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천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이양하, )
한국과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 ‘푸름’(靑)은 계절로 따지면 봄에 상응하며, 사물의 초기를 뜻한다. ‘청춘’이나 ‘청년’이란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젊은 층을 가리키는 말로 두루 쓰인다. 그러나 청년이 구체적으로 몇 살부터 몇 살까지냐에 대해선 의견 일치를 못 보고 있다. 저마다 청년임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선 다툼까지 벌어진다.
#1. 서울의 한 사립대 법학과를 졸업한 ㄱ(31)씨는 최근 ‘멘붕’에 빠졌다. ㄱ씨는 사법고시에 네 차례 떨어진 뒤 지난해 10월부터 공기업 취업 준비에 몰두했다. 나이는 많고 ‘스펙’은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공기업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그러던 지난 4월30일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16년까지 해마다 모든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이 정원의 3%를 만 15~29살 지원자 가운데 의무적으로 뽑게 된 것이다. 그는 이미 만 29살을 넘었다. 군 복무 2년을 감안해준다고 해도 남은 시간은 1년가량이다. 그는 “공기업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3·1절’(31살까지 취업 못하면 ‘절단’ 난다)이라는 자조의 말이 나올 정도로 공포감이 심하다. 30대도 20대만큼이나 취업이 절박하다. 우리를 우대해달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20대와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달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2. 지난해 1월 민주통합당(현 민주당)은 만 25~35살 남녀를 대상으로 ‘청년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모집했다. 4·11 총선을 앞두고 경연을 통해 만 25~30살 남녀 각 1명씩, 만 31~35살 남녀 각 1명씩 모두 4명을 뽑아 비례대표 순번을 주기로 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당내에서 분란이 벌어졌다. 이 연령대를 벗어났으나 ‘청년’을 자처하는 만 36~39살의 반발이었다. ‘민주당 청년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 절차 수정을 촉구하는 70년대생 국민·당원모임’이란 단체가 꾸려졌다. 대표로 나선 36살짜리 보좌관은 청년 비례대표 선정 절차 중지를 요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그는 “35살을 기준으로 30대를 둘로 쪼개는 것은 어디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36~39살의 국민은 후보를 낼 자격조차 갖지 못해 헌법상 대의제 원리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당헌상 20~45살을 청년으로 보아온데다, 현직 청년위원장도 만 46살”이라는 근거도 제시했다. 그러나 법원은 “정당이 자율로 결정할 사항”이라며 기각했다.
‘청년’ 규정이 각종 혜택을 받기 위한 절차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이런 다툼은 불가피하다. 애초부터 청년의 연령대는 정하기 나름일 뿐 통일된 기준이 없다. 정부의 청년 지원 정책은 청년고용촉진법이 정한 테두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정책 성격에 따라 청년의 나이가 늘거나 줄기도 한다. 특히 창업 지원 정책에선 한층 유연하다.(표 참조)
인원수 못 채워 연령 조정하기도정해진 인원수를 채우지 못해 연령대를 조정하는 일도 종종 있다. 예컨대 만 29살까지의 청년 1만 명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을 하기로 했다가 미달 사태가 빚어지면 연령 제한을 만 30살, 만 31살까지로 차례로 늘려서 추가 확충하는 식이다.
청년의 나이는 막연히 ‘젊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뿐, 사회적 합의도 사실상 없다. 청년단체를 표방하는 모임들마저 정의는 제각각이다. 청년세대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의 조합원은 만 15~39살로,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이 청년으로 규정하는 범위(만 15~29살)보다 넓다. 한지혜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취업과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진 점 등을 감안해 불안한 노동시장에 내몰린 30대도 청년 조합원으로 보기로 정했다”고 말했다.
40대를 청년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또 법적으론 청년이어도 사회적 통념상 청소년인 만 15살 이상의 10대는 제외되기도 한다. 한국청년연대(만 20~39살), 미래를여는청년포럼(만 20~39살), 자유청년연합(20대 초반~40대 초반) 등이 그렇다.
종교단체도 청년의 개념이 저마다 다르다. 청년목회자연합은 10대 후반~30대 중반, 가톨릭성서모임은 만 20~39살, 대한불교청년회는 만 20~49살을 청년회원으로 둔다. 대한불교청년회 관계자는 “만 50살이 넘더라도 청년처럼 젊은 생각을 갖고 있으면 회원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젊어도 고루하고 닫힌 생각을 갖고 있으면 회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각의 젊음이 기준이 된다면, 육체의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지역 단위의 마을청년회에선 고령화가 청년의 나이를 끌어올린다. 대부분 40대까지도 청년으로 본다. 충남 아산청년회에선 만 25~35살을 가입 대상으로 하되, 45살까지는 활동할 수 있다. 울산청년회는 회원 규정이 만 20~39살이지만 주로 30대 중·후반에 몰려 있다. 울산청년회 쪽은 “20대에 들어온 청년이 세월이 흘러 30대 후반이 됐다. 신규로 20대가 회원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고 푸념했다. 정부 창업 관련 정책도 농수산 분야는 만 44살까지를 청년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청년의 기준이 들쭉날쭉하는 게 우리나라만의 현실도 아니다. 같은 단어(한자)를 쓰는 중국에서 국가통계국은 15~34살을 청년으로 보지만,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선 14~28살이 청년이다. 일본에선 대개 15~22살의 고등학생·대학생을 청년으로 부르지만, 후생노동성 자료 일부에선 15~25살을 지칭한다. 각종 단체의 청년부가 39살까지를, 농업 분야 단체에선 40대까지도 청년에 포함시키는 것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다.
