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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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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미안해하지 말아요

등록 2012-08-23 23:54 수정 2020-05-03 04:26
2009년 8월 국회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엄윤섭씨가 자신의 일상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 화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엄씨 등 민간인들의 행적이 담겨 있는 이 동영상은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소속 신아무개 대위가 갖고 있던 것이다. 한겨레 김봉규

2009년 8월 국회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엄윤섭씨가 자신의 일상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 화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엄씨 등 민간인들의 행적이 담겨 있는 이 동영상은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소속 신아무개 대위가 갖고 있던 것이다. 한겨레 김봉규

쑥스러움을 타는 아빠와 수줍음 많은 딸이었다. 2011년 1월31일 저녁, 서울 통의동에 위치한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진행된 하와이 민속악기 우쿨렐레 강좌에서 만난 닮은꼴 부녀는 젊은 여성이 대다수였던 수강생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열 살배기 딸내미와 함께 우쿨렐레를 치는 사연을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마흔넷 아빠는 “옛날부터 딸아이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는데, 우쿨렐레는 아이들도 칠 수 있어 선택했다”고 말했다.

딸과 우쿨렐레 치던 바로 그 아빠  

지난 8월7일 동이 터올 무렵, 서울 동작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마흔다섯 사내가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울 동작경찰서에 따르면, 사내는 이 아파트 18층에서 뛰어내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 잡힌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낯설지 않다. 19개월 전 딸과 함께 우쿨렐레를 치던 바로 그 아빠, 엄윤섭씨였다. 8월5일 저녁, 서울 신림본동 집을 나섰다는 엄씨는 이틀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집을 나서기 전날 밤 그는 두 딸과 아내에게 평소에는 입 밖에 내지 않던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올해 초까지 연료전지에 관한 논문을 준비했다. 그 틈틈이 취미이자 생업 수단인 오디오를 만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을 둔 마냥 평범한 아빠였던 엄씨의 삶은, 그가 살아내야 했던 시대처럼 순탄치 않았다. 특히 3년 전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자신과 아내 안아무개(44)씨를 사찰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의 삶은 급격히 무너져내렸다.

무엇이 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09년 8월5일 오후, 경기도 평택역 앞 광장에서는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76일째 옥쇄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에 대한 폭력적인 경찰 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의 시선은 캠코더로 집회 현장을 촬영하고 있던 정체가 불분명한 30대 남성에게로 모아졌다. 결국 집회 참가자들한테 붙잡힌 이 남성의 정체는 기무사 소속 신아무개 대위였다. 신 대위가 소지하고 있던 수첩과 캠코더 테이프에 담긴 동영상 자료에는 군과 직접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의 그해 1월과 7월 행적이 날짜별·시간대별로 꼼꼼히 담겨 있었다. 피해자들은 주로 민주노동당 관계자이거나, 재일 민족학교에 우리말 책을 보내는 활동을 하는 모임인 인터넷 카페 ‘뜨겁습니다’ 회원들이었다.

24분가량의 동영상 속 엄씨는 집 인근에 마련한 오디오 공방 앞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직장으로 출근하는 그의 아내 모습까지 촬영돼 있었다. 그는 2009년 와의 인터뷰에서 “동영상을 보고 소름 끼치고, 경악스럽고, 공포스러웠다. 집사람은 잠도 못 잔다”고 호소했다. 그는 기무사가 왜 자신과 아내를 사찰했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 공안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다. 그저 2002년부터 민노당 관악구위원회 당원으로 활동하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력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었다. 엄씨는 2008년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했다. 침착하고 순한 성격인 그가 정치 전면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한 지인들은 별로 없었다. 출마 결심 배경에는 어려운 당 사정이 작용했다. 앞서 노회찬·심상정 의원 등이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하면서 민노당이 타격을 받았다. 서울 관악 갑·을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이들 역시 잇따라 진보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민노당에는 마땅한 후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 당선이 불가능한 선거였다. 그는 득표율 2.43%(2264표)로 낙선했다. 그는 당 활동을 접고 논문 준비와 생업 활동에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기무사 민간 사찰 사건이 터졌다. 엄씨는 2009년 11월9일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글에서 “거의 엉망이 돼버리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논문 작업과 생업 재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사색과 번민으로 무수한 밤을 밝혔다”며 당과 거리를 두고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찰 이후, 눈에 띄게 불안·공포 짓눌려 

