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결박은 풀리지 않았다. ‘유신 학칙’이 꽁꽁 묶어버린 ‘대학생 정치활동의 자유’는 정권이 8차례 바뀌어도 여전히 밧줄 속에 갇혀 있다.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침해 학칙 전면 개정 또는 삭제 권고’도 대상 대학 74%가 무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지성적 과거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한국 ‘지성의 요람들’의 현주소다.
대학생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구시대 학칙들’이 다시 비판의 과녁에 걸렸다. 지난 4월5일 덕성여대에서 연출된 ‘진보 2013 강연 원천봉쇄’가 불을 지폈다. 학교 쪽은 지난 3월21일 총학생회에 공문을 보내 ‘장소협조 불허’를 통보했다. 덕성여대가 ‘부담스런 행사’를 막는 데 사용한 근거는 학칙 제62조(금지활동) 1항(학생은 학내외를 막론하고 정당 또는 정치적 목적의 사회단체에 가입하거나 기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이었다. 행사 첫날 학교 쪽은 버스로 ‘차벽’을 치고 강연자들의 정문 출입을 막았다. 주최 쪽은 결국 학교 인근으로 장소를 옮겨 강연 일정을 소화했다.
덕성여대 학칙은 2007년 3월 인권위가 작성한 시정권고 결정문(‘대학생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학칙으로 인한 인권침해 사건’)에서도 언급된 조항이다. 유신시대 ‘학도호국단 학칙’이 시대를 건너며 생명을 연장시켜온 발자취다. 당시 인권위는 20개 국공립대와 49개 사립대의 학칙을 조사했다. 인권위는 전면 개정·삭제 권고 발표문에서 국공립대학만 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인권침해 조사 대상을 국가기관으로 제한하던 당시 법(지난해 3월 개정)의 한계 탓이었다. 대학들의 권고 불이행에 책임을 물을 방법도 없었다. 사립학교의 ‘문제 학칙들’은 결정문에 기록으로만 남겼다.
은 6년 전 인권위가 지적했던 69개 대학의 ‘문제 학칙’을 다시 전수조사했다. 각 대학의 학칙·시행세칙·학생활동규정·상벌규정 등을 검토한 결과, 대학생들의 정치활동을 억압하는 독소조항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인권위 권고를 비교적 충실히 따랐다고 볼 수 있는 학교는 국공립과 사립을 합쳐 우석대(‘학생활동의 제한’ 제60조 삭제) 1개교(1.5%)뿐이었다. 우석대는 집회 허가제도 신고제로 바꿨다.
누리집에서 학칙을 확인하지 못한 4개 대학(광주대·그리스도신학대·신라대·중부대)을 제외한 65개 대학 중 48개(국공립 14개+사립 34개) 학교가 문제 학칙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전체의 74%에 해당하는 수다. 인권위로부터 시정 권고를 받았던 20개 국공립대학 중에서도 14개교(70%)가 요지부동이다. 논란을 재개시킨 주인공 덕성여대도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대부분 학교의 학칙이 ‘학생은 수업·연구 등 학교의 기본적 기능을 방해하는 개인 또는 집단적 행위와 교육 목적에 위배되는 활동 및 교내 활동을 할 수 없다’는 문장을 반복했다. 가천대 글로벌캠퍼스(옛 경원대) 학칙은 “도서관을 제외한 기타 장소에서 밤 10시 이후 일체의 학교 출입과 야간 활동까지 금지”(제18조)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통행금지를 떠올리게 한다. 한성대는 “매 학기 중간 및 기말시험 1주일 전부터 시험 종료시까지 각 단체의 행사 및 집회는 허가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학생준칙 제15조)며 ‘집회 불허’를 못박았다.
일부 표현을 삭제하되 기본 틀을 고수한 학교는 16개(국공립 6개+사립 10개)였다. 강릉대는 학칙 제72조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문구만 지웠다. 춘천교대는 ‘학생활동의 제한’을 규정한 제38조를 삭제했지만, ‘총학생회 무력화’ 길을 열어둔 제39조(총학생회 및 학생단체는 국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는 그 기능이 정지된다)는 손대지 않았다. 연세대는 징계 대상(학생상벌에 관한 시행세칙 제5조) 중 “학내외를 막론하고 정치단체를 조직하였거나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한 학생”을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위로 수업 또는 학사 행정을 방해하거나 지장을 초래케 한 학생”으로 ‘살짝’ 고쳤다. 아주대는 모든 학생회 활동을 총장에게 신고토록 한 학칙 제71조와 정치활동 금지를 규정한 학생준칙 제6조를 없앤 대신 “대학의 기본 기능 수행을 방해하는 개인 또는 집단활동을 할 수 없다”는 학칙 제73조는 존치시켰다. 2007년 인권위에 “학업과 무관한 정치활동을 제한하고 있으며 당분간 학칙 개정 계획이 없다”고 밝혔던 가톨릭대는 실제 해당 학칙을 그대로 유지했다. 반면 당시 “총학생회에서 개정을 건의하면 전향적으로 조치할 예정”이라던 포항공대는 학칙을 바꾸지 않았다.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한 대학생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으나 별다른 결실을 맺진 못했다. 2010년 고려대·국민대·덕성여대·숙명여대·숭실대·이화여대·한양대 7개 사립대 학생들의 ‘대학생 민주학칙 개정운동’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국공립대 학생들과 달리 사립대 학생들에겐 헌법소원의 길도 막혀 있다. 박현서 당시 준비위원장(이화여대 법대 4학년)은 “학내에서 학칙 개정 목소리를 모아내도 최종 승인권자가 총장이라는 의사결정 구조의 한계를 넘기 어려웠다. 사립대의 경우 원고가 될 수 없어 헌법소원도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박주민 사무차장은 “현재 한국 대학의 학칙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생인권조례보다 못하다. 고등교육법과 사립학교법을 바꿔 헌법정신과 인권을 해치는 학칙 개정의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문영 기자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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