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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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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 사회의 죄와 벌

한 사회의 이상 징후 충격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묻지마 범죄, 여의도 난동으로 재림
절망한 이들의 자살과 다르지 않은 현상, 실직자 등 낙인찍기 넘어 ‘분노의 악순환’ 주목해야
등록 2012-08-28 17:13 수정 2020-05-03 04:26

“방세가 밀려 있었기 때문에 여주인과 만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는 본래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의 성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긴장과 초조 상태에 있는 우울증 환자처럼,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여주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만나기를 꺼릴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살인 장소 ‘노상’ 22.2%

이유 없는 살인과 구원의 과정을 문학적·미학적으로 완성시킨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이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 ‘쓰레기 같은 생명’인 전당포 노파와 그 조카딸을 도끼로 때려 죽인다. 요즘 말로 하면 증오범죄, 묻지마 살인 정도가 될 것이다. 카뮈는 소설 에서 햇빛이 너무 강렬하다는 이유로 알제리인을 총으로 쏴 죽인 프랑스인 뫼르소를 사형장으로 보낸다. 어려운 정신세계가 배경으로 깔리지만 살인 동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시각에서는 식민지인을 아무렇게나 죽인 인종범죄쯤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 범죄 양상이 어디론가 폭주하고 있다. 원래는 ‘나쁜 놈’이 아니었던 이들까지 거리에서, 전철에서 모르는 이를 향해 갑자기 칼을 뽑아든다. 지난 8월22일 직장에서 퇴사한 뒤 신용불량자가 된 30대 남성이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이전 직장 동료 2명과, 길을 가던 행인 2명에게 칼을 휘둘러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하루 전인 8월21일에는 경기 수원에서 술에 취한 30대 남성의 흉기난동으로 1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나흘 전인 8월18일에도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서 일용직 30대 남성이 커터칼을 휘둘러 8명이 다쳤다. 평균화·유형화하기에는 사건 표본이 적다. 그럼에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사회·경제적 빈곤·소외층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벌이는 ‘절망살인’ 혹은 ‘묻지마 살인’, 일본식 ‘무차별 살인(無差別 殺人), 미국식 ‘다중살인’(Mass Murder)이라는 분석이 따라붙는다.

‘여의도 칼부림 사건’ 피의자 김아무개씨가 2012년 8월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사건 현장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이날 현장검증은 김씨가 심하게 몸을 떨며 호흡곤란 증상을 보여 15분 만에 중단됐다. /박종식 기자

‘여의도 칼부림 사건’ 피의자 김아무개씨가 2012년 8월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사건 현장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이날 현장검증은 김씨가 심하게 몸을 떨며 호흡곤란 증상을 보여 15분 만에 중단됐다. /박종식 기자

대검찰청에서 펴낸 을 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발생한 강력범죄(살인·강도·방화·성폭행) 가운데 범행 동기가 ‘현실 불만’으로 조사된 사건은 모두 371건으로, 전체 강력범죄 2만3332건 중 1.6%를 차지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살인(실제 범행이 이뤄진 경우, 준비만 하거나 실패한 경우 포함)이 70건, 강도가 48건, 방화 166건, 성폭행이 87건이었다. 살인은 발생 장소가 오픈된 곳인 ‘노상’인 경우가 전체 살인사건의 22.2%를 차지했다. 살인을 저지른 이의 직업은 무직(45.4%)이 가장 많았다. 학력은 고졸 이하가 60%를 넘었다.

20년 동일한 진단, 20년 실패한 처방

범죄는 한 사회가 목도하게 될 이상 징후를 사전 혹은 사후에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4년 전인 2008년 10월 서울 강남의 한 고시원에서 분식점 배달원일을 하던 30대 남자가 불을 지르고 흉기를 휘둘러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상이 나를 무시했다”는 것이 범행 동기였다. 그해 7월에는 막노동일을 하는 남성이 “세상이 싫어 교도소에 가고 싶었다”며 시청 민원실로 뛰어들어가 직원에게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4월에는 “세상이 싫어졌다”며 길 가던 여고생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3년에는 교통사고 장애로 실직한 60대 남성이 대구 지하철에 불을 질러 200여 명이 숨졌다. 1991년 “돈도 없는 촌놈”이라는 괄시를 받은 농민이 대구의 한 나이트클럽에 불을 질러 16명이 죽었다. 그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는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로 번번이 일터에서 쫓겨나 막노동일을 하던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놀던 어린이 등 23명을 자동차로 밀어버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족의 해체, 과도한 경쟁, 사회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불안, 기댈 수 있는 사회 안전망 부재 등의 진단이 나왔다. 지금과 마찬가지다. 20년 전부터 범죄는 사회의 이상 징후를 경고하는 빨간불을 켰다. 20년 전부터 동일한 진단이 나왔다. 20년째 처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사이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병폐와 충격의 임계치는 계속 상향 조정됐다. 사람들은 또다시 칼을 빼들었다.

우리와 여러모로 닮은 일본 역시 이미 1990년대부터 이런 유형의 범죄가 나타났다. ‘도리마’(通り魔·거리의 악마)로 통칭되는 이들은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장소에서 확실한 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두르거나 차로 돌진했다. 스트레스 내성이 낮거나 미숙한 인격, 사회에 대한 분노를 보인다. 형사사법 시스템을 이용한 사회적 자살이 동기인 경우도 있다(일본판 위키피디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예방처우연구센터 윤정숙 부연구위원(심리학 박사)은 “어떤 한 가지 측면에서 이번 사건들을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사회·경제적 원인으로만 범죄 동기를 구성해서는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 환경, 개인 심리, 직업, 가정사, 직장 내에서의 위치 등을 같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분노의 악순환’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상대에 대한 스트레스와 분노에 적절히 대처하는 기술이 갖춰지지 않은 이들은 이를 비뚤어진 방식으로 주변에 표출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고립된 이는 좀더 과격한 표출 방식을 찾게 되고 고립은 심화된다. 이런 일이 고리를 물고 반복되면서 ‘스노볼 효과’처럼 점점 커지다가 별안한 한번에 과격한 행동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적개심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으레 자신의 불만을 해소할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는 일용직, 무직자, 정신병력자, 장애인, 알코올중독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또다시 ‘우범자’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히기 마련이다.

22명 노동자의 경고도 다르지 않다

이번 사건들을 두고 는 ‘저성장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사설을 내놓았다. 사람 잡을 진단이다. 사회 양극화는 1%와 99% 양쪽 모두를 환기시킨다. 쌍용차 경영진의 해고 결정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22명의 노동자가 던지는 경고는 어떤가. 누구든지 잘라버릴 수 있다는 이 사회 주류들의 무서운 결기가, 물고 물리며 사회를 출구 없는 구석으로 몰아간다. 스스로 내파한 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로 답하고, 밖으로 맹렬히 쏟아낸 이들이 손에 피를 묻힌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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