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용제(탄소를 함유한 유기화합물로 잉크 등을 제조하기 위한 중간 재료나 기름 때 지우는 용도로 사용)를 오래 쓰다가, 이렇 게 파킨슨병에 걸린 경우가 있어요.”
“저도 그럴 수 있겠네요.”
“모든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큰 문제지만, 사람마다 감수성이 다 달라요. 인쇄 작업을 하실 땐 문은 열어놓고 장갑도 반드시 끼시 고요.”
“장갑을 껴야 해요?”
“유기용제는 휘발이 워낙 잘돼 피부로도 흡수될 수 있어요. 피부에 닿으면 시원한 느 낌이 있잖아요? 그냥 장갑 말고 고무 코팅된 공업용 장갑을 쓰셔야 해요.”
“세척제가 무슨 성분인지 몰라요”지난 7월17일 오전, 인쇄소가 몰려 있는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에 위치한 ㅈ사에서 일 하는 인쇄공 김상호(51·가명)씨가 정연희 노 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의 조언에 쓴웃음 을 지었다. 3평 남짓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전단지와 책 표지 등을 인쇄하는 그는 경력 30년의 베테랑이다. 이날 정 연구원은 지난 6월13일 실시한 김씨의 작업환경 모니터링 결과를 일러주었다. 당시 오전 9시부터 오 후 6시께까지 약 9시간 동안 김씨의 작업 공 간에 머물렀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 지 면밀하게 관찰하기 위해서다. 작업 시간 에 공기 중 톨루엔의 평균 농도는 16.44ppm 이었다. 고용노동부의 톨루엔 하루 8시간 평 균 노출 기준(TWA)인 35ppm보다는 낮았 지만, 미국 산업위생전문가협의회(ACGIH) 기준인 14ppm보다 높았다. 작업시 공기 중 톨루엔 농도가 40ppm을 훌쩍 넘은 건 세 번이었다. 작업량이 적었던 날임을 감안하 면 톨루엔 농도는 평소 이보다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톨루엔에 과하게 노출되면 혈액· 폐·간·신경계·골수 등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인쇄기는 멈춰 있고 환풍기가 빠르게 돌 아가고 있었지만, 작업장에선 탁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여기는 깨끗한 편이에요. 지 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앞서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서울 성수동 과 을지로에 있는 22개 인쇄업체와 성수동에 있는 1개 제화업체에서 세척제·접착제 등 51 건의 시료를 수거해 성분을 분석했다. 이 가 운데 33개 제품에는 톨루엔이 평균 58.2% 섞여 있었다. 톨루엔 성분 100% 제품을 사용 하는 곳도 있었다. 51개 제품 중 37개 제품에 서 발암성 물질인 벤젠이, 22개 제품에서 노 말헥산이 검출됐다. 정 연구원은 “작업환경 의 유해성을 알려면 공기 중 농도를 측정하 는 현장조사가 필요한데, 업체들이 이를 꺼 려 정확한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며 “톨루엔 함량 비율이 높은 제품을 사용할 때 노출 기 준을 초과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설문조사 대상 노동자 62명 가운데 방 진마스크 등 호흡보호구나 장갑 등을 전혀 착용하지 않는 이는 21명이나 됐다. 환기 장 치가 없는 곳은 23개 업체 중 6곳이었다.
김상호씨가 사용하는 인쇄기는 ‘오프셋’ 방식이다. 잉크를 블랭킷(고무 재질의 롤러)에 옮겨 다시 종이에 옮기는 간접 인쇄를 한다. 깨끗하고 선명한 색을 내려면 기계나 블랭킷에 묻은 잉크를 자주 닦아줘야 한다. 하루 평균 10번 이상 이런 세척 작업을 한다. 김씨는 자신이 사용하는 세척제를 ‘벤졸’이라고 불렀다. 성분 분석 결과, ‘벤졸’이 아니었다. 대신 톨루엔이 90% 넘게 함유돼 있었다. 액체가 담긴 통에는 ‘톨루엔’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지 않았다. 유해물질이라고 표시돼 있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혹은 얼마나 해로운지 등도 알 길이 없었다.
인쇄소 내 유해물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음은 다른 업체에서도 확인됐다. 23개 업체에서 수거한 51개 제품 중에는 제조사와 제품명이 똑같았지만 톨루엔 함유량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제조사 확인이 가능한 제품은 16개(31%)에 불과했다. “우리로서는 세척제에 무슨 성분이 있는지,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예 생산 단계에서부터 안전한 세척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현재순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산업용 세척제에 대해서도 유기용제 함유량 기준 등을 마련하고, 규격화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쇄공의 유기용제 노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톨루엔·벤젠 등 유기용제 노출로 인해 파킨슨병·재생불량성빈혈 등 산업재해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럼에도 작업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7살 때부터 27년 동안 인쇄일을 한 최아무개(44)씨는 “인쇄업 선배가 5~6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때도 아이 건강에 매우 신경이 쓰였다”고 말했다.
인쇄 작업소의 열악한 환경을 방치해둔 사이 최근 일본에서는 인쇄노동자 집단 산재 사건이 발생했다. 오사카 지역 인쇄소에서 일하던 노동자 70명 가운데 17명이 담관암에 걸린 것이다. 이미 7명은 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이 하는 작업은 한국의 인쇄공이 하는 일과 유사하다. 간에서 만들어지는 담즙을 십이지장으로 보내는 관인 담관에 생기는 암인 담관암은 조기 진단이 어렵고 생존율이 30%에 불과하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올해 초 이들의 질환에 대해 산재 판정을 내렸다. 보통 담관암 사망자는 노인이지만, 집단 발병 피해자는 주로 20~40대였다. 회사가 환기를 적절하게 하지 않고, 유해물질 노출을 예방하기 위한 보호장비를 지급하지 않은 점도 산재 판단의 근거였다. 이번 산재의 원인 물질은 세척 작업에 사용된 염소계 유기용제 디클로로메탄과 1.2-디클로로프로판이었다. 문제의 유기용제는 최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조사에서는 검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환경부 유통량 조사 자료를 보면, 디클로로메탄은 1998년 인쇄·신발 등 22개 업종 216개 사업장에서 세척제·희석제 용도로 쓰인 흔적이 있다. 1.2-디클로로프로판 역시 2006년 9개 업종 25개 사업장에서 사용됐다. 이런 사업장을 거쳐간 이들은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까.
절반가량 10명 미만 영세 사업장김상호씨는 바쁘게 돌아가는 작업장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처럼 장갑을 끼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고 했다. 평소 간이 좋지 않다는 그는, 인쇄업 경기가 나빠지면서 건강을 돌볼 여력이 더욱 없어졌다. 50명 이하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 산재 발생률은 300명 이상 사업장보다 3배 이상 높다. 인쇄업체의 절반가량은 10명 미만의 영세 사업장이다. 업체와 노동자가 스스로 근무환경을 바꾸기란 사실상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본에서 담관암 발병 인쇄공들을 상담한 간사이노동자안전센터 가타오카 아키히코 사무국장은 7월 초 서울 국회의정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여해 이런 조언을 남겼다. “한국 인쇄업계에서 제2의 집단 산재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환경에 대한 실태 파악에 나서야 한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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