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1935-18××.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47번지 화랑아파트 ×동 ×호가 배송지인 ‘목우촌한우세트’의 물품번호다. 발송일은 1월29일, 바로 어제다. 물품번호 75424616××, 전남 영광에서 부친 굴비 상자도 하루 만에 서울 영등포구의 한 택배업체 지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고급 선물은 여의도로, 신길동에는 농산물…
“명절 택배 취재하려면 다음주에 와야 진짠데. 그때가 되면 흔히 말하는 폭탄이 떨어질 거야.” 1월30일 아침 7시30분, 5t 트럭에 실린 택배 화물들을 ‘까대기’하던 택배 기사 한 명이 기자가 뭘 모른다고 웃으며 말한다. ‘까대기’는 집화점에서 지역별로 분류돼 실려온 택배 물량을 트럭에서 내리는 작업을 이르는 은어다. 대기업 택배업체들은 택배 화물을 트럭에서 내리고 싣는 일을 전담하는 이들을 두지만 중소 택배업체에서는 택배 기사들이 직접 이 일을 해야 한다. 이날 아침 들어온 트럭은 5t 1대, 11t 2대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배송한 것이 분명한 아이 머리통만 한 종이상자부터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카펫 뭉치, 혼자 들다가 ‘어이쿠’ 소리 나올 법한 커다랗고 묵직한 상자, 왜 저런 걸 택배로 보냈을까 싶은 코카콜라 페트병 묶음, 겨울 끝물에 산 듯한 눈썰매, 논술시험 준비물이 분명한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분홍색 액체가 든 플라스틱통까지. 이렇게 실려온 택배 물량이 2700여 개쯤 된다고 했다.
감사2호, GIFTSET, 굴비, 전통한과, 와인, 올리브유세트, 동원선물세트, 상주곶감, 나주배, 사과. 타이밍이 이르다지만 그래도 설 선물로 보이는 것은 많았고 바빴다. “영칠, 영육, 대림, 당산, 문래, 문래, 여의도, 신길….” 스캐너를 든 택배 기사가 물품에 붙은 운송장 바코드를 읽어내며 배송 지역을 외쳤다. 영칠·영육은 영등포동 7가·6가를 말한다. 20m가 넘는 수동식 롤러컨베이어 좌우에 30명의 택배 기사가 나눠 서고, 그 뒤로 30대의 택배 차량이 화물칸 문을 열고 서 있다. “미치겠다!” “빨리빨리!” “이건 뭐야?” 자기 구역 물품을 찾아 트럭에 싣느라 다들 바쁘다. “힘없으면 그만두세요.” “택배도 체력 검증이 필요하다니까.” 머리 희끗한 택배 기사가 상자를 들다 낑낑거리자 다들 한마디씩 농을 던진다.
트럭에 쌓이는 물품들은 배송 지역에 따라 특색이 있다. 고급 선물세트는 여의도에 집중된다. 당산동 6가, 문래동 3가 일부에도 선물세트가 쌓인다. 그 동네에 여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반면 신길동 쪽은 가을에는 택배 물량이 늘어나지만 명절 때는 오히려 줄어든다. 가을에 몰리는 신길동 택배 물품은 시골에서 올라오는 농작물이 많다. 서울에 어렵게 자리잡은 자식들에게 시골에 사는 부모가 올려보낸 것이다. 농작물은 일단 무겁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가 많다 보니 택배 기사 허리를 끊어지게 만든다. “4월에는 매실하고 고구마들이 막 올라와. 7·8월에는 별게 없어. 그러다가 추석이 지나면 감자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12월까지 쌀하고 김치, 절임배추가 올라오지.” 경력 10년차인 한 택배 기사가 ‘택배 월령가’를 읊었다. 경기가 나쁠 때는 참치세트 같은 캔 종류의 선물세트가 많아진다고 한다. 부피는 크면서 값은 싸기 때문이다.
