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나요? 아버지는 제게 밉지도 싫지도 않고 아무 추억도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엄마는 늘 ‘너희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야. 잘해야 돼. 너희 아빠가 벼르고 있다’고 말했지요.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평생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아빠가 집에 오면 가족들이 다 조용해졌어요.”(참석자 ㄱ씨·여)
지난 6월8일 서울 종로의 한 찻집에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라는 주제로 입을 뗐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모으고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와 지금 부모가 된 사람들이 들려줄 말을 찾는 자리였다. 이 자리는 상담과 심리학을 사회적 공공재로 사용하자는 뜻으로 방송되는 팟캐스트 청취자들의 오프라인 모임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상처와 흔적이 상담실 문 밖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자리기도 했다.
부재하는 아비를 대신하는 이명박·이건희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에겐 이 질문이 곤혹스럽다. 채울 수 있는 기억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날 두 아이의 아버지인 ㄴ씨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을 얻으려고 모임에 왔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내가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와 공유하는 기억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게 제 고민입니다.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왔냐’와 ‘가냐’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의 전부입니다. 아버지와 할 말이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해도 연세가 드셨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을 뿐 안타까운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아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실제 육성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이날 모임을 진행한 정신분석가 이승욱씨의 말에 따르면 “엄마를 통해 듣는 아버지의 메시지만 남아 있을 뿐 아버지는 늘 부재 중이며 집에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아버지는 하나도 없는 현상”이다.
오래전 아비는 “남로당”(이문열)이거나 “세상에 뜻이 있는 남자 되어”(이인직) 집을 떠났다. 지금 아버지들은 대의명분도 없이 집을 비운다. 아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노동과 주거현장이 분리된 이후 장시간 노동으로 꼬박꼬박 집을 나서는 이들은 집에 돌아와도 그다지 할 일도, 할 말도 없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교육을 위시한 여러 문제들을 국가가 대행함으로써 가족의 의미가 상실되고 아버지는 더 이상 어린이들에게 이상화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전통적인 남성 권위에 길들여진 탓에 더욱 그렇다. 가족에게 경제적 부양자라는 의미밖에 없고 정서적 유대를 잃은 아버지는 “지구 밖에 사는 사람만큼이나 나와 거리가 먼”(참석자 ㄷ씨·여) 사람일 뿐이다.
이름은 있으되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고개 숙인 남자들’류의 담론은 경제위기 때마다 어김없이 “아버지 권위 상실은 가족의 뿌리 흔드는 격”(, 2009년 3월31일), “기러기 아빠, 아내 아이 떠나보내고 정작 본인은…”(, 2012년 2월23일) 따위로 이슈를 바꿔가며 출몰한다. 남성의 상실감을 대변하는 부권상실 담론은 말 한마디에도 권위가 있었고 강하고 공격적이었던 아버지상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원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위기가 모권이 지나치게 커졌거나 아이들을 제때 통제하지 못한 때문일까. 그보다는 남성이 스스로 내면화해온 아버지 역할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한국 언론의 부권상실론의 변화와 정치성’, 임인숙). 이승욱씨는 “아버지들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를 지배하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건희 삼성 회장 같은 사람들이 사회적 아버지로 군림한다. 아버지를 권력과 통제로 오인하게 하는 사회적 가짜 아버지들이다. 가짜 아버지상을 버리고 진짜 아버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 ㄹ씨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다. ㄹ씨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고, 어머니가 아버지랑 싸울 때마다 아버지 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몇 년 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고 집을 나간 뒤 가족의 울타리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누군가를 분노하고 원망하며 술에 의지했다. 험한 말로 자식들을 내쳤다가도 또 어머니와의 사이를 중재해주기를 원하며 수시로 자식들을 불러댔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한테 큰 산이었어요. 아버지가 눈만 한번 크게 떠도 대꾸도 하지 못할 만한 카리스마가 있었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이 들수록 그 안에 모두가 등을 돌릴까봐 벌벌 떠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걸 보게 돼요. 제게는 이런 아빠를 모른 척할 용기도, 아버지를 거둘 배짱도 없어요. 어찌해야 할까요.”
문제적 아버지는 문제적 아들을 낳고
다른 참석자 ㅁ씨도 이렇게 말한다. “제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폭력적이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어요. 아버지를 정말 많이 싫어하고 멀리했어요. 제가 26살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3년 동안 누워 있다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가족한테도 잘하고 화내거나 하는 모습이 없었죠. 아버지에 대한 3년의 기억이 그전 25년 동안의 슬픈 기억을 덮기를 바라요.”
