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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워크, 꿈으로 5·18을 치유하다

가위눌리는 5·18 피해자들 위한 광주트라우마센터의 국내 최초 ‘꿈작업’… 8주 치유로 “이제야 잠자는 부담 없어졌다”
등록 2013-05-20 14:23 수정 2020-05-03 04:27
나의 살던 고향이다. 마르지 않고 넘치지 않는 우물이 있다. 가뭄도 우물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홍수도 우물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한다. 우물은 깊고, 물맛은 달다. 마을 공동의 우물에서 남자들은 등목을 하고 여자들은 쌀을 씻었다. 늘 그랬던 우물이다. 우물 물빛이 붉다. 핏물이다. 핏물이 우물위로 솟는다. 마을 사람들이 핏물을 퍼낸다. 두레박으로 퍼내고, 바가지로 퍼내고, 두 손으로 퍼낸다. 우물 바닥에선 핏물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바가지를 손에 든다. 마르지 않고 넘치지 않는 우물에서 핏물이 솟게 둘 순없다. 우물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우물바닥에서 핏물을 퍼낸다. 바가지로 핏물을 박박 긁어낸다. 퐁. 이쪽을 퍼내면 저쪽에서 핏물이 퐁퐁. 저쪽을 긁어내면 이쪽에서 핏물이 퐁퐁퐁. 아무리 퍼내고 긁어내도 퐁퐁퐁퐁. 핏물이 마구 터지며 퐁퐁퐁퐁퐁. 불가항력으로 퐁퐁퐁퐁퐁퐁….
광주트라우마센터 ‘꿈작업’에 참여한 5·18 피해자들은 당시 군인들로부터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 등으로 극심한 구타를 당한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의 부조.

광주트라우마센터 ‘꿈작업’에 참여한 5·18 피해자들은 당시 군인들로부터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 등으로 극심한 구타를 당한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의 부조.

‘잠들면 죽는다’고 여긴 세월

“1980년 5월에 스무 살이었어요. 18일 나(김공휴·54)는 광주 금남로 근처에서 시위를 지켜보다 느닷없이 군인들한테 맞았어요. 학생이라는 이유였어요. 학생이 아니라고 해도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이 인정사정 없었어요. 울분이 끓잖아요. 21일 아침 시위차량에 올라탔어요. 도청으로 들어가 총을 잡고 시민군이 됐어요. 기동타격대로 도청을 지키다가 진압당했어요. 상무대 영창에선 두들겨맞는 것이 일과였어요. 식기 하나를 놓고 두 사람이 돼지처럼 밥을 먹었어요. 곡괭이로 맞으면서 의식을 잃기 전까지 센게 49대였어요. ‘개미 고문’ 때문에 무너졌어요. 상무대엔 커다란 포플러나무가 있었어요. 나무 밑엔 왕개미굴이 있었고요. 수사관이 발을 묶고 손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더라고요. 땅바닥에 엎드리게 하더니 나무 막대기로 개미굴을 휘젓습디다. 수많은 왕개미가 몸을 타고 올라왔어요. 콧구멍으로 기어 들어가고, 귓구멍으로 들어가고. 눈꺼풀 밑을 파고들고, 성기 요도구로 머리를 밀어넣고. 돌아버릴 것 같더라고요. 하지 않은 일들 다 했다고 했어요. 총 쐈다고 했고, 사람도 죽였다고 했어요.”

‘잠들면 죽는다.’

그의 두려움은 잠을 자면 악몽 속 살인마에게 살해당한다는 공포영화의 설정 그대로다. 그는 30여 년을 잠의 공포에 압도당한 채 살아왔다.

“잠이 들면 검은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알 수 없는 형체로 뭉쳐져요. 검은 형체가 천장에서 천천히 내려와 목을 누릅니다. 온몸이 굳는다는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 하지를 못해요.”

군홧발 소리가 저벅저벅 들리기도 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그는 고꾸라졌다. 발악을 할 때마다 손발이 마비됐다. 이틀에 한 번꼴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온몸이 뻣뻣해진 채 눈을 뜰 때마다 옆에서 편히 자는 듯한 가족들을 원망했다. 최대한 깨어 있어야 했고, 최대한 늦게 누워야 했다. 공포를 이기려 마신 술이 가정을 쪼갰다.

빨간 뱀 새끼를 잡아먹는 꿈묘가 엄청나게 크다. 잔디가 없는 흙묘다. 삽으로 무덤을 팠다. 무덤 안에 주검이 있다. 왼쪽 발이 꾸물꾸물 움직인다. 검은 양말을 신고 있다. 옆 사람이 땅을 파헤쳤다. 검은 뱀이 나온다. 나도 팠다. 빨간 뱀이 보인다. 뱀의 왕인 ‘능사’다. 앞서 그 사람이 빨간 뱀새끼를 먹어버린다. “속에서 꿈틀 안 혀요? 산 채로 기어나올 텐디요.” 내 말에 그는 “몸에 아주 좋다”고 말한다.

