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 재수사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이유야 어쨌든 처음 수사가 부실했거나 잘못됐다는 것을 검찰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증거나 진술이 튀어나와 재수사를 하게 됐더라도, 처음 수사할 때는 왜 그걸 확보하지 못했는지 ‘수사 의지’를 의심받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재수사는 검찰에 잘해야 본전이다. 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권력형 사건 수사는, 결론을 내놓아도 ‘특검’(특별검사 수사)으로 가자고 하기 일쑤다. 검찰 수사를 왜 못 믿느냐고 누굴 탓할 수도 없다. 그동안 말아먹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검찰이 저지른 원죄가 참 크다. 그래도, 재수사라도 잘하면 면피는 할 수 있다. 노력한 수사, 외압을 버텨내는 검사는 박수를 받는다. 특수통, 공안통, 강력통, 기획통, 무슨 통, 어디서든 1등만 했다는 잘난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라는데, 대한민국 검찰은 그것도 못한다. 아니, 안 한다. 이명박 정부가 저지른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재수사가 딱 그 모양이다.
장 전 주무관 말 첫 보도 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 사건을 재수사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박해윤)이 지난 6월13일 재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을 사찰 대상에 올렸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사찰 지시·보고의 ‘윗선’은 밝혀내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예고된 부실 수사였다. ‘대통령 하야’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다급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관련자들의 입을 막겠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천만원의 돈을 안기고 새 직장까지 알선했다. 지원관실에서 작성한 이른바 ‘대통령에 대한 일심(一心) 충성 문건’이 재수사 과정에서 드러나, 사실상 ‘윗선=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점이 드러났는데도 검찰은 “사찰 내용을 보고한 사실이 없다”(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정정길 전 대통령실장)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은 지난 3월 초 “최종석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이 증거인멸을 지시했다”는 장진수 전 지원관실 주무관의 말을 첫 보도했다. 장 전 주무관의 추가 폭로가 이어지자 이에 떠밀린 검찰은 3월16일 재수사에 착수했다. 채동욱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지난 4월1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검찰은 이 사건 관련 각종 의혹에 대한 진상을 조속히 규명해 엄단하라는 것이 국민 여러분들의 여망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제기된 모든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겠고, 그 결과 범죄 혐의가 인정되는 관련자들에 대해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 엄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랬던 검찰이 내놓은 결과물은 어떤가. 재수사 결과 발표를 하며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실의 직권남용 사례를 자세하게 적시해 ‘물’을 타더니,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제안했던 ‘민간인 사찰방지법’ 제정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참여정부는 짓밟고, 이명박 대통령은 봐주고, 유력한 차기 권력인 박근혜한테 줄을 서는 치졸함이 민낯으로 드러난다.
권재진 법무부 장관은 재수사 결과 발표 이틀 전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에서 곧장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다. 검찰 수사의 중립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민정수석으로 있으며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과 1차 수사를 무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 민정2비서관으로 있던 김진모 서울고검 검사도 같은 의혹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고려대는 ‘하이패스’다. 고려대를 나온 한상대 검찰총장은 지난해 8월 취임 일성으로 뜬금없이 “종북세력 척결”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에게 ‘신호’ 하나는 제대로 보낸 셈이다.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도 ‘대구·경북(TK)-고려대’ 출신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 서울중앙지검 1차장으로 승진한 그는 MBC
국정조사나 특검 수사 수순으로
검찰의 명운과 자존심이 걸린 사건도, 당장 자기 자리 보전이나 다음 자리를 생각하느라 뒷전으로 밀어버린다는 비아냥이 나온다. 검찰은 민간인 불법사찰 재수사 결과 발표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과 아들 시형씨의 서울 내곡동 사저 터 헐값 매입 사건에 대해서도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재수사가 필요한 사건 목록을 한 줄 더 늘린 셈이다. 이런 식이라면 경찰과 수사권을 두고 싸울 자격이 없다. 검찰총장 임기 2년을 보장해줄 필요도 없다.
오는 7월께 검사장 승진 인사가 있을 예정이다. 뒤이어 검찰 주요 보직 인사도 진행된다. 민간인 불법사찰 재수사와 관련된 이들이 어느 자리로 가는지 똑똑히 지켜보자. 김진모 검사가 검사장으로 승진하는지도 지켜보자. 검찰 관계자는 “정권 입맛에 맞게 수사하고 결론을 내는 검사들에게는 확실하게 인사 불이익을 줘야 한다. 그래야 그런 수사를 안 한다”고 했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국정조사나 특검 수사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수사 외압에 대한 조사, 검찰 수사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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