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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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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분노, 경제민주화 낳을까

폭언, 금품 요구 등 갑의 횡포 폭로한 남양유업 대리점주들… 사회적 불매운동 넘어 유통구조 개혁 새판짜기 가능할까
등록 2013-05-20 16:59 수정 2020-05-03 04:27

“남양유업은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인류의 건강증진에 기여하는 신뢰받는 기업이 되겠습니다.”(남양유업 홈페이지 소개글)
그러나 ‘인간존중’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했다. 김웅 남양유업 대표이사는 지난 5월9일 오전 서울 중림동 엘더블유컨벤션 기자회견장에 서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했다. 앞서 남양유업 대리점주 정아무개(41)씨 등 2명이 지난 4월 회사를 상대로 고소를 내면서 알려진 남양유업 영업담당 직원의 물품 밀어내기와 떡값 요구 등 이른바 ‘갑의 횡포’에 대한 사과였다.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의회 회원들이 본사 임직원들의 대국민 사과문이 발표된 5월9일 오후, 서울 중구의 본사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의회 회원들이 본사 임직원들의 대국민 사과문이 발표된 5월9일 오후, 서울 중구의 본사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대리점에 재고 떠넘기기 횡행

남양유업 사태는 지난 5월5일 인터넷에 음성파일 하나가 올라오면서 시작됐다. 언론을 통해 조금씩 알려졌던 남양유업 영업담당 직원의 횡포가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오른 ‘남양유업 영업사원 팀장 욕설 사태- 남양유업의 횡포를 고발합니다’라는 음성파일을 통해 좀더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이 파일에는 30대인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아버지뻘인 50대 대리점주에게 막말을 퍼붓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망해, 망해, 그러면 망하라구요. 이 ○○○야!”(영업사원) “그게 영업관리소장으로서 할 말이야?”(대리점주)

이 내용은 남양유업 대리점 사업자들이 모인 대리점피해자협의회(이하 협의회) 관계자가 올린 내용이었다. 이들은 회사 쪽의 영업 횡포가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고 3년 전부터 녹취해둔 내용을 공개했다. 단순한 폭로에 그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물품 밀어내기와 떡값 요구 등 남양유업 본사 차원에서 벌어진 일들을 담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들은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과 김웅 대표이사, 지점장, 영업팀장 등 남양유업 관계자 9명을 공갈·사전자기록변작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고소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 5월2일 남양유업의 서울 남대문로 본사와 서부지점 사무실 등 3곳을 압수수색해 전산자료와 전자우편·내부보고서 등을 확보했다.

고소장에는 최근 몇 년간 남양유업 회사와 대리점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장씨 등은 “회사에서 나온 영업직원이 대리점주에게 전화를 걸어 추석 떡값을 요구해 10만원을 보냈으며, 퇴직하는 지점장에게 전별금을 마련해놓으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주장했다. 고소장에는 이런 대목도 등장한다. “직원들의 퇴직 또는 인사이동, 직원들의 가정에 경조사가 있는 경우 명절 떡값, 전별금, 하례금 명목으로 금품을 요구했으며, 이를 거절하는 경우 ‘사장님, 대리점 그만하고 싶습니까?’ ‘하기 싫으면 대리점 그만두시죠’와 같이 계약을 해지할 듯한 발언을 하거나 평소보다 많은 양의 밀어내기를 하겠다고 겁을 줬다.”

이들은 또 이른바 ‘밀어내기’(푸시)도 공공연하게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밀어내기는 본사에서 점주가 주문하지도 않은 품목을 발주해 대리점에 재고 물량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식품 대기업 등에서는 공공연히 퍼져 있는 유통 영업 형태이기도 하다. 실제로 대리점주들은 밀어내기로 떠안은 과도한 물량을 소화하지 못해, 이른바 ‘삥 시장’이라고 부르는 탈세 시장에 물량을 헐값에 내놔 현금을 마련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너 경영 따르는 을을 갈등 시각도

남양유업의 영업 행태가 특별한 게 아닌데도 사회적 이슈로 불거진 것은, 최근 논란이 된 포스코 왕아무개 상무의 기내 라면 사건과 프라임베이커리의 강아무개 회장의 롯데호텔 앞 난동 사건 등의 영향이 크다는 의견이 많다. 대기업이 지위를 이용해 영업을 해오는 행태가 만연해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적인 공분도 커졌다는 것이다. 실제 ‘을의 반란’이라고 부를 만큼 협의회는 정면으로 회사의 횡포에 문제제기를 했고, 편의점 점주 등도 남양유업 제품의 불매운동에 참여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남양유업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이고 본사 차원에서 전체 대리점을 상대로 일괄적으로 밀어내기를 한 증거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는 남양유업뿐만 아니라 서울우유·한국야쿠르트·매일유업 등 나머지 유가공업계 ‘빅4’로 조사를 확대해 밀어내기 관행을 손보겠다는 입장이다.

식품업계 안에서는 남양유업 특유의 오너 리더십과 군대식 기업문화가 이런 화를 불렀다고 본다. 남양유업은 관련 업계에서 공격적인 경영을 해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양유업은 분유 시장에서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1위를 달리는 대표적인 유가공 업체다. 2011년에는 안정적 수익 창출을 위해 커피믹스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한 바 있다. 국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동서식품의 커피믹스에 든 ‘카세인나트륨’이 몸에 해로운 것처럼 광고하는 노이즈마케팅을 활용해, 시장 진입 2년 만에 11%를 넘는 점유율을 확보했다.

게다가 개인 기업의 구조를 띠는 점과 유통업에서 선호하는 군 장교 출신을 많이 채용해 ‘한다면 한다’식의 군대 문화가 퍼져 있는 점도 이번 사태를 가져온 원인으로 지적된다. 고 홍두영 명예회장이 1964년 세운 남양유업은 현재 아들 홍원식 회장이 최대주주로 경영 일선에서 직접 뛰고 있다. 홍 회장의 지분율은 19.9%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남양유업 영업사원과 대리점주의 관계가 갑을의 구조이기보다는, 갑이라는 오너 경영에 따르는 을을의 갈등이라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영업 담당자 입장에서는 독려와 강매의 구분이 모호한 게 사실”이라며 “영업사원이 욕설 등 무리수를 둔 것도 그만큼 실적에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갑을 관계 토양 바뀌는 계기 돼야

남양유업 사태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갑을 관계의 토양이 바뀌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과 유권자시민행동, 한국시민사회연합회 등 150여 개 시민사회·직능·자영업 단체는 지난 5월9일 남양유업이 책임을 통감하고 피해자에게 완벽한 보상을 해주도록 요구했다. 이들은 “형식적인 사과가 이어진다면 600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동참해 남양유업의 모든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협의회도 남양유업 대표이사의 대국민 사과가 “잘못은 대리점에 해놓고, 사과는 국민에게 한 격”이라며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밝혔다. 쇳물처럼 끓어오른 ‘을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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