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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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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뭔지, 알려주마

등록 2012-09-05 18:24 수정 2020-05-03 04:26

참으로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나를 가르친 지난날의 스승들에게 일침을 가하려 한다. 모든 스승들이여, 당신들의 죄는 실로 막중하다. 초등 시절부터 작가란 직업을 가지고 싶어 했던 내게, 지난날의 스승들은 참으로 허망한 말을 일삼아 나를 기고만장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모멸스럽게 하고, 곤란하게 하고, 자멸을 북돋고, 살아 있음을 염치없게 했다.

죄책감을 피해갈 수 있게 한 사람들
작가는 현실을 안주하는 시대에는 끝없는 탐험가여야 하며, 풍요로운 시대를 믿지 않는 그리스 궁핍의 신처럼 만족을 모르고 낮은 자 속에서 허덕여야 하고, 창조주도 부러워할 창조를 해내야 하며, 작가 품속에선 등장인물의 생명까지 관할하니 이유 불문 삶과 죽음마저 통찰해야 하고, 전시엔 종군기자처럼 죽어가는 동지들의 주검 위에서도 절대로 울분에 따라 죽지 않고, 낱낱이 그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알려야 하며, 약한 자는 기꺼이 변호하고, 칼 앞에서도 펜을 꺼내들길 두려워 말아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느 작가에게는 모르나, 적어도 나에겐 그 모든 작가의 역할들이 감당키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소소한 사랑 따위, 괜한 울분에 차도 이해가 가능한 가족 얘기에 집착하는, 시대의 아픔을 철저히 외면한 판타지가 용납되는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죄책감은 없었느냐고? 피해갈 수 있었다. 오직 나의 다른 동료들 덕분이다. 그 동료 가운데 <PD수첩>의 작가 여섯이 있다. 나는 대개의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줄 테니(마음을 달랜다, 시간이나 뺏으면서), 그대들은 칼에 맞서 펜을 꺼내 들라! 나는 그들을 작금의 사태로 내몬 또 다른 장본인이다.
<PD수첩> 작가 일괄 해고를 듣던 날, 나는 새 작품을 집필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어느 누군가의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 되는 글을 양산해내고 있다. 화려한 배우의 뒤에 숨어, 시대의 슬픔을 가릴 황홀한 눈가리갤 준비하는 중이다. 그런 내가, 이 순간 내 글을 접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분 없는 작가질을 하는 나를 대신해 권력 앞에 펜을 든 동료들에게 마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서 나는, 작가는 ‘작’심하고 시대를 ‘까’는 직업임을 엄중히 알린다. 하여, 이네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쉼 없이 본연의 임무를 다해 깠고, 현 이명박 정부도 본연의 임무를 다해 ‘깔’ 뿐인 것이다. 따라서 왜 까느냐는 말은 옳지 않다. 살살, 적당히, 아프지 않게 까라는 말도 그릇되다. 쟤도 까라, 나눠서 까란 말도 어리광이다. 다만 까인 부분을 어떻게 바로잡을까를 고민하는 게 맞다.

아프지 않게 까라, 쟤도 까라도 그릇되다
권력의 영원은 없다. 단언컨대 나는 후배들에게 악랄히 이 자릴 빼앗길 것이며, 지금 권력을 든 자 그대들 역시 현재의 자릴 처절히 빼앗길 것이다. 현재를 지키려 무덤 몇 개 파는 일은 의미 없다. 우후죽순, 작금의 시대를 깔 작가들이 자라는 때문이다. 조심해라, 새로운 권력자들이여, 무서운 고사리장마다. 고사리 같은 작가들이 천지사방 터를 잡고 자라나고 있다. 절대 제어할 수 없다.


노희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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