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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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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에 꽃핀 ‘희망은행’

등록 2012-09-12 22:39 수정 2020-05-03 04:26

은행 대출상품을 파는 일을 해도,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 4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하늘 아래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던 공간은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월 20여만원짜리 고시원. 대학 중퇴 뒤 7년간 네 차례나 옮긴 일자리는 늘 불안정했다. 실적에 따라 벌이가 들쭉날쭉했다. 카드빚을 내기 시작했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취직은 더 이상 힘들어졌다. 그렇게 삶의 희망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지난 8월22일, 서울 여의도에서 전 직장 동료와 행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서른 살 김아무개씨 사연이다. 흉악 범죄를 논외로 한다면, 김씨와 비슷한 처지에 내몰린 이가 주변에 차고 넘친다.

지난 8월22일 청년연대은행 설립 준비단장인 조금득(오른쪽 둘째)씨와 추진위원들이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위치한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을 찾았다. 공제협동조합 이태헌 이사장(오른쪽 넷째)은 이날 청년들에게 조합 설립 과정과 운영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지난 8월22일 청년연대은행 설립 준비단장인 조금득(오른쪽 둘째)씨와 추진위원들이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위치한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을 찾았다. 공제협동조합 이태헌 이사장(오른쪽 넷째)은 이날 청년들에게 조합 설립 과정과 운영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5천원 이상 6개월 출자하면 대출 가능

대부업이 포함된 제2금융권에서마저 급전을 빌리기 어려운 신용 7등급 이하 저신용자들이 660만 명에 이른다. 어렵게 돈을 빌리더라도 비싼 이자가 생활고를 가중한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홀로 살아가는 개인들이 늘어나 생활의 고단함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어렵다. 빚이 빚을 부르는 수렁에 빠진 이들이 희망을 얻기란 불가능한 것일까. 기존 금융권에서 소외된 약자들이 스스로 생활 안전망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각자 돈을 조금씩 내놓고, 긴급하게 필요한 생활비나 의료비·주거비 등을 저금리로 빌릴 수 있는 ‘공제조합’이다.

지난 9월3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는 오상기(57·가명)씨는 동네 어귀에 있는 ‘동자동사랑방’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은행 통장과 비슷한 생김새의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출자금 통장’이 들려 있었다. 오씨는 지난해 4월, 1천원을 내고 공제조합에 가입해 매달 2만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6개월 이상 출자하면 돈을 빌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오씨는 노모에게 용돈을 드리려고 종종 조합 대출을 받는다. 이날 그는 출자금과 함께 대출 상환금 4만원을 조합에 냈다. 지난 6월 20만원을 대출받으며 매달 4만원씩 5개월에 걸쳐 갚기로 했다. 대출 이자는 원금의 2%다. 2008년 쪽방촌으로 오기 전 오씨는 사기를 당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극한 상황까지 몰려 결국 파산 신청을 했다. 지금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다. 공공근로로 버는 돈은 한 달에 50만원. 방세로 매달 20만원가량을 낸다. 남는 돈을 쪼개 생활하고 출자금을 마련하는 셈이다. 여윳돈이 없던 오씨는 조합 가입을 한동안 망설였다. 한푼 두푼 저축하려던 결심은 무너지기 일쑤였고, 병원에 가려면 급전이 필요해도 돈을 빌릴 곳이 없었다. 그는 조합에 가입한 것을 행운이라고 했다. “조합에서 돈을 빌려도 내가 좀 덜 쓰며 한 달에 얼마씩 갚아나가면 되고, 출자금은 출자금대로 쌓인께 나한테는 좋은 기라. 조합원이 된 다음부터는 어디 가서 승질 난다고 함부로도 안 해. 말도 좀 순화해서 하고 그러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조합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까봐.”

“날 믿어주는 곳이 있어 위로가 된다”

