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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수출, ‘선거 한류’ 낳을까

‘해외 원조’의 하나로 자리잡은 선거제도 수출… 선거투어 인기 힘입어 세계선거기관협의회 출범 꿈꾸는 선관위
등록 2013-05-11 18:19 수정 2020-05-03 04:27

“투표에 있어 유권자들이 엄숙한 중에도 자기 나라를 세운다는 긴장 속에서 새벽 일찍부터 투표장에 모여드는 것에 애국애족의 열성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개표에 있어서도 질서정연히 진행되는 것을 볼 때 세계 어느 나라의 선거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와서 자유 분위기가 완전히 보장된 것을 확인하는 바이다.”(1948년 5월12일치 )
유엔 임시조선위원회의 충남 선거감시단 인도대표 씽은 1948년 5·10 총선거를 끝낸 다음날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유엔 장학생’으로 헌정 사상 첫 선거를 치른 우리나라의 성적표였던 셈이다. 당시 유엔 임시조선위원회는 오스트레일리아·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 대표로 짠 1반과 시리아 대표가 참여한 2반, 그리고 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 대표가 있는 3반 등 모두 세 그룹으로 나눈 선거감시단을 전국 곳곳에 파견해 선거 과정을 지켜봤다.

콩고민주공화국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4월24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일초등학교에 차려진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 상계1동 제6투표소에서 투표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콩고민주공화국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4월24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일초등학교에 차려진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 상계1동 제6투표소에서 투표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06년 이후 연수 국가 41개국

65년이 흐른 지난 4월24일 오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개표소가 차려진 서울 노원구 상계동 청원고등학교에 검은 피부의 외국인과 히잡을 쓴 이들 20여 명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선거감시단이 아닌 ‘선거연수단’이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인도네시아의 선거위원회 직원인 이들은 우리나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초청으로 4월 중순부터 열흘 넘게 국내 선거·정당·정치자금제도와 선거관리 기법 등을 배우는 중이었다. 이날 이들은 자동 투표집계기와 수검표 작업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거나 선관위 관계자의 설명에 귀기울였다. 4·24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입국한 덕에 이들은 투표장·개표소뿐만 아니라, 선거운동 모습과 사전투표 현장도 지켜봤다.

이날 ‘선거투어’ 풍경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선관위 자료를 보면, 2006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연수를 받은 외국의 선거 관계자 수가 41개국 317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현재 선거제도 정비를 고민하고 있는 아시아·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이 대부분이다. 나라별로 보면, 방글라데시·필리핀·이라크 등 아시아 지역 17개국에서 207명이, 아프리카에서는 콩고·나이지리아 등 15개국의 85명이 다녀갔다.

이들이 우리나라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다양한 선거 시스템’ 때문이다. 지난 4월30일 서울 종로구 인의동 선거연수원 강의실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선거위원회의 세카르 리나스티(47) 기관간협력과장도 “한국 선거 운영의 기술적인 부분을 지켜본 게 (정책 아이디어로 삼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동 투표집계기였다. 사람이 다시 한번 수작업해 확인하는 것도 놀라웠다. 그 밖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를 운영하는 것과 ‘선거 후보등록자는 선거일 90일 이전부터는 후보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해둔 선거법 조항은 돌아가서 국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건의하려 한다.” 그는 또한 “현재 인도네시아에서는 언론을 소유하고 있는 정당 대표들이 선거를 앞두고 편파보도를 하는 것을 어떻게 견제할지, 그리고 섬이 많아 선거철마다 공급이 쉽지 않은 투표용지의 유통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했다.

사전투표제·재외투표 등 해외 눈길

해외 선거 관계자의 이같은 시선과 다르게, 국내에서는 대선 뒤 개표 부정 논란과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여부 수사 등 선거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삼류 정치’ 때문에 국내에서는 우리나라 선거제도의 과감한 시도가 생각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다. 4·24 재·보궐 선거에서 처음 도입한 ‘사전투표제’를 보면 그렇다. 앞서 미국도 사전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유권자가 등록된 투표구에서만 투표할 수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전국 어느 곳이든 지정된 부재자투표소에서 사전투표를 할 수 있다.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전국 단위의 통합선거인명부제 덕분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원양어선 선원 등을 대상으로 처음 시행한 선상 부재자투표와 재외국민 선거 등 다양한 시도도 해외 선거 관계자들의 눈길을 끄는 제도다.

선관위는 최근 우리나라 선거제도를 배우려는 외국 정부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거제도 수출’로 이어가려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준비하는 국가들을 초청해 벤치마킹 기회를 알리고 있다. 최근 성적표도 화려하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안을 마련한 몽골은 개정 절차를 진행하기 전인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선관위의 초청으로 담당자 8명이 입국해 연수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선관위가 제안한 선거법제 개선안 73건을 가져가 이 중 52건을 “수용 또는 검토 뒤 반영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선관위는 선거 시스템 지원 요청에 응하기도 한다. 지난해 7월 연수를 온 네팔의 선거위원회 사무처장이 직접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투표용지 인쇄기와 투표지 분류기 등 선거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외국에서 이뤄지는 선거 과정에 선거 참관과 감독 역할을 하는 인력도 파견하고 있다. 현재까지 선관위는 유엔개발계획(UNDP)과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 국제기구 등을 통해 부탄·아르메니아·보스니아·코트디부아르 등 25개국에 109명의 선거 참관 인원을 보냈다.

협의회 사무처 인천 송도 유치 계획

선관위는 선거 수출을 ‘해외 원조’의 하나로 본다. 개발도상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취지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비용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원조개발기금을 통해 마련되고 있다. 선관위는 선거제도의 경쟁력을 살린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선거 분야의 유엔’ 조직에 나서고 있다. 지난 3월 제주도에서 열린 전세계 선거 관련 기구의 대륙별 대표단 회의에서 회원국들은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 창설에 대해 합의를 했다. 이는 앞서 2011년 10월 우리나라 선관위가 제안했던 기구다. 현재 선관위가 하고 있는 활동을 확장해 세계 각국의 개발도상국 등에 선거 관련 법제를 지원하고 자문·교육을 하는 역할을 세계선거기관협의회에 맡기자는 것이다. 선관위는 협의회 사무처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유치하겠다는 의사도 밝힌 상태다. 최종 결과는 오는 10월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리는 ‘국제선거 콘퍼런스’(GEO Conference)에서 결정된다. 과연 선관위의 야심찬 계획은 해외 토픽으로 소개됐던 우리나라의 ‘삼류 정치’를 지우고 ‘선거 한류’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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