“와인이 시작됐구나~.” 누군가 와인의 등장을 알린다. 에어캡으로 단단히 포장된 와인세트 70여 개가 쏟아졌다. 배송지가 서울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원회관으로 찍혔다. 국회의 한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다른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다음주에 와서 보라고. 국회로 가는 거 수두룩해. 좋은 거는 다 먹어. 박근혜한테 김을 보낸 사람도 있어. 그런데 과연 그거 먹었을까?”
요즘처럼 택배 물량이 몰리는 기간에는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급하지 않고, 하루이틀 둔다고 상하지 않는 물품은 배송 순위가 밀리게 된다. 명절 선물이 쏟아지는 국회의원회관은 매일 배송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쌓아놓았다가 한 번에 배송한다. 반면 배송이 늦으면 상하는 ‘생물’은 무조건 당일 배송이다. 최종 소비자인지 다시 되파는 물건인지에 따라서도 배송 순위가 결정된다.
트럭에 짐 쌓는 것 자체가 지도트럭당 하차 작업에 40분~1시간이 걸린다. 아침 7시30분에 시작해도 오전 10~11시까지 하차 작업을 해야 한다. 물량이 많을 때는 오후 2시까지 하차 작업만 하다 끝나기도 한다. 하차 작업이 끝나면 자기 구역 배송 물품들의 운송장을 정리한다. ‘5분이 1시간 같다’는 택배 기사들인지라 운송장을 정리하며 동시에 배송 순서를 정해야 한다. 최단거리를 뽑아낸다. “택배 초보들은 이동 순서를 일일이 지도로 그려야 하는데, 우리는 운송장을 정리하며 저절로 머릿속에 정리가 돼요.” 빠른 손놀림으로 운송장을 정리하던 경력 7년차 김의선(54)씨의 말이다. “트럭에 짐을 쌓는 거 자체가 지도예요. 가장 먼저 배송하는 물품이 맨 위로 오게 짐을 쌓는 거죠. 급하다며 먼저 배송해달라는 전화가 오기도 하지만 갈 수가 없어요.” 아래에 깔린 물품을 빼내기도 어렵고, 그랬다가는 배송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다.
택배 기사들은 1시간에 12~15개 물품을 배송한다. 아니, 배송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매일매일 쏟아지는 택배 물량을 해결할 수 없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계속 딜레이가 된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소비자의 불만이 쏟아지고 물품 접수를 거부하기도 한다. 물품 하나 배송해서 몇백원을 남기는 처지에 난감한 일이다. 아무리 물량이 많아도 사람이 하루에 배송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밥 안 먹고, 한 집에 하나씩 배송한다고 가정하고 1시간에 12개를 배송한다고 치면, 5분에 1개씩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택배 물건을 들고 정신없이 뛰며 주정차 딱지를 떼는지도 살펴야 한다. 하루에 땀나게 뛰어도 딱지 한 번 끊으면 다 허사다. 워낙 많이 단속되다 보니 구청에서도 택배 차량은 어느 정도 봐주기는 한다. 하지만 카메라 주정차 단속은 ‘얄짤’ 없다. 그렇게 10시간을 일해야 120개를 배송한다.
택배 대금 2500원짜리 물품을 하나 배송하면 택배 기사에게 550원 정도가 떨어진다. 보내는 사람·받는 사람 주소와 연락처를 쓰는 운송장도 돈이다. 1장에 100원이다. 그걸 빼면 450원이 남는다. “택배 보내는 분이 운송장 쓰다가 틀렸다고 찢어버리면 무지 아까워요.” 경력 10년차인 서정훈(40)씨는 아주 미남이다. “초라해 보일까봐” 차 안에서 빵이나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지 않고 그냥 거르는 그지만, 잘생긴 얼굴로 100원짜리 운송장 하나에 조바심을 내야 한다. 그는 이곳 택배 기사 30명 가운데 유일한 ‘노란 넘버’ 차량을 몬다. 택배 개인사업자로 등록을 했다는 얘기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하얀색 넘버다. 말하자면 일반 차량으로 택배 영업을 하는 것인데, 불법이지만 택배업계의 현실이 그렇다. “개인사업자로 등록해서 좋은 거는 딱 하나, 벌금을 안 낸다는 거예요. 그거 말고는 좋은 거 없어요.” 택배 개인사업자는 다달이 지입료를 낸다. 서씨는 17만6천원을 낸다고 했다. 개인사업자가 되면 국민연금도 차량 보험료도 다 오른다. “월 350만원을 찍을 때도 있지만 밥값 빼고도 이런저런 비용으로 150만원이 나가요.” 밤 11시까지 일해서 이렇게 번다. 서씨는 영등포동 1~4가 구역을 맡고 있다. 술집 등 유흥업소가 많아서 ‘픽업’ 물량이 거의 없다.