2년 전 사랑방마을 공제조합 설립을 이끈 이태헌(53) 이사장과 추진위원들은 모두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이다. 이 이사장은 2010년 1월 우연히 자활공제협동조합 아카데미에 갔다가 공제조합을 접하게 됐다. 한번 해보자 싶었다. 그해 3월 추진위를 구성한 뒤 출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8년 지역문화 공동체를 만들려고 출범한 단체 ‘동자동사랑방’ 사무실 한켠에 조합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좁은 공간이다. 조합원들이 알음알음 늘어 지난 7월 말 기준으로 282명이다. 쪽방촌에 사는 1천 가구 중 30%가량이 조합원인 셈이다. 출자금도 3400여만원으로 불었다. 조합원 중 70% 이상이 기초생활수급자다. 대출을 시작한 지 1년5개월이 지났지만, 빌린 돈을 갚지 않고 도망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한 달 출자금은 최소 5천원에서 최대 10만원이다. 1인당 출자금액을 제한한 것은 조합 내 양극화를 막고, 출자금을 많이 낸 조합원의 탈퇴로 재정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매달 내는 출자금은 달라도 모든 조합원은 1인1표, 평등한 의결권 및 선거권을 가진다. 주거비·의료비 등으로 빌려갈 수 있는 대출금 한도는 50만원이며, 사고 등 긴급한 사정이 생길 경우 최대 20만원까지 긴급 대출을 해준다. 조합원이 늘어나고 있지만 조합 운영 살림은 늘 쪼들린다. 대출 이자율이 낮아 이자 수입으로는 조합을 운영할 수 없다. 출자금은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돈이므로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조합은 폐자원 모으기, 후원 주점 등 자체 수익 사업이나 개인 후원금으로 운영비를 마련하고 있다. 창립 뒤 3년간은 출자금에 대한 이자 배당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공제조합은 쪽방촌 주민들에게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선물했다. 9월4일 동자동사랑방에서 만난 공제조합원 김홍기(54·가명)씨는 2년 넘게 매달 1만원씩 출자금을 내고 있지만 돈을 빌린 적은 없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이렇게 나가는 출자금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 손 내미는 건 어려워도 최소한 쪽방촌에 사는 우리끼리라도 도우면 좋은 거 아닌가. 언젠가 내가 (대출이) 필요할 때도 있는 것이고. 나를 믿어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서울역 같은 데 가면 글도 모르는 노숙인들한테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 조합원들은 매년 어버이날·정월대보름·추석 때 손수 음식을 마련해 마을 어르신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공제조합 선동수 간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헌신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는 조합원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 덕에 조합이 발전해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참극이 벌어진 8월22일 저녁, 동자동 쪽방촌에 20~30대 청년 10여 명이 찾아왔다. 청년연대은행 설립 준비단장인 조금득(34)씨와 추진위원들이었다. 사랑방마을 공제조합의 운영 방식을 배우고자 견학을 온 것이다. 청년연대은행은 청년 조합원들에게서 출자금을 모아 소액대출, 긴급 자금 지원 등을 해주고 조합원 각자의 재능이나 정보·살림 등을 나누는 단체를 지향한다. 내년 초 출범이 목표다. 이태헌 이사장은 이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자신의 경험담과 당부 사항을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은행도 고객 유치하려면 지점장이나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영업하지 않나. 그거랑 비슷하다. 우리도 초창기엔 집집마다 다 쫓아다니며 출자금을 받았다. 그러다 조합원들이 사랑방에 들러 출자금을 내도록 유도했다. 조합원 80%는 사무실에 들러 출자금을 납부한다. 조합원들을 한 공간에 모이게 해야 서로 소통하고 조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추석 명절을 맞아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원들이 손수 음식을 마련해 마을 어르신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매년 어버이날·정원대보름·추석 때 이런 행사를 열고 있다.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제공

2011년 추석 명절을 맞아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원들이 손수 음식을 마련해 마을 어르신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매년 어버이날·정원대보름·추석 때 이런 행사를 열고 있다.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제공

공제조합 모델로 한 청년연대은행 내년 출범

일자리가 없거나 수입이 불안정한 청년들은 기존 금융권에서 소외되기 일쑤다. 청년연대은행 추진위원으로 동자동을 찾은 이소희(36·가명)씨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월세 보증금을 마련하려고 은행 대출을 알아본 적이 있다”며 “은행 거래 실적도 없는데다 탄탄한 업체에 소속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대출을 해줄 수 없다고 하더라”며 씁쓸해했다. 2011년 2월, 국내 최초 세대별 노조인 청년유니온에선 청년들이 서로 돕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상호부조 단체 설립 논의가 시작됐다. 그해 1월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 월세방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됐다. 조금득 단장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최 작가가 돌아가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유니온 페이스북 그룹에 쌀이 떨어져 굶고 있다는 한 조합원 글이 올라왔어요. 혹시나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죠. 그런데 조합원들이 앞다퉈 쌀이나 생활비를 보태겠다는 댓글을 다는 거예요. 모금을 하자는 의견도 나왔고. 뭉클했어요. 서로 돕고 함께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뜻하고 다행스러운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청년유니온은 함께일하는재단·희망청과 함께 비정규직·아르바이트생·구직자 300여 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는데, 응답자의 48.5%가 빚이 있다고 답했다. 평균 부채 규모는 1018만원이었다. 지난 1년 사이 급하게 현금을 빌렸다는 응답자도 30.9%에 이르렀다. 생활비(51%)·학자금(21%)·주거비(12%) 마련 때문이었다.