“처가 밖이 시끄러븐 걸 알았는갑서요. 내(박천만·54) 옷을 감차버렸어요. 처남의 빨간 추리닝을 입고 나간 거예요. 시위하믄서 돌 던지고요이. 무기라곤 돌밖에 없응께요. 마지막까지 도청도 지키고요. 새벽에 총소리가 우당탕하는 게 난리예요. 군인놈들이 막갈겨부러요. 내가 쐈으믄 군인도 죽었을 긴데 차라리 내가 죽자며 안 쐈어요. 내가 빨간 추리닝 입어서인가 빨갱이라믄서 엄청 패더라고요. 상무대 영창에서 무지허게 맞아 부렀어요. 오른쪽 귀는 아예 안 들리고요이. 왼쪽 귀에선 귀뚜라미가 겁나게 울어부러요. 그때 처는 내가 죽은 줄 알았응께요. 제가 소식이 없응께 도청서 시체들도 찾아보고 그랬다대요. 가정에 충실치를 못혔어요. 상무대 나와서는 광주 떠나 숨어 살았어요. 사람이 무서웠응께요. 지금도 군인·경찰 보믄 심장이 벌렁벌렁혀요. 애들허고 얼마나 고생혔겄어요. 우리 둘째 딸내미가 참 이뻤어요. 한참 떠돌다가 집에 가본께 애가 보이질 안 혀요. 장인이 ‘좋은 디 갔단다’ 그려요. 죽어버렸다잖아요. 처도 죽겄다고 농약을 먹어부렀어요. 지금도 처는 몸 한쪽이 마비된 채예요. 보고 있으면 가슴이 찢어지요. 가끔은요 살아 있는 기 부끄러버요. 그때 차라리 죽어버렀으믄요 아이들한테는요 덜 미안 안 하겄소.”

그는 자신을 누르는 가위의 얼굴이 보인다고 했다.

“내가 잠도 안 들었거든요. 불만 끄면 기다렸다는 듯이 배 위에 올라타서 목을 조르는 거예요. 얼굴이 있어요. 딱 모자를 쓰고요. 항께 불 끄기가 무서버요. 악을 써야 허는디 악은 안 써지고요. 매일 그렇게 살았으니께요.”

그는 현재 떨어져 사는 부인과 큰딸의 사진을 보여줬다. 젊은 시절 부인이 어린 딸을 안고 있는 사진은 절반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부인이 도려낸 사진 반쪽엔 원래 그가 있었다.

5·18 피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의 대표적 특징은 악몽과 수면장애다. 그들은 잠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위눌림의 압도적 공포에 시달려왔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광주트라우마센터 꿈작업에 참여한 박천만·윤다현·김공휴씨.

5·18 피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의 대표적 특징은 악몽과 수면장애다. 그들은 잠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위눌림의 압도적 공포에 시달려왔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광주트라우마센터 꿈작업에 참여한 박천만·윤다현·김공휴씨.

슬픈 눈빛으로 날 보는 할머니해남 작은집에 성묘를 하러 갔다. 작은집 식구들이 묻는다. “어째 내려왔는가?” 나는 “부모님 산소에 왔어요” 말한다. 작은집 식구들은 “할머니 여기 와 계신 것 아는가?” 한다. 마을 슈퍼마켓 평상에 할머니가 곱게 앉아계신다. 아주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할머니~” 부르며 쫓아가다가 잠을 깬다.

“내(윤다현·63)가 8남매 중 장남이에요. 80년 5월엔 서울서 살았어요. 해남 아버님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가 광주에 잠깐 들렀는데 공수부대 잔학상을 봐버린 거예요. 같이 시위했던 친구가 공수부대 칼에 5군데 찔려서 죽어부렀어요. 내가 학동·학운동 청년들을 배고픈다리(현재 홍림교)에 모아다가 군인들하고 대치했어요. 그러고 서울로 돌아갔거든요. 결혼할 여자하고 제과점 하면서 돈 많이 벌었어요. 약혼날도 받아놨는데 8월에 광주서 온 형사들한테 호송줄로 묶여서 끌려 내려왔어요. 내가 김대중 선생 지령받고 광주에 잠입해서 항쟁을 이끈 주동자가 돼 있더라고요. 별의별 고문 다 받았어요. 손톱 밑으로 대나무 쑤셔놓고, 옷 벗겨서 거꾸로 매달고, 손날로 목젖 치고. 결혼하기로 했던 여자와는 잡혀간 날 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진짜 결혼한 여자가 있었는데요. 장인이 나 몰래 데리고 가서 외국으로 보내버렸어요. 그 뒤로 한 번도 못 봤어요. 세상 살기 싫었어요. 타락을 해버렸어요. 술 먹고 정신 들면 경찰서였어요. 감시만 하지 말고 차라리 죽여라 그랬어요. 전두환 정권 7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할머니가 나를 애지중지하셨어요. 면회 한번 하겠다고 6개월 동안 상무대 앞에 집을 얻어놓고 살았어요. 매일같이 찾아와 울면서 면회시켜달라고 했는데도 결국 못했어요. 고문으로 머리가 터지고 피투성이가 됐는데 그놈들이 면회시켜주겠어요. 할머니는 나한테 신과도 같은 분이에요. 매일 밤 군인과 싸우는 꿈을 꿨어요. 눈만 감으면 형무소 안에서 고문을 받아요. 공수부대원한테는 구타를 당하고요. 눈 뜨면 늘 방바닥이 축축했어요.”

