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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진료권 개선, 여전히 동작 그만?

군인권센터 사병들 군 진료권 인식 설문조사 결과 발표… 제대 뒤 사망한 노충국씨 사건 이후 군 의료체계 나아지지 않아
등록 2013-05-26 18:20 수정 2020-05-03 04:27

“봄비가 하루 종일 주룩주룩 내렸다. 봄의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놈의 복통은 언제나 나으려나. 태어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아픈 적이 없었는데. 휴가 가서 푹 쉬면 좀 나으려나. 5월인데 날씨가 벌써 덥다. 밖에는 여름 패션이 유행일 것 같던데, 반팔티 입고 다녀야지.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 제발 건강하자.”

국군의무사령부가 있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국군수도병원의 모습. 한겨레 신소영 기자

국군의무사령부가 있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국군수도병원의 모습. 한겨레 신소영 기자

응답자의 27.2% ‘진료 요청 포기’

2005년 5월6일, 전역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던 육군탄약사령부의 노충국(당시 28살) 병장은 이날 수양록(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손꼽아 기다리던 전역의 기쁨은 너무 짧았다. 그는 전역 보름 만에 서울의 한 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제대 전 배가 아파서 찾아간 국군광주통합병원에서 군의관은 그저 위궤양이라고 했을 뿐이다. 갑작스럽게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노씨는 여름을 갓 넘기며 짧은 투병을 하다 그해 10월 숨을 거뒀다.

당시 노씨의 충격적인 죽음은 군 의료체계 문제에 불씨를 댕겼다. 언론을 통해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국방부는 뒤늦게 군 의료기관의 진료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조사 과정에서 담당 군의관이 노씨 사건으로 파문이 일어나자 진료기록을 조작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한 ‘노충국씨 사건 진상규명 및 군대 내 의료접근권 보장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당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국정조사장에서 고개를 떨구며 사과를 구해야 했다. 그 뒤 국군의무사령부는 ‘국방의무발전 추진계획’을 발표해 군 의료시설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사병 등을 대상으로 군대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벌였다.

‘노충국씨 사망 사건’이 일어난 지 어느덧 8년. 여전히 사병들은 군대 내 의료체계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듯하다. 2005년 현역 사병 18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인권위의 군대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군인권센터가 7년이 지난지난해 11월 현역 사병 305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그렇다. 군인권센터는 서울역·용산역·동서울터미널에 휴가를 나온 육군 소속 사병과 일부 부대의 협조를 얻어 직접 설문지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군인권센터는 5월20일 ‘2012 연례보고서’와 이 조사 결과를 함께 발표한다.

41.1% 진료·처방·치료 부적절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노씨 사망 뒤 국방부가 개선을 약속한 군대 내 진료 접근성 개선, 군 의료체계의 신뢰성 회복 등이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병이 군대 안에서 아프다는 의사를 제대로 표시하고 있는지를 묻는 대목이다. 전체 응답자의 27.2%가 ‘진료 요청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는데, 이는 같은 질문을 한 7년 전 인권위의 조사 때보다 5.7%포인트 상승한 수치였다. 왜 진료 요청을 포기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선임병의 눈치가 보여서’(32.6%), ‘꾀병 취급을 하기 때문에’(30.2%), ‘군 진료에 대한 불신’(19.4%) 순서로 많았다. 군 진료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답변은 예전 인권위 조사 때보다는 낮아졌지만, 주변 환경 탓에 진료권을 내세우지 못하는 상황은 여전했다.

군대 내 의료체계에서 억압적인 계급문화뿐만 아니라, 대학병원 수련의 과정을 거쳐 단기복무를 하는 군의관을 중심으로 의료체계를 꾸리는 점도 구조적인 문제로 꼽힌다. 민간 병원보다 임상 경험이 부족한 군의관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의료 불신이 싹튼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대 안에서 진료·처방·치료가 신속하고 적절하게 이뤄졌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1.1%는 ‘적절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7년 전 조사 때보다 13.8%포인트 늘어난 결과다. ‘진료·처방·치료가 정확하지 않았다’(오진)는 답변이 40%로 가장 많았고, ‘처방해준 약의 품질이나 치료의 질이 낮았다’(31.4%),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다’(17.1%), ‘군의관이 아닌 의무병이 진료·처방을 내려주는 등 전문성에 문제가 있다’(11.4%)는 답변도 많았다.

군인권센터는 외부 진료를 제때 받지 못해 사망하는 이른바 ‘제2의 노충국 사건’이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부 진료의 중요성은 최근 몇 년 사이 군인권센터에 접수된 군대 내 사망사고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2011년 1월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이아무개씨는 행군 훈련을 받은 뒤 고열에 시달려 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감기라는 진단을 받고 해열제 처방을 받았다. 그러나 8시간이 지나서 증세가 심해진 뒤에야 이씨는 부대와 가까운 민간 대학병원으로 후송됐다. 민간 대학병원에서 감기가 아닌 폐부종과 패혈증 진단을 받은 이씨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음날 사망했다.

같은 해 4월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노아무개씨의 사례도 비슷하다. 노씨는 행군 훈련 뒤 고열 때문에 새벽에 의무실을 찾았지만, 군의관이 없어 의무병에게 타이레놀을 처방받았다. 그 뒤 진료 시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군 병원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한 노씨는 그날 오후 뒤늦게 민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수막염 치료를 받지 못하고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962호 초점

962호 초점

민간 병원서 진료받을 권리

일반적으로 사병들은 병의 위중함에 따라 ‘각 부대의 의무실 → 군 통합병원 → 민간 대학병원’ 순서로 의료기관을 옮기게 되는데, 이 체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 시설을 벗어나 민간 병원 등 외부 진료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서도 응답자 10명 가운데 2명이 ‘외부 진료의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인권위 조사 때(각각 49.7%, 14.4%)보다 나빠진 수치다. 이에 대해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모든 군인은 언제 어디서나 민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권리를 제한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군은 전방의 야전병원을 강화해 병사들과 주민의 의료를 책임지고, 민간 병원은 군인을 우선적으로 진료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군대 내 진료권 개선 문제는 여전히 ‘동작 그만’ 상태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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