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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 구긴 교과부의 보복

등록 2012-08-30 16:50 수정 2020-05-03 04:26

이쯤 되면 ‘소신’이라 봐주기도 민망하다. 학교폭력 징계 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재하라는 지침을 내려 일부 시도 교육청과 갈등을 빚어온 교육과학기술부가 마침내 ‘교육청 특별감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인권 역주행’으로 지탄받던 국가인권위원회조차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교과부의 학교폭력 기재 지침에 제동을 걸고, 믿었던 대학들마저 “학교폭력 문제를 입시에 반영하지 않겠다”며 하나둘 발을 빼는 상황이니, ‘학교폭력 근절’을 최대 치적으로 삼으려던 교과부 처지에선 시쳇말로 ‘꼭지가 돌’ 법도 하다.

“교육적 가치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 대책”

교과부가 8월23일 특별감사를 벌이겠다고 밝힌 곳은 강원·경기교육청이다. 이날 감사에 착수한 전북교육청을 포함하면 모두 3곳의 시도 교육청이 교과부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표적성’ 감사를 받게 된 셈이다. 전북교육청은 ‘학생이 형사처벌된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부 기재를 전면 거부하겠다’는 방침을 1학기 초부터 세워둔 곳이고, 나머지 두 교육청도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징계를 결정한 뒤 이를 학생부에 적는 것은 이중 처벌이자 과잉금지 원칙을 어긴 조처이기 때문에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거듭 밝혀왔다.

감사를 받게 된 세 교육청 모두 공교롭게도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있는 곳이다. 진보 교육감 그룹의 ‘좌장’ 격인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8월23일 기자회견까지 열어 “교과부가 아이들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종합적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학생부 기재를 보류하겠다”며 교과부 지침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도 예사로워 보이진 않는다. 이날 김 교육감의 발언 가운데는 “학교폭력 사실의 학생부 기재는 또 하나의 폭력”이라거나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법 상식에도 어긋나고, 최소한의 교육적 가치도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 대책”이라는 날선 언사가 포함돼 있었다.

교과부와 진보 교육감들의 충돌은 지난 2월 교과부가 학교폭력 전력의 학생부 기재 방안 등이 포함된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교과부의 지침은 지난해 12월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이후 학교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나왔다. 기존의 ‘물렁한’ 대책으로는 나날이 확산되는 학교폭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강경론이 비등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진보 교육감과 교육단체들은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교사가 학생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학생부에 주홍글씨처럼 적는 것이 과연 교육적이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형사처벌을 받은 범죄도 학생부에 적지 않는 것에 견줘볼 때도 명백히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일선 교사들의 지적도 나왔다. 결국 3월12일 강원교육청이 교과부 지침이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게 아닌지를 국가인권위에 질의하기에 이른다.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가해 학생의 징계 사항을 학생부에 일괄 기재하는 것은 ‘낙인효과’를 유발해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게 아닌가. 둘째, 기재된 징계 사항에 대한 삭제나 정정 안내가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에 명시돼 있지 않고, 그 기록이 준영구적으로 보관되는 것은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가.

교과부, 여론의 지지 받고 있다는 계산

한동안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갈등은, 7월30일 교과부 지침은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 관련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인권위 권고가 나오자 다시 불이 붙었다. 학생부 기재 지침과 관련한 인권위 결정의 요지는,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하고 졸업 뒤 5~10년 동안 보존토록 한 것은 입시와 취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한두 번의 일시적 문제 행동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힐 수 있어 과도하다는 것이었다. 인권위는 대안으로 졸업 전 삭제 심의제도나 중간 삭제 제도의 도입을 권고했다.

진보 교육감들도 행동에 나섰다. 민병희 강원교육감은 인권위 권고를 근거로 8월6일 “학생부에 학교폭력을 기록하는 것을 잠정 보류하라”고 일선 학교에 지시했다. 하루 뒤인 8월7일에는 장휘국 광주시교육감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가세했다. 장 교육감은 “인권위 권고를 존중해 연말까지 학생부 기재를 보류하겠다”고 했다. 곽 교육감은 교과부에 지침 보완을 요청키로 했다.

그러나 교과부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도 교육청을 거치지 않고 일선 학교에 학생부 기재와 관련된 교과부 지침을 직접 전달했다. 지침을 어길 경우 감사를 벌일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8월13일에는 학교폭력 징계 사항을 학생부에 기재했는지 현황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공문을 16개 시도 교육청에 보냈다.

팽팽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8월16일 교과부는 인권위 권고사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학교폭력 대책이 본격 시행되는 초기 단계에서 가해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대책의 효과를 감소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교과부의 강경 방침에는 학부모의 다수 여론이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계산이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은 8월19일 서울 주요 대학들이 학생부의 학교폭력 기록을 올해 대학입시에 반영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학들은 “학교와 교사마다 폭력에 대한 징계 기준이 다르고, 교육청마다 학생부 기재 방침이 달라 당락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평가 항목으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사정을 내세웠다. 입학사정관제로 신입생을 뽑는 대학 66곳은 학교폭력 여부도 평가 항목에 넣게 하겠다고 공언해온 교과부로선 처지가 난처해졌다. 뒤늦게 “시도 교육청과 고교는 각 대학에 학교폭력에 대한 자료를 제공할 뿐 이를 입시에 반영해 평가할지는 대학의 몫”이라고 한발 물러섰으나, 교과부로선 위신에 적잖은 손상을 입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강원·경기·전북교육청에 대한 특별감사 방침이 보복성 ‘표적감사’ 논란에 휩싸인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대규모 법정 다툼으로 비화할 가능성

현재로선 이 문제가 대규모 법정 다툼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기교육청 발표를 보면, 올해 들어 학교폭력과 관련한 행정심판 청구 건수는 18건이다. 이 가운데 10건이 생활기록부 기재를 취소해달라는 내용이다. 교육 현장에서 ‘유사한 행정심판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는 이유다.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김상곤 교육감은 8월23일 회견에서 “급우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학교폭력위원회에 회부되고 이 사실이 학생부 기록에 남게 된 한 중학생의 부모가 교과부 지침에 대해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정치적 해결이 여의치 않다면, 헌법재판소가 다시 한번 갈등의 최종 해결사로 나서야 할 상황이다. 헌재 앞에서 진보·보수 단체 관계자들이 위력 시위를 벌이는 익숙한 풍경이 머잖아 재연될지도 모르겠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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