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휴일에 제약사 영업사원 재혁(김명민)은 “병원장 사모님과 아들·따님을 모시고” 놀이공원에 간다. “큰 수술이 있”는 병원장을 대신해 생일을 맞은 “아드님”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가방을 어깨에 매단 채 햄버거와 핫도그를 사 나르며 재혁은 땀을 뻘뻘 흘린다. 저녁 에 “사모님과 자녀분들”이 자택에 들어서자 병원장이 TV 앞에 앉아 있다. 서너 개의 쇼핑 가방까지 더한 재혁이 힘겹게 영업 활동을 끝 낸다. “미안해, 이런 일까지 부탁해서. 워낙 큰 수술이라서 말이야.” 하지만 병원장의 표정에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 재혁은 손사래 를 친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다 해야 할 일인데요.” 집으로 돌아 오는 차 안,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재혁이 하소연한다. “이게 약장수 냐 머슴이지?” 지쳐버린 그가 다다른 허름한 아파트. 피자와 통닭을 먹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재혁은 짜증을 쏟아낸다. 생일날 놀이공원 에 가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발끈해서 말이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리베이트가 생존의 문제가 됐다”</font></font>
2012년 7월 개봉한 영화 의 첫 장면이다. 제약사 영업사 원들은 인터넷 포털 다음 카페에 “영화를 보고 씁쓸했다”고 적었다. “병원장의 과수원을 가꾸고 아이들 과외까지 시키는 감동 영업, 그 렇게 획득한 우수사원 타이틀과 늘어나는 인센티브. 하지만 영업사 원은 진심으로 행복할까. 이런 걸 ‘잘하는 영업’이라고 생각하는 풍 토 자체가 혐오스럽다.”(전직 영업사원이 쓴 게시글)
제약사 영업사원은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3D 업종 종사자다. 경 쟁이 치열하고 갑을 관계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의약품 리베 이트라는 고질병 탓이다. 이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수시로 넘 나들어야 한다. 지난해 말 제약업계 1위 동아제약이 리베이트 제공 혐의로 임직원이 구속됐고, 올해 초엔 CJ제일제당이 40억원대 리베 이트 사건에 휘말려 지난 6개월간 1천여 명의 의사가 줄소환됐다. 비 판 여론이 거세지자 대한의사협회와 한국제약협회는 잇따라 의약품 리베이트 단절을 선언했다. “제약사 영업사원의 의료기관 출입을 일 절 금지한다.”(2월4일 대한의사협회) “리베이트 행위로 제약산업 이 미지를 훼손하는 회원사에 강력한 조처를 취할 것이다.”(2월21일 한 국제약협회)
의약품 리베이트를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은 전·현직 제약사 영업사원 2명을 만나 물었다. ㄱ(31)씨는 대형 제약사에서 6 년째 영업을 하고 있고, ㄴ(33)씨는 제약사에서 10개월간 근무하다 퇴사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그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진단했다. “(리베이트는) 매년 불거졌던 문제다. 공정거래위원 회든, 국세청이든, 경찰이든 성과가 필요하니까. 일종의 통과의례다. 과징금을 때리면 제약업계는 힘든 척 쇼를 하고 넘어간다. 금방 잊히 니까.”
<font size="2">왜 의약품 리베이트가 없어지지 않나.</font>
ㄱ 제약사가 너무 많아서다. 도매상까지 합치면 400개가 된다. 자 동차 업계에 현대자동차가 그렇게 많다고 생각해봐라. 경쟁이 치열 할 수밖에 없다. 제네릭(복제약) 신제품이 출시되면 기본 경쟁률이 50 대 1이다. 제네릭은 이름만 살짝 바꿔서 다 팔 수 있다. 품질도 가 격도 비슷비슷하다. 당신이 의사라면 어떤 걸 선택하겠나.
<font color="#BEBEBE">보건복지부가 2011년 8월 내놓은 보고서 ‘약가제도 개편 및 제약 산업 선진화 방안’을 보면, 완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제약사는 265곳 이다. 그중 2009년 기준으로 생산 규모가 1천억원 이상인 곳은 35곳 에 불과하고 100억원 미만인 곳은 절반(131곳)이나 된다.</font>
ㄴ 내가 의사라고 가정해보자. 어떤 약을 이미 많이 처방하고 있 다. 효과도 좋고 값도 저렴하니까. 어느 날 제약사 직원이 찾아와 지 금처럼 처방하면 매출액의 10%를 준다고 한다. 매달 수백만원이 그 냥 생기는 일이다. 영업사원도 리베이트를 주면 매출로 잡을 수 있으 니까 이익이다.