청년연대은행 설립 준비는 청년유니온 창립멤버이자 전 사무국장이었던 조금득씨가 지난 3월 준비단장을 맡으며 본격화했다. 조 단장도 20대 시절 생계를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한 경험이 있다. 직장인·취업준비생 등 청년 30여 명이 청년연대은행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조직 운영 방식을 논의하고 있다.

추진위원 모임을 준비하려고 지난 6월 동자동 사랑방마을 공제조합을 처음 찾은 조 단장은 쪽방촌에서 청년연대은행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발견했다. 조합원들의 상호 신뢰와 자활 의지가 그것이다. 동자동 사랑방마을 공제조합은 조합원이 돈을 빌리고 갚지 않더라도 연대보증 등 강제로 상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이태헌 이사장은 “사람을 믿어야 해. 돈 안 갚을 걸 먼저 걱정하면 그게 조합이겠나. 조합원 한 명이 안 갚는다고 다른 조합원한테 그 돈을 물어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조합원 스스로 출자금을 마련했다. 외부에서 출자금을 들여오는 것에 대해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할머니 조합원이 이런 말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나야지 외부에서 돈 준다고 의존하면 협동이 무너진다.” 조금득 준비단장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쪽방촌 주민들의 탄탄한 협동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경조사 사업 규정을 보니, 조합원이 돌아가셨을 때 출자금을 어떻게 할 거냐부터 여러 가지 내용이 깨알같이 마련돼 있었다. 정관도 어디서 가져온 게 아니라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 하나하나 만든 거라고 한다. 사랑방마을 공제조합의 감동은 그런 데서 오는 것 같다.”

여럿이 모여 한 사람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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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헌 이사장은 공제조합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고 했다. 조합 운영비를 안정적으로 마련하는 일은 큰 숙제다. 쪽방촌 주민들에게 사는 ‘락’을 줄 수 있는 일자리 창출도 고민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청년연대은행 추진이 성공적으로 안착할지도 미지수다. 조금득 단장은 청년들과 간담회를 하다 보면, 출자로 얼마나 이득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해하거나 대형 은행들도 망하는 상황에서 이런 조직이 가능하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접하게 된다고 했다. 그럴 때 청년유니온이 안겨준 ‘비슷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공감하며 상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버팀목 구실을 한다. 이런 믿음은 이태헌 이사장이 청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도 올곧이 녹아 있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돕기는 어렵지만, 여럿이 모여 한 사람을 돕는 건 가능합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금융업 할 수 없게 돼있는 협동조합법
서민 금융 소외 풀도록 규제 완화돼야

외부 지원 없이 주민 스스로 출자금을 마련해 운영하는 공제조합은 반빈곤 운동 분야의 기대주다.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 등 지역자활센터를 통해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급전이 필요한 경우 주로 사채나 신용카드 대출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비싼 이자 부담에 시달려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활공제협동조합 설립 움직임이 2009년부터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을 중심으로 본격화됐다. 자활공제협동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8월 현재 전국적으로 50여 곳에서 공제조합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운영되는 공제조합은 ‘임의단체’로 분류돼 법의 테두리 밖에 있다. 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2011년 제정된 협동조합기본법과 관계가 없다. 협동조합기본법상 협동조합은 금융 및 보험업을 할 수 없다. 사회적 협동조합에 대해서만 주된 사업이 아닌 부대사업에 한해 출자금 총액의 한도에서 소액대출과 상호부조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제한의 근거는 소비자 피해 우려다. 장종익 한신대 글로벌협력대학 교수는 “기본적으로 협동조합이 모든 분야에서 자유롭게 설립될 수 있어야 하지만, 금융 분야의 경우 소비자 피해가 클 수 있고 한 금융기관이 도산하게 되면 다른 금융기관으로 전이되는 특성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금융 분야에 대한 규제 강화를 논의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민들의 금융 소외를 해결하려면 협동조합을 통한 공제사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마이크로크레디트 신나는조합 이성수 상임이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푼돈을 모아 운영하는 풀뿌리 자조적 금융기관은 현재 손실률이 거의 제로(0)로 리스크가 낮다고 평가된다”며 “이런 금융기관은 규모로 봤을 때 법적인 보장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운영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명확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지 않는 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건강한 금융기관을 양성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존 신용협동조합법을 통해서도 비영리법인인 신협을 주민 스스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서민 금융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못해왔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더구나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신협이 줄도산하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그 이후 지역신협 인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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