택배 기사의 업무는 배송과 픽업으로 나뉜다. 배송은 다른 지역에서 픽업된 물품을 대신 갖다주는 일이다. 반면 픽업은 택배 기사 본인의 ‘영업력’이 필수적이다.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택배 물품을 따내는 것이 소득과 직결된다. 김의선씨는 다른 기사들보다 픽업 능력이 좋다. 다른 이들은 1t 탑차를 몰지만, 그는 2.5t 탑차를 몬다. 그만큼 많이 배송하고 픽업한다는 얘기다. “업무 시간은 배송이 80%를 차지하지만 승부는 픽업에서 갈려요. 배송만 하면 돈이 안 돼요. 구역에 있는 기업이나 도매상이 주요 고객이죠. 택배업체가 많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요.” 택배 기사들도 아르바이트를 쓴다. 혼자서는 명절 물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바’가 배달한 물품의 배송 비용은 고스란히 ‘알바비’로 나간다. 택배 기사는 이렇게 배송 시간을 아낀 대신 픽업 물품을 확보한다. 이날 김씨의 아내가 나와 픽업을 도왔다.
‘기다리세요.’ ‘금방 가요.’ ‘뭐예요?’ ‘누가 보낸 거예요?’ 택배 기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들이라고 한다. “뭐긴 뭐야. 우리가 어떻게 알아. 받아보면 알지.” “금방 온다고 해놓고 안 오면 속 터져. 진짜 5분이 1시간 같아.” 배송받을 사람이 없으면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그러면 또 통신요금 100원이 깎인다.
‘명절 특수’는 택배 기사들에게는 “다 거짓말”이라고 한다. 물품 판매업자들만 신난다는 거다. “월급쟁이야 놀아도 돈 받지만 택배 기사들은 쉬면 손해야. 이번 명절도 선물이 몰리는 3일 동안 반짝 일하고 일주일 놀게 생겼다고.” 경력 10년차라는 한 택배 기사가 쓰게 웃는다.
김의선씨 택배 트럭을 타고 배송을 따라가봤다. 30초 운전하다 내려서 배송, 1분 운전하다 내려서 배송. 13층, 9층, 7층 배송하고 5층에서 픽업. 분 단위로 정신없이 돌아간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김씨의 마음이 급해진다. “점심 먹으러 나가서 사무실을 비우면 나중에 다시 와야 하잖아요.” 710호 사무실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우르르 쏟아져나오며 문을 막 잠그고 있었다. 김씨는 아슬아슬하게 여직원에게 택배 물품을 건넸다. ‘불법 정차’한 김씨의 트럭 주변에 한진, 현대, CJ, 우체국 택배 로고를 단 트럭이 여러 대 서 있다. 다 경쟁이다.
택배 기사들은 택배 물품만큼의 사람들을 만난다. 당연히 별 사람이 다 있다.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은 문 앞에 택배가 열댓 개씩 쌓여 있다. 물건을 받아놓고도 안 받았다고 생떼 쓰는 사람도 있다.
‘명절 특수’는 “다 거짓말”, 판매업자만 신나경력 10년차인 이성열(57)씨는 이제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택배 기사로 남는 생존율이 10%도 안 돼요. 해병대보다 3배의 정신력이 필요하다니까. 나는 달관했어요. 정신을 비웠다는 얘기지. 정화되고 싶은 사람은 택배를 해야 해.”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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