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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비공개 뒤로 숨나

협정문 번역 오류 감추고, 비자쿼터 받아내지 못하고… 정보 독점하며 ‘국익’ 해쳐온 외교통상부, 통상절차법에 비공개 요건 추가해
등록 2012-07-03 08:01 수정 2020-05-02 19:26
외교정보 비공개를 일삼아온 외교통상부는 론스타가 지난 5월22일 제출한 한국의 ‘1호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사건’ 중재의향서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1년 7월1일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잠정 발효를 축하하는 김종훈 당시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맨 오른쪽) <한겨레> 김정효 기자

외교정보 비공개를 일삼아온 외교통상부는 론스타가 지난 5월22일 제출한 한국의 ‘1호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사건’ 중재의향서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1년 7월1일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잠정 발효를 축하하는 김종훈 당시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맨 오른쪽)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1년 3월8일 오전 9시30분께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402호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열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논의하려던 참이었다. 핵심 쟁점은 가 잇따라 보도한 한-EU FTA 번역 오류였다. 위원장을 맡은 유기준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심의를 시작하자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의 한 공무원이 귓속말을 했다. 유 의원이 회의실을 쭉 둘러보더니 물었다. “여기, 기자가 있습니까?” 한쪽 구석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멈추었다. 외교부 공무원이 기자를 쳐다보며 눈짓을 보냈다. 위원장이 다른 의원들에게 비공개 회의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기자는 쫓겨났다.

오죽했으면 론스타가 보도자료를

외교부는 비공개를 지향한다. 명분은 외교관계는 공개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FTA 협정문 한글본에 수백 개의 번역 오류를 내고 중요한 외교 문서를 부실 관리해 국익에 뚜렷한 손상을 입힌 당사자들이 당당하게 국익을 팔고 있는 셈이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제기하겠다고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론스타는 지난 5월22일 주벨기에 한국대사관에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는데, 보도자료를 낸 곳은 외교부가 아니라 금융위원회였다. 엿새나 지난 석가탄신일 휴일에, 그것도 신문사의 초판 마감이 끝난 저녁 6시쯤에. 보도자료의 내용은 암호문 수준이었다.

“2012. 5.22 론스타는 우리 정부의 조처로 인해 대한민국에 대한 투자와 관련해 손해가 발생했음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협의를 요청하는 문서를 주벨기에 대한민국대사관에 전달했다. 동 문서의 주요 주장 내용은 우리 정부가 론스타의 외환은행에 대한 투자자금 회수와 관련해 자의적이고 차별적인 조처를 했으며, 우리 정부가 론스타에 대해 자의적이고 모순적으로 과세함에 따라 론스타 쪽에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보도자료만 읽어보면, 한국의 ‘ISD 1호 사건’이 시작됐음을 감지하기 어렵다. ISD나 국제중재라는 용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론스타가 5월30일 다시 보도자료를 뿌렸다. 한국 정부가 밝힌 ‘협의를 요청하는 문서’가 사실은 ‘ISD 중재의향서’라고, 또 한-벨기에 투자협정(BIT)에 따라 6개월의 냉각(협의)기간이 끝나는 오는 11월에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위원회(ICSID)에 ISD를 정식으로 청구하겠다고.

ISD가 시작됐지만 외교부는 론스타 문제는 금융위원회 소관이라며 발을 빼고 있다. 지난해 ISD가 한국의 공공정책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괴담’이라고 몰아붙이던 외교부 공무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5월31일 론스타가 보낸 중재의향서 원문을 공개하라고 외교부에 청구했다. 정부의 조세·금융 정책이 외국 투자자에게 공격을 받는데다 국민 세금으로 수백만달러의 법률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사건이니 정보를 낱낱이 공개하는 게 상식적이다. 실제 미국과 캐나다는 외국 투자자가 중재의향서를 접수하면 국무부와 외교부 홈페이지에 곧바로 전문을 올린다.

미국 국무부와 캐나다 외교부에 ‘국익’따윈 없다?

한국 외교부는 이번에도 밀실을 택했다. 민변의 정보공개청구를 지식경제부와 금융위원회로 이송했고, 6월20일 비공개 처분이 나왔다. “공개청구 대상 정보(중재의향서)는 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고, 의사결정 과정 또는 내부 검토 과정에 있는 사항 등으로서 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익히 알고 있는 그 레퍼토리다. 한국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한 뒤 중재의향서를 공개해온 미국 국무부와 캐나다 외교부는 18년간이나 국익에 손상을 입히고 있는 셈이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국민이 알아야 할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관료들이 독점해 언론의 견제나 여론의 형성이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악순환을 부르는 외교부의 밀실 행정은 한두 건이 아니다. 2011년 6월 한-미 FTA 한글본 협정문에서 번역 오류를 296건이나 발견하고도 정오표를 공개하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비공개 이유는 “미국이 외교문서로 규정”했기 때문이란다. 한국 법원이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한다며 정오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지만 외교부는 따르지 않고 항소했다. 1년 가까이 지난 5월24일 갑작스럽게 외교부는 항소를 취하하고 한-미 FTA 한글본 정오표를 공개했다. 이번에도 “미국과의 협의가 완료된 데 따른 것”이란다. 한국 외교부한테는 한국 국민이나 한국 법원보다 미국이 우선인가 보다.

비공개라는 방패 덕에 외교부는 주요 외교서한을 부실 관리한 사실도 5년간이나 숨길 수 있었다. 2007년 6월 한-미 FTA 재협상 때 한국 정부는 전문직 비자쿼터를 미국에서 받아냈다고 발표했다. 전문직 비자란 건축사·엔지니어·회계사 등 전문직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미국 비자다. 김종훈 당시 협상 수석대표(현 새누리당 의원)는 “(앞서 미국과 FTA를 맺은) 오스트레일리아(1만500개)보다 더 많은 숫자를 받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이후 “미국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당연히 미국과 주고받은 전문직 비자쿼터 관련 서한도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외교부가 없다던 그 서한을 전직 외교관이 개인적으로 보관한 사실이 지난 4월 법원 판결로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민변이 청구한 정보공개청구 소송에서 미국 국무부와 주고받은 외교서한 두 통을 공개했다. ‘한국이 전문직 비자쿼터를 취득하도록 협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법원은 “김현종 당시 본부장이 미국과의 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으로부터 받았고, 전문직 비자쿼터 서한이 존재하는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외교부의 한-미 FTA 외교문서 수발 대장에 관련 내용이 없어 김현종 개인이 보관하고 있을 뿐, 외교부가 보유·관리한다고 볼 수 없다며 각하 판결했다.

국익이 걸린 외교서한을 부실 관리한 사실, 그로 인해 한국이 전문직 비자쿼터를 끝내 받아내지 못했음이 드러났는데도, 외교부는 변함없이 당당했다. ‘전문직 비자쿼터 서한 관련 행정소송 승소’라는 보도자료를 내어 “법원이 민변이 제기한 소를 각하해 외교부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만 알렸다. 반성이나 유감의 표현은 전혀 없었다.

“사실상 모든 통상 정보 공개 않을 우려”

외교부는 이제 새로운 무기까지 얻는다. 7월18일부터 시행하는 통상절차법을 보면, 비공개 요건이 추가돼 있기 때문이다. ‘통상협상의 상대국이 비공개를 요청하는 경우’나 ‘통상협상에 지장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외교부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민변은 “두 가지의 새로운 사유를 들어 외교부가 사실상 모든 통상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부의 밀행성은 당연히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모든 게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일까.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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