악몽과 수면장애는 트라우마의 대표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며 마음의 고통을 키워왔다. 고혜경 박사(신화학·신화와 꿈 아카데미 원장)가 광주트라우마센터 ‘꿈작업’에서 만난 5·18 피해자 대부분은 극도의 가위눌림을 호소했다. 개인이 소화하고 감당하기엔 광주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압도적인 탓이다. 고 박사의 꿈작업은 국가폭력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에서 처음 시도됐다.

꿈작업은 ‘나쁜 꿈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꿈작업에선 악몽도 ‘시급한 메시지’로 기능한다. 꿈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실마리가 있다고 본다. 꿈 작업은 ‘꿈세계의 동맹자’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공휴씨는 고 박사와의 꿈작업에서 ‘피우물 꿈’을 긍정할 수 있는 단서를 만났다. 피로 오염된 우물은 집단 살상과 파괴의 상징이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과 무기력은 트라우마의 전형이다. 반면 우물은 마을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소통의 장소이자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핏물을 퍼올리는 행위에서 고 박사는 고통을 이기려는 공동의 노력을 읽어냈다. “악몽조차도 ‘극복을 위한 열쇠’를 내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뱀 꿈’에도 트라우마의 흔적과 희망의 씨앗이 공존한다. 꿈작업에선 등장하는 모든 요소를 ‘꿈을 꾼 이’로 파악한다. 발이 움직이는 산송장은 박천만씨 자신인 셈이다. 뱀은 허물을 벗으며 완성되는 생명체다. 꿈에서 뱀은 나비와 함께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기호다. 동양의 치병굿에선 천으로 뱀 모양의 매듭을 만든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휘장엔 거대한 뱀이 그려져 있다. 고 박사는 “박천만씨의 꿈에선 치유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정의가 회복될 때

윤다현씨에게 할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할머니는 여신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제주도에선 ‘할망’이 여신이다. 손자의 바닥 없는 아픔을 이해해주는 할머니의 슬픈 눈빛은 세상의 울음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과도 연결된다.

고 박사는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악몽에서 놓여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는 꿈작업 참여자들에게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테크닉을 훈련시켰다. 공포로 몸이 마비될 때도 미세한 신경이 발달한 얼굴 근육만큼은 움직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입을 벌리거나 찡그림으로써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8주간의 꿈작업을 마친 이들은 꿈의 내용이 바뀌었다고 한다. 박천만씨는 최근 꾼 꿈에서 1980년 당시 쏘지 못했던 총을 쏠 수 있었다. “공수부대놈들이 총을 쏴도 내가 안 죽어요.”

윤다현씨는 할머니처럼 고운 얼굴의 젊은시절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 무덤 성묘를 계기로 광주항쟁에 얽혀든 그였다. 그는 “나쁜 꿈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잠자는 부담이 없어졌다. 이젠 꿈에서 도망도 잘 가고, 싸울 때도 주먹이 나간다”고 했다.

김공휴·박천만·윤다현씨는 각자의 꿈이 있었다. 나전칠기 장인이 되고 싶었고, 유능한 선반기술자가 되고 싶었으며, 제빵업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5·18 트라우마는 이들을 전혀 다른 삶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이들 모두는 삶을 회고하자마자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에게 가위눌림은 수십 년 동안 ‘밤의 테러’였다. 꿈작업 동료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을 이야기할 때조차 잠을 자는 참여자가 있었다. 자신의 아픔도 감당하기 어려워 남의 고통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몸들이 무의식중에 선택한 방어 전략인 셈이다. 지금껏 한국 사회는 아파도 아프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의 신음과 곡소리에 귀를 막고 퇴행해왔다.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광주의 피해자들이 아직도 빨갱이란 낙인에 시달리고 때론 광주 안에서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지난해 육사생도를 사열했다”며 “우리 사회 공동체의 정의가 회복될 때라야 광주의 트라우마도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내 꿈 애먼 이에게 전이되면 안 돼”

자신을 괴롭혀온 악몽과 그 악몽보다 더한 현실을 이야기한 박천만씨가 기자의 손을 잡고 “옴”(불교의 진언 중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음절) 하고 읊조렸다. 매회 꿈 작업을 마칠 때마다 무의식의 장을 닫고 삶의 장으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치른 상징적 의식이었다.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꿈이 애먼 사람헌티 전이되믄 안 되니께요.”

광주=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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