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한마디는 강력한 신호가 됐다. 지난 4월 중순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핵심 대선 공약인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에 제동 을 걸었다. 취임 두 달도 채 안 됐을 때다. 여 야가 한창 논의 중이던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법안에 대해 “(내) 공약 내용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정 철학인 경제민주화 실현에 앞장서던 새 누리당과 정부 안에서는 금세 속도조절론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뒤 처음 열린 6월 임시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된 것은 이미 그때 예견됐다.
실효성 기대하기 어려운 종이호랑이박 대통령이 과도한 경제민주화 사례로 지목했던 일감 몰아주기 규제법(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6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7월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는 했다. 이번 개정안은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부를 불려온 재벌의 관행을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정안은 이에 대한 규제 조항을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 법)의 ‘5항’(불공정거래 행위 금지)에 신설했다. 또 계열사간 부당 지원의 위법성 여부를 따지는 요건을 ‘현저히 유리한 조건’에서 ‘상 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완화했고, 지원한 주체뿐 아니라 혜택을 받은 객체도 함께 제재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번 개정안은 당초 공정거래위원회나 새누리당 경제민주 화실천모임 소속 의원들이 추진하던 방안에서 대폭 뒷걸음질친 것이다. 처음엔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에 대한 규제 조항이 ‘3장’(경 제력 집중 억제)에 새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3장’이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불공정거래 행위를 금지하는 공정거래법 5장은 기업이 ‘공정한 시장 경쟁을 저해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는 단서(경쟁제한성 입증)가 붙어 있지만 3장은 그런 제한이 없어 상대적으로 처벌이 쉬운 까닭이다. 그러나 재계의 반발에 결국 새누리당이 한발 물러섰다.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에 관한 규제 조항을 재계의 요구대로 5장에 집어넣되 관련 조항에 대해선 ‘공정한 시장경쟁 제한’이라는 전제를 삭제하면, 공정위가 재벌의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 경쟁제한성을 입증하지 않고도 제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후퇴한 개정안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판례는 5장이 규정한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선 예외없이 경쟁제한성 요건 적용을 따져온 만큼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 관행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반박하고 있다.
게다가 규제 대상도 ‘모든 계열사’에서 ‘총수 일가가 일정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로 축소됐다. 대기업이 총수 지분을 일정 비율로 낮추거나 간접적 지분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감 몰아주기를 하면 얼마든지 제재를 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기업이 효율성 증대, 보안성, 긴급성 등의 거래 목적을 주장 할 때는 합법적인 일감 몰아주기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논평을 통해 “사실상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어쨌든 여야의 합의로 가결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법안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상임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안된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수두룩하다. 대부분 어떤식으로든지 재벌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법안들이다. 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자 시절부터 강조해온 재벌의 신규 순환출자 금지(공정거래법 개정안)가 대표적이다. 재벌 총수 일가가 극소수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근간인 기존의 순환출자는 건들지 않되 최소한 새로 순환출자를 하지 못하게 하자는 데는 여야 간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재계가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면 대주주의 안정적 경영이 어려워져 헐값에 외국 투기자본에 매각될 수도 있다”고 ‘협박’하면서 관련 법은 정무위원회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현재 은행·저축은행에 시행되고 있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보험·증권 등 다른 금융업권으로도 확대하기로 한 법안(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정무위에 발목이 잡혔다. 이 개정안은 제2금융권에 대해서도 금융 당국이 대주주의 적격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부적격 판정을 받는 대주주에 대해서는 보유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제한하거나 지분을 매각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제2금융권 대주주의 친·인척(주주인 특수관계인)이 법령을 위반해 처벌받으면 대주주에게 주식을 처분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금융 연좌제’”라는 재계의 반대 프레임에 갇힌 정무위는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재벌 총수의 경제범죄 엄단’을 현실화하는 법안들도 입법이 정지된 상태다. 재벌 총수의 중대 범죄에 대해선 집행유예를 불가능하게 하고(특정경제가중처벌법 개정안), 형이 확정된 뒤에는 대통령이 사면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사면법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나란히 계류중이다.
6월 임시국회에서 큰 진통 없이 처리된 경제민주화 법안이 더러 있기는 하다. 금산분리를 위해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9%에서 4%로 낮추는 은행법·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편의점주 등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가맹사업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일명 프랜차이즈법)도 의결됐다. 개정안은 가맹본부가 신규 가맹점을 모집할 때 예상 매출액을 제시하는 한편, 심야영업을 강제하거나 점포의 리뉴얼 비용 부담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기업의 공정거래법 위반 사안에 대해 현재 검찰만 가진 고발 요청 권한을 감사원·조달청·중소기업청으로 확대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도 통과됐다.
여야는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등 첨예한 쟁점이 부딪치는 상황에서도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에 나름의 성과를 냈다고 후하게 평가하는 분위기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7월3일 “역대 임시회 중 가장 많은 법안이 처리된 국회다. 이것은 여야 모두 창조경제,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과 민생경제 활성화, 정치 쇄신 실천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에 최선을 다해준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정성호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도 같은 날 “최소한 대통령 공약, 정부에서 발표한 민생 대책 관련 법안조차도 여당이 미온적이었다. 그런 악조건하에서도 민주당 의원님들이 최선을 다했고 상당 부분 성과를 거뒀다고 본다”고 말했다.
요란한 빈 수레가 될 가능성 높아그러나 국회 바깥의 시선은 싸늘하다. 다음 회기인 9월 정기국회에선 국정감사와 내년 예산안 심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만큼 이번 6월 임시국회에서 주요 경제민주화 법안들이 처리됐어야 하는데도, 까다로운 숙제가 줄줄이 남겨진 까닭이다. 야당이 7월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하고는 있지만 새누리당의 반대가 심해 개회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장흥배 간사의 지적이다. “경제민주화 법안은 재벌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통령이 정권 초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개혁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처리된 저조한 법안 건수나 후퇴한 내용을 보면 이미 박근혜 정부에서의 경제민주화 실현은 판가름 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 약속은 요란한 빈 수레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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