유엔은 국제적 범주에서 15~24살을 청년(youth)으로 규정한다. 유엔이 거론하는 ‘세계 인구의 약 18%(12억 명)가 청년’ ‘청년 인구 62%가 아시아에, 17%가 아프리카에 거주’ 등의 통계는 모두 이 기준에 따른다. 하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청년의 기준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 유네스코가 지역·국가 단위의 청년 관련 사업을 벌일 땐 현지 기준을 준용한다. 이를테면 15~35살로 규정한 아프리카 청년 헌장에 따라, 아프리카에선 이 연령대를 청년으로 보는 식이다.
‘청년’이란 표현의 연원을 살펴보면 원래 나이 개념이 아니었다. ‘청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우리나라에선 1900년을 전후해 일본에서 ‘청년’이란 용어가 ‘수입’됐다. ‘원산지’인 일본에서도 이 표현은 188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청년은 옛날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사람이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커가는 인생의 한 시기를 ‘청년’으로 지내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청년이란 존재 자체가 근대적 정신의 산물이다.”(기타무라 미쓰코, ) 적어도 동양에서 청년은 근대화와 더불어 탄생한 셈이다.
그때도 ‘청년’의 개념은 모호했다. 근대성을 갖추고 진취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이미지로서의 청년은, 결과적으로 ‘좋은 것의 총합’에 가까웠다. ‘푸른’ 사람들뿐 아니라 ‘푸르고 싶은’ 사람들도 모두 청년이 됐다. 반면 게으르고 나태하고 사치와 허영에 빠진 이들은, 아무리 실제 나이가 젊다 해도, 진정한 청년이 아닌 ‘부랑 청년’이란 이름으로 별도 분류됐다. 나이로만 청년을 정의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자문화권을 벗어나면 청년의 탄생 배경부터 달라지지만, 역시 나이에서 출발한 개념은 아니다. 로빈 하팅거 미국 뉴욕주립대학 교수의 는 서방에서 청년(youth)이 산업혁명 시기에 나타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성장 단계를 어린이와 어른으로만 분류하다가, 산업화·도시화 아래 어두운 곳에서 비행을 저지르는 집단이 하나의 성장 단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에 미치지 못해 사회적 위협이 됐던 그들은 ‘청소년’ 또는 ‘청년’으로 불리며 통제와 교육의 대상이 됐다. 청년 관련 각종 단체와 사업이 출범했고, 연령대에 대한 논의가 뒤따랐다.
청년의 나이에 대한 규정을 두고 한두 살 차이 나는 젊은이들이 벌이는 경쟁과 견제는 청년들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저마다 더 많은 지원을 받고 싶은 심리가 배경인 탓이다. ‘청년비례’로 국회의원이 된 김광진 민주당 의원은 “청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크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불쌍하고 부족하고 미숙한 백수, 또는 ‘컵밥’이나 겨우 먹고 다니는 고시생, 그래서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일컫는 말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청년이 처한 현실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 그리고 사회적 대응은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다. 정치권에서 ‘반값 등록금’과 취업 지원 등 각종 청년 정책을 쏟아낸 지난해 총선·대선 시기가 그 절정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좋든 나쁘든 현시대의 청년에 대한 ‘상’을 재정립했다는 역사적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20~30대 인구 점점 줄어들어통계청 자료를 보면, 올해 20~30대 인구는 전체 29.2%에 이르지만, 지방선거가 있는 2014년엔 28.9%, 20대 총선이 있는 2016년엔 28.3%, 그리고 19대 대선이 있는 2017년엔 28%로 해마다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60대 이상은 정반대다. 2012년 34.9%에서, 2014년 36.2%, 2016년 38.5%, 2017년 39.7%로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만약 투표를 의식해 정치적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60대 이상에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젊은 층 투표율이 낮은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지난해 18대 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17대에 견줘 20%포인트가량 올라 68.5%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연령대별 꼴찌를 면치 못했다. 50대는 82%, 60대는 80.9%를 기록해 나란히 1, 2위였다.
청년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애초부터 청년의 의미는 나이가 아닌 그 진취성에서 찾았다는 데서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청년인가?
“길은 없다, 청년이여. 이제 그 누구도 열어주지 않아.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청년의 시대를 열어라.”(조국과 청춘, )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단독] 정보사, 계엄 10여일 전 몽골 북 대사관 접촉 시도…‘북풍’ 연관됐나
[속보] 윤석열 쪽 “오늘 대리인단 헌재 탄핵 변론준비기일 출석”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한덕수 대행 탄핵안 오늘 표결…국회의장, 정족수 결론은?
형사법 학자 “내란 반대했어도 회의 참여한 국무위원 처벌 받아야”
새 해운대구청 터 팠더니 쏟아져 나온 이것…누구 소행인가?
김상욱 “경제부총리 출신 한덕수, 보신 위해 경제타격 외면”
러시아가 실수로 쐈나…아제르항공 여객기 ‘격추설’ 짙어져
[단독] 윤, 안보실장 교체 하루 전 통보…계엄 판 깔기 ‘번갯불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