엄씨의 선거 실무를 맡았던 서주호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사무처장은 사찰 사건 이후, 그가 눈에 띄게 불안과 공포에 짓눌렸다고 회상했다. “윤섭이 형님은 우선 휴대전화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동영상 화면에 나온 공방에 출입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마 피해를 입을까봐 걱정한 듯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유선전화나 공중전화로 연락을 해왔다. 어쩌다 우리 집에 찾아오면 인근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해 11월에 얼굴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기무사 민간인불법사찰대책위 최석희 대표도 사찰 전후로 엄씨의 행동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2009년 민간인 사찰 피해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사실 윤섭이를 괜히 불렀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이야기하지만, 눈빛이 흔들렸다. 몹시 불안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2010년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며 윤섭이가 더 힘들어할까봐, 그냥 빠지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엄씨는 지난 2월 서울 신길역 근처 둑 위를 달리다 발을 헛디뎌 추락해 석 달가량 병원 신세를 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지인들은 말했다.

기무사 소속 신아무개 대위가 2009년 갖고 있던 수첩 사본.

기무사 소속 신아무개 대위가 2009년 갖고 있던 수첩 사본.

기무사 민간 사찰은 대학 시절부터 엄씨를 괴롭혀온 우울증을 악화시켰으리라 추정된다. 엄씨와 오래도록 동거해온 우울증을 그저 개인의 비극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지미 헨드릭스 기타 사운드에 열광하던 까까머리 고교생은 1985년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5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전두환의 폭압이 짓누르던 시대, 캠퍼스엔 죽음의 그늘이 번졌다. 학교 밖 세상 일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1986년 4월 가깝게 지내던 학교 선배인 83학번 김세진·이재호씨가 서울 관악구 신림4거리에서 전방 입소 거부 시위를 주도하다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해 숨졌다. 그해 5월엔 서울대 농대에 재학 중이던 이동수씨가 학생회관 4층에서 온몸에 불을 붙이고 ‘미제는 물러가라’ ‘경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투신해 사망했다. 서울대 공대 85학번으로 엄씨와 함께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정호씨는 “그땐 방에 혼자 있기만 해도 너무너무 힘들고 그랬었다. 85학번 동기들은 아마 다 그런 경험을 가졌을 것”이라며 “운동이 내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각오는 했지만 눈앞에서 형들이 죽어나가는 일을 계속 목격하다 보니 너무나 괴롭고 고민이 됐다”고 말했다. 2004년 서울대 83학번을 중심으로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엄씨는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이정호씨는 궂은일을 도맡아한 차분한 친구로 엄씨를 기억했다. 그러나 엄씨는 2009년 기무사 민간인 사찰 사건 이후 기념사업회 모임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2009년 그 사건 이후, 거의 보지 못했다. 기념사업회에서도 실무적인 일을 맡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을 끊고 계속 사람들을 피했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공안기구 조작 사건이 많았잖나. 그런 것을 우려해 친구들한테 불똥이 튈까봐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 1년 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다시 만나자고 졸랐는데, 약속을 잡아주지 않았다. 12월 대선 이후에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면 자주 보겠지, 이렇게만 생각했다.”