“아버지에게 제가 붙여준 별명은 ‘실패의 달인’이에요. 엄마가 붙여준 별명은 ‘만국 직업 박람회’예요. 식당부터 큰 사업까지 무수히 일을 벌여 저희는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야 했고, 지금도 아버지는 채권추심사를 피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참석자 ㅂ씨·남)
어떤 아버지는 자식에게 고통이다. “아버지는 테제도 안티테제도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나가야 할 출구를 아버지가 미리 다 막아놓은 셈이었다.”(김소진 ‘개흘레꾼’)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어느새 개흘레꾼의 아들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내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모습이 아버지와 꼭 빼닮았다는 것을 느끼고 정말 좌절했어요. 그걸 극복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참석자 ㅅ씨·여)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참석자 ㄴ씨는 “내 아이들도 나를 추억할 게 없는 사람으로 기억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팟캐스트 진행자들이 지은 책 에서는 부모의 자기부정적 메시지부터 버려야 한다고 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말라’며 희생해온 부모의 교육법은 자식에게 죄책감과 분노를 일으킬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나은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2010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전국가족실태조사에서 ‘고민이 있을 때 누구와 상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오직 0.9%의 아이들만이 아빠와 상담하겠다고 응답했다. 같은 기관에서 2011년 진행한 소통실태조사에서는 고등학생 중 33.5%가 아빠와 대화가 부족하다고 했다.
정신분석에서 문제적 아버지는 문제적 아들을 낳는다고 본다. 그날 모임에서 아들이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반복하는 사례가 소개됐다. 경북 영양에 사는 ㅇ씨는 얼마 전 암 선고를 받고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됐다. 그는 천주교 사제였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거듭 말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도 아버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집을 짓기 시작하자 이상한 열기를 느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정신분석을 받으며 비로소 아버지가 목수였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무의식중에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하며 천직을 만난 듯 신명을 낸 것이다. 그가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한 날은 공교롭게도 수십 년 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던 바로 그날이었다. 50대 초반의 한 남성은 지나친 건강염려증으로 상담실을 찾았다. 상담을 받다가 아버지가 50대 초반에 쓰러졌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재현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 때문에 신용불량자지만 “존경한다”
참석자 ㅈ씨는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오랫동안 갈등을 겪다가 관계를 회복하는 중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엄마나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어요. 어떤 자식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와서 어떻게 나한테 영향을 주었는지요. 부모를 원망만 했지 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거든요.” 다시 만난 아버지가 몇 년 전 유행했던 ‘아버지 신드롬’에서 그렸듯 구원자거나 무한한 부성애의 소유자는 아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일은 가족 상봉이 아니다. 우선 원망과 미움, 무관심으로 덮인 가족 관계를 걷어내고 생물학적 존재도 권력의 상징도 아닌 나와 살을 맞댄 인간을 발견하며, 그러곤 그와 나를 역사적·사회적 경험 속에서 한 맥락으로 파악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ㅂ씨는 “그럼에도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인간일지 몰라도 저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워줬어요. 한 번도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고 당신의 생각을 강요한 일이 없어요. 대학에 갈 때까지 제게 존댓말을 쓰고 자식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제게 조언을 구해요. 고등학교도 간신히 나왔지만 매일 1시간씩 저를 앉혀놓고 인도의 독립운동을 하던 네루가 딸에게 쓴 편지를 읽어주며 여러 말을 건넸어요. 지금도 아버지는 제게 큰 사람이에요.” 어른이 된 부모가 어른을 키운다.
참고 문헌 ‘아버지상의 사적(私的) 변화 양상’, 제36호, 이수정·이승하
‘한국 언론의 부권상실론의 변화와 정치성’, 제18집, 임인숙
|
상담은 넘치는데 개인들은 더욱 무력해진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 방 인테리어도 상담실에 와서 물어봐요. 특히 젊은 아빠들은 권력에 순응하는 쪽으로 길들여진 느낌이에요. 정신분석가의 말 한마디나 육아책이 시키는 걸 그대로 따르죠. 30대 아버지들을 보며 아버지들이 이제는 절멸하는구나 걱정했어요.” 관계 맺기보다 목표가 위주가 된 사회에서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단종 위기에 처했다. “상담실에서 듣다 보면 우리 사회의 자정 능력이 임계점을 넘어서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을 합니다. 심리학이 물 흐르듯 기능하기를 바랍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명태균 녹취에 확신”…전국서 모인 ‘김건희 특검’ 촛불 [현장]
[영상] “국민이 바보로 보이나”…30만명 ‘김건희 특검’ 외쳤다
해리스-트럼프, 7개 경합주 1~3%p 오차범위 내 ‘초박빙’
로제 아파트는 게임, 윤수일 아파트는 잠실, ‘난쏘공’ 아파트는?
거리 나온 이재명 “비상식·주술이 국정 흔들어…권력 심판하자” [현장]
노화 척도 ‘한 발 버티기’…60대, 30초는 버텨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에르메스 상속자 ‘18조 주식’ 사라졌다…누가 가져갔나?
이란, 이스라엘 보복하나…최고지도자 “압도적 대응” 경고
구급대원, 주검 옮기다 오열…“맙소사, 내 어머니가 분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