ㄱ 예전엔 개업의가 고수익 직종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개원 병원 이 늘어나 (리베이트가) 생존의 문제가 됐다. 안 받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곳도 많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브랜드 없는 하위 업체 30%까지 불러”</font></font>
<font size="2">그럼 대부분이 리베이트를 받나.</font>
ㄱ 양심적이거나 아주 소심하면 안 받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의사를 60명 넘게 만나는데 10명 내외에게 준다. 나와 친하고 약도 좋으니까 (의사가 약을) 써주는 거다.
ㄴ 나한테 안 받아도 다른 곳에서는 받을 거다. 매출액이 큰 제약 사에서. 리베이트도 친하고 규모가 있어야 건넬 수 있다. 모르면 안 받는다. (리베이트) 쌍벌제의 영향이다.
<font color="#BEBEBE">쌍벌제는 리베이트를 제공한 제약회사뿐 아니라 이를 받은 의사 도 함께 처벌하는 제도로 2010년 11월 도입됐다. 대한의사협회는 “모 든 의사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규정한다”며 쌍벌제의 개정을 요구한 다. 하지만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11~12월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보니, 91.7%가 ‘쌍벌제 시행 이후 의·약사의 리 베이트 요구가 줄었다’고 답했다. 73.4%는 ‘쌍벌제 같은 규제 강화책 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font>
<font size="2">쌍벌제가 어떤 효과를 낳았나.</font>
ㄱ 쌍벌제를 만드는 데 일조한 제약사가 있었는데, 1년간 매출이 박살났다. 의사들이 왕따시킨 거다. 하지만 이후 안 받는 의사가 많 아졌다. 해외여행 보내준다거나 기차표를 해준다거나 렌터카를 해준 다거나 하는 게 없어졌다. 기록에 남으니까.
ㄴ 그 제약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리베이트를 처음 도입한 회사다. 1999년 실거래가 상환제가 도입되자 중소업체였던 그 제약사가 약품 별로 몇%씩 의사에게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8~9% 정도였는데 다른 제약사도 뛰어들어 14`~15%로 마구 치솟았다. 하위 업체일수 록 많이 준다. 브랜드가 없으니까 30%까지 부른다.
<font size="2">합법적인 마케팅과 불법 리베이트의 경계는 무엇인가.</font>
ㄱ 회사에서 합법에 대한 기준을 교육받는다. 그런데 해석이 자꾸 달라진다. 이번에 뭉텅이로 걸린 ‘시판 후 조사’도 합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제약사가 오랫동안 해왔다.
<font color="#BEBEBE">‘시판 후 조사’란 제약사가 새 의약품을 판매할 때 안전성·유효성 에 관한 정보를 의사를 통해 수집·검토하는 걸 말한다. 시판 약을 환자에게 처방해 경과를 지켜본다. 비용은 건당 5만원 정도다. 하지 만 공정위는 판촉 목적으로 제약사가 ‘시판 후 조사’를 활용하는 경우 가 많다고 본다. 따라서 약사법상 시행 의무가 없고 식품의약품안전 청의 승인도 필요 없는 임상시험을 반복해 시행하면 리베이트로 의 심한다.</font>
ㄱ 우리도 헷갈리고 자신들도 헷갈리니까 변호사 공증서가 있느냐 고 의사들이 물어본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동영상 강의료 지급의 경 우 로펌의 공증서를 보여주며 영업했다고 한다. 그런데 리베이트로 걸렸다.
[%%IMAGE2%%]<font size="3"><font color="#C21A8D">“백화점서 가방 사라고 법인카드 줘”</font></font>
<font size="2">의사와 처음에 어떻게 친분을 쌓나.</font>
ㄴ 간호사와 무조건 친해져야 한다. 특히 의사 아내가 간호사면 키 맨(keyman·중심인물)으로 공략한다. 키맨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면 고맙다는 피드백이 반드시 온다. 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밥도 먹고 술 마시고 골프 치고 영어 교재 건네고 차근차근 관계를 쌓는다. 친해지긴 어렵지만 일단 친해지면 오래간다.