“사찰 스트레스가 자살에 영향 가능성”  

엄씨에게 기무사는 오래도록 악몽이었다. 엄씨가 2009년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을 우연한 사건으로 치부하지 못한 까닭이다. 전두환이 대통령 노릇을 하던 폭정의 시대는 그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979년 10·26 사태로 중앙정보부가 위축돼 기무사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는데, 12·12 및 5·17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이 바로 보안사령관 출신이다. 보안사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각종 정치 공작에 불법적으로 개입했다. 1990년 10월, 보안사가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수환 추기경 등 1300여 명의 민간인에 대해 불법사찰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폭로했다.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기무사의 불법사찰과 정치 개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 폐지된 기무사령관 및 국가정보원장과의 독대 보고를 부활시켰다. 2005년 출범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한 한 인사는 ‘독대 부활’을 이렇게 평가했다.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통하지 않고 기무사령관을 독대한다는 것은, 기무사의 정보력을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기무사가 군 기무·감찰 활동 등 본연의 업무가 아닌 통치권자가 원하는 것들을 하려 하지 않겠나. 권력의 비호가 있기 때문에 기무사가 민간 사찰이 적법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이후 신설된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관실은 민간인을 사찰했다. 비슷한 시기에 기무사도 엄씨 등 민간인들을 사찰했다. 모두 불법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헌정문란 범죄다.

기무사 민간 사찰은 엄씨뿐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피해자대책위 최석희 대표는 “피해자 2명은 사찰받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손해배상 소송마저 포기했다”고 전했다. 동영상 자료에는 당시 민노당 비상경제상황실장으로 활동하던 최 대표의 아파트·사무소 전경과 서명운동 등 활동 모습이 담겨 있다. 최 대표는 누군가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에 무슨 일을 해도 위축된다고 했다. 지난 8월16일치 는 엄씨와 함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찰 피해자 10명을 인터뷰했는데, 이들도 비슷한 경험담을 털어놨다. 당시 민주노총 금속노조 서울지부 간부였던 구아무개(44)씨는 “차 안에서 (기무사 요원이) 나를 촬영한 것 같은데, 그때 이후 자동차만 보면 주춤거리거나 한 번씩 돌아본다”고 말했다. 민노당 당원이었던 백아무개(35)씨는 걱정할까봐 사찰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영상물에 자신이 왜 있었던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했다. “민간인 사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직도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사찰 영상은 그것뿐인지 의심스럽다. 국가가 사찰 배경에 대해 설명이라도 해줬다면 엄윤섭씨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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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런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에게 소견을 요청했다. 정신과 전문의 손창호 박사는사찰로 인한 스트레스가 엄씨 자살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개인들은 왜 사찰을 받는지 알 수가 없다. 이유를 모르니 사찰을 피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국가기관의 사찰은 피해자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심한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줄 수 있다. 더구나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기에 스트레스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 고문 등 물리적 공권력에 의한 피해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사찰 역시 개인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문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은 “국가기관으로부터 사찰을 당했을 때 괴로움을 받는 정도는 개인차가 있지만, 더 고통스러워한다고 해서 약한 사람이라고 치부되서는 안된다”라며 “사찰을 당하면 누구나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가가 진실 밝히고 사죄할 차례 

사찰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엄씨의 아내는 끝내 기자를 피했다. 전화와 문 메시지에 무응답으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8월15일 찾은 집 현관문 옆에는 부부의 이름이 적힌 문패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서주호 사무처장은 “사찰 동영상 자료에 형수(엄씨의 아내)의 직장이 노출돼, 그 이후 다른 직장으로 옮겼야 했다”며 “가해자들은 버젓이 돌아다니고, 피해자들이 왜 숨어지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7월27일 엄씨는 블로그에 글을 남겼다. 생전의 마지막 게시물이다. 학교 실험실에서 들으려고 만든 오디오 기기( 앰프) 회로도와 사진이었다. 그는 지난해 6월, 서울대 법인화를 반대하며 대학본부 점거 시위를 하는 후배들을 본 뒤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25년 전 나는 시내로 노상데모(가투)를 하러 나가면서도 강의실에 앉아 있는 과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었다. 진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꿈에도 그리는 좋아하는 전공 공부를 언젠가는 마음껏 열심히 해보리라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엄씨가 남긴 유품 가운데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다닌 듯,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너덜너덜해진 A4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거기엔 ‘저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합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유서였다. 평소 선하고 사람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탓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아들·아빠·남편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미안함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담은 말이었을지 모른다.

2009년 그 동영상엔 도대체 왜 엄씨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인가. 이제, 국가가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차례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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