족을 다시 만난 건 18살이 되던 해였다. 어느덧 소년은 제 삶을 책임져야 하는 성인의 문턱에 섰다. 19살 땐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대어 교도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지만 불행은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변변한 직장을 갖기는 쉽지 않았다. 10여 년 전, 아내와도 헤어졌다. “생각해보면, 형제복지원에 갇힌 게 어처구니가 없어요. 형님 집에 있었더라면 기술이라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요.” 험난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그는 내내 차분했다. 복지원에서 생활한 이후, 제 주장을 펴지 못한다고 했다. 일상화된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흉터를 남겼다.
현재는 박인근 원장 아들이 대표뉴스는 보지만, 선거엔 참여하기 싫었다고 했다. 나와는 무관한 세상이었다. 그러던 그가 올여름, 형제복지원을 다시 떠올린 건 또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38)씨의 용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던 한씨에게 다가갔다. 1984년 12살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9살 소년의 이야기는 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뒤이어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등 여러 단체들을 중심으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이 꾸려졌다. 이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사건 관련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 향후, 정부의 사건 진상 규명과 사과를 촉구할 계획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유명한 일이었다. 2000년대에 미흡하나마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실은 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일까. “1987년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구속 기소되면서 개인적 비리·횡령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부랑인이나 걸인 등은 ‘수용돼야 하지 않느냐’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깔려 있어, 이 사건 자체를 국가 차원의 인권침해 범죄라고 보질 못한 것이다. 더구나 1987년은 격변기였던지라 빠르게 노출됐지만, 빠르게 감춰져버린 사건이다.” 의 저자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분석이다. 피해 당사자인 수철씨조차 자신이 겪은 험한 일이 ‘범죄’라고 여기지 못했다고 털어났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국가권력과 시민사회로부터 이중으로 배제된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김계원이 죽음에 이르기 두 달 전, 1987년 1월 당시 부산중앙지검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박인근 원장을 업무상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 부산시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원장 구속되면 안 됩니다. 빨리 석방해야 합니다.” 상부에선 수사 축소를 종용했다. 박 원장은 7차례의 재판 끝에 2년6개월형을 받고 1989년에 석방된다. 대법원은 두 번에 걸쳐 그가 ‘불법’ 감금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박 원장은 옥중에 있었지만, 부산시는 법인을 살려두었다. 몇 차례 간판만 바뀐 뒤 현재의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됐다. 박 원장은 2011년까지 해당 법인 이사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아들 박천광(38)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서민들의 서러운 돈이 이 법인으로 흘러든 정황도 포착됐다. 2005년 법인은 수익사업부 증축 공사비 명목으로 ‘부산상호저축은행’에서 장기 차입을 시작해 2009년까지 118억원을 대출받았다. 지난해 부산시는 차입금과 관련해 특별점검을 실시했다. 118억원에 대한 입출금 내역이 명확하게 관리되지 않고, 40여억원은 사용 용도조차 불분명했다. 별도의 회계감사조차 받지 않았다.
진상 규명 위한 특별법 등 필요“국가가 사과를 했으면 좋겠어요.” 김수철씨의 소박한 바람은,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등 제도가 마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2013년 10월25일 현재, 용기를 내 대책위 준비모임 쪽으로 연락을 해 온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실종자 가족을 포함해 31명이다. “형제복지원 이야기 많이 좀 써주세요. 기사화되면 또 다른 피해자들도 나올 것 같아요.” 발걸음을 옮기던 김수철씨의 당부였다. 26년 동안 숨죽여 살아온 사람들의 고통을 또다시 외면할 것인가. 1987년 그때처럼, 갈림길에 서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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