ㄴ 아예 만나주지 않으면 환자로 찾아간다. 서너 번 진료받고 얼굴을 트면 명함을 내밀고 인사한다. 영업사원과 호형호제하는 의사가 많다.
<font size="2">의사가 무리한 요구도 하나.</font>ㄴ 중소 제약사에는 별의별 요구를 한다고 들었다. 새벽 2~3시에 대리운전해라, 엔진오일 갈아와라, 자녀 등하교 시켜라. 그래서 영업사원들이 대형 제약사를 부러워한다.
<font color="#BEBEBE">대형 제약사라도 갑을 관계는 명확하다. 2011년 말 삼성서울병원 회식 자리에 참석했던 동아제약 영업사원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신경외과 전공의를 때리는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지도교수의 요청으로 두 사람은 합의했고 영업사원은 부서를 옮겼다. 하지만 전공의는 눈 주위의 뼈가 주저앉는 안와골절과 복시(물체가 이중으로 보이는 증세) 후유증을 얻었다. 2012년 8월28일 대한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이 동아제약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하루 만에 동아제약은 직원을 내보내고 대표이사가 노 회장을 찾아가 사과의 뜻을 전했다.</font>
<font size="2">의사가 제약사의 법인카드를 쓴 사실이 적발됐다.</font>
ㄱ 전통적인 리베이트다. 주말에 장 보고 백화점에서 가방이라도 사라고 준다. 금액은 의사가 처방한 약값의 몇%, 이런 식으로 정해진다. 의사가 다음달에 카드 쓸 일이 많으면 전달에 약을 환자에게 더 많이 처방한다.
ㄴ 회사에서 영수증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법인카드는 누가 썼는지 모른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언하는데 의사 아내가 쓰면 꼭 문제가 생긴다. 포인트 아깝다고 적립하다가. 그렇게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한다.
<font size="2">걸린 법인카드는 어떻게 하나.</font>ㄱ 완전히 리셋한다. 모든 병원의 카드를 회수했다가 다시 준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증거 남지 않도록 내부 시스템 설계”</font></font><font size="2">다른 리베이트 방식은.</font>
ㄴ 회사마다 다르다. 의사들은 현금 받는 걸 제일 좋아한다. 쌍벌제 이후 더욱 그렇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선 현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어렵다. 회계 처리도 그렇고, 카드깡도 한계가 있고. 잘못하면 회사가 뒤집어질 수 있다.
<font color="#BEBEBE">지난 2월17일 온라인 의사 커뮤니티에 ‘어제 ××제약 이사라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글이 올라왔다. 리베이트 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의사가 제약사 임원과 나눈 대화 내용이라며 이렇게 썼다. “앞으로는 현금으로만 드리겠다고 사과했다. 제약사 임원이 거액의 현금을 받은 의사는 적발되지 않았고 주변의 다른 의사들도 여전히 현금을 받고 있단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현금 전달은 의사나 영업사원의 내부고발이 아니면 잡아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font><font size="2">영업사원도 조심하나.</font>
ㄱ 증거가 남지 않도록 내부 시스템이 설계돼 있다. 종이로 문서 작업을 하지 않고 상관에게도 보고하지 않는다. 돈을 누구에게 얼마나 쓰는지는 전적으로 나의 권한이다. 리베이트를 주든지, 마케팅비로 쓰든지 내가 결정한다. 회사는 매출액에 견줘 그냥 경비를 나에게 꽂아준다.
ㄴ 자기 능력껏 하는 거다. 개인사업자와 다를 바 없다. 영업사원이 횡령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매출이 빠진다. 돈을 써야 매출이 오른다.
<font size="2">자살하는 제약사 영업사원도 있었다.</font>
ㄱ 회사에는 의약품 품목별로 목표치가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어느 정도 판촉관리비가 필요한지 알고 있지만 늘 적게 준다. 주변에도 개인카드를 만들어 500만~1천만원은 항상 빚을 지고 있는 동료가 있다. 계약을 10%로 맺어야 하는데 경쟁이 심하니까 무리하게 30%로 체결해 끌고 오다가 사고가 나는 거다.
<font size="2">리베이트가 적발되면 영업사원은.</font>ㄱ 회사마다 다르다. ‘회사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면 팽당하는 거다. 하지만 대형 제약사는 더 큰 보상을 한다.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지고 승진하는 경우도 봤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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