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팀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정규시즌 경기가 열린 6월5일 저녁. 서울 잠실운동장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야구장 중앙매표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내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루한 행색의 중년 사내가 따라붙었다. “지정석 있어요, 지정석.” 매표소 앞 대기 행렬의 길이를 가늠하며 답변을 망설이는 사이, 사내의 호객 강도가 올라갔다. “지금 가봐야 표 못 구해. 몇 장 필요해요?”사지도 않을 암표를 두고 실랑이할 여유가 없었다. 조용히 기자 신분을 밝혔다. 사내는 곧 사라졌다.
“KIA·롯데 한국시리즈 치르는 게 로망”
매표소 앞에는 한눈에 암표상임을 알 수 있는 50~60대 남자 예닐곱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단속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5분쯤 지났을까. 그가 나타났다. 여느 암표상들과는 입성부터 달랐다. 다부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흰색 기능성 스포츠티에, 짧게 깎아 올린 백발은 헤어젤을 발라 단정히 빗어 넘겼다. “기자시라고요? 암표상 취재 나왔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그에게 딱히 둘러댈 말이 마땅찮았다. “뭘 알고 싶어요? 다 얘기해줄게. 며칠 전 뉴스에 암표상 얘기 나오던데, 순 엉터리야.” 광활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쾌재를 불렀다.
인근 선술집으로 옮겨 그와 마주 앉았다. 잠실 암표상 사이에서 ‘오야지’로 통하는 이아무개씨였다. 50대 중반인 그는 1990년대 초부터 암표를 팔았다고 했다. “가장 화나는 게 뭔 줄 알아요? 제대로 취재도 안 하고 우릴 파렴치범 취급하는 거야.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도 야구 붐 조성에 기여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씨의 논리는 나름대로 정연했다. 간추리면 이랬다. ‘표는 한정돼 있고, 관람하려는 사람은 많다. 그러니 돈과 열정이 있어도 관람을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암표 장사는 그런 야구팬들을 위해 수수료(웃돈)를 받고 표 구매를 대행해주는 일종의 서비스업이다.’
이씨에 따르면, 전국 야구장 주변에서 활동하는 암표상은 120명 정도다. 대부분 50대 이상 남성이다. 여성은 20명이 채 안 되는데 대부분 70대 이상 고령자다. 이 가운데 잠실야구장에 고정 출근하는 암표상은 20여 명 선. 매진 경기가 드문 주중에는 10명 이하로 떨어질 때도 있지만, 매진 확률 100%인 주말 ‘빅매치’ 때는 그 수가 2배 이상 늘어난다고 했다. 이들이 말하는 빅매치란 관중 동원 능력이 뛰어난 두산과 LG의 서울 라이벌전이나, 서울팀 중 하나와 ‘전국구’ 구단인 KIA나 롯데가 맞붙는 경우다. 이때는 경기가 없는 지방의 암표상들까지 대거 상경한다.
“플레이오프나 한국시리즈 같은 포스트 시즌엔 전국 암표상이 다 한곳으로 모인다고 보면 돼. 그렇게 되면 100명이 넘어. 우리 불만은 관중이 적은 SK가 포스트 시즌에 항상 낀다는 거지. 게임은 재미없는데, 워낙 야구를 잘하니까. 암표상들 로망이 뭔지 알아? 두산·LG·KIA·롯데가 4강에 오르고, 한국시리즈를 KIA와 롯데가 이곳 잠실에서 치르는 거. 표만 확보하면 돈을 그냥 줍는 거지. 나 은퇴하기 전에 꼭 한 번 봤으면 좋겠어.”
편의점 ATM·PC방 ‘젊은애’ 활용해 수백장 확보
표의 출처가 궁금했다. 기업형 공급책과 생계형 판매책이 분리돼 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이씨 말은 달랐다. 일반 암표상들은 대부분 인터넷보다 성공률이 높은 편의점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 경기 열흘 전 오전 11시에 예매한다고 했다. 신용카드 한 장당 4장까지 뽑을 수 있는데, 빅매치의 경우 돈이 되는 지정석 표는 5분이면 매진된다. 신용카드가 아무리 많아도 ATM 기기로 암표상 한 명이 확보할 수 있는 표는 4~8장. 나머지 표는 같은 시각 인터넷 티켓링크를 통해 예매하는데, 컴퓨터 조작이 서툰 암표상들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부탁해 표를 확보한다. “50~60대 컴맹들이 무슨 수로 젊은 친구들 실력을 당해내겠어? 그러다 보니 1인당 많아야 20장 정도밖에 못 구하는 거지.”
물론 이씨에겐 그만의 비법이 있었다. 단골 PC방에서 고교생 ‘알바’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아이디(ID) 하나당 6장씩 예매할 수 있는데, 내 밑에 애들이 10명쯤 돼. 실적만큼 수고비를 주는 거지. 보통 장당 1천원씩 줘. 수완 좋은 애는 1만원도 받고, 1만5천원도 받아. 걔네들은 아이디를 여럿 갖고 있거든. 편의점 ATM에서 확보한 거랑 인터넷에서 예매한 거 합치면 규모가 상당해. 여기에 티켓링크에서 대량으로 확보한 예매표를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서 팔아먹는 대학생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한테 웃돈을 주고 남는 표를 넘겨받으면 기백 장은 그냥 넘기는 거지.”
이렇게 확보한 암표는 원가의 2배가 넘는 가격에 판다. 7만원짜리 프리미엄석은 14만원, 4만원짜리 테이블석은 8만원, 1만5천원짜리 지정석(블루)은 3만~4만원, 1만2천원짜리 레드석은 2만5천원이 ‘공정가’다. 월수입은 빅매치가 얼마나 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빅매치가 많은 5월에 이씨는 1500만원을 벌어들였다고 했다. 빅매치가 아닌 경기는 아무리 잘 팔아도 평일은 10만원대, 주말 경기는 30만원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게 이씨의 전언이다.
마진율이 지나치게 높은 게 아니냐는 물음에 이씨는 이렇게 반문했다. “보통 표 예매하고 낮 12시 전에 경기장에 나와. 자가용 타고 와서 표 사가는 손님들이 있으니까. 일이 끝나는 시간은 보통 저녁 8시. 노동시간이 짧은 게 아냐. 게다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좀 커? 경기 전에 비라도 오락가락해봐. 아무리 빅경기라도 누가 암표 사서 야구 보려고 하겠어?”
이씨가 무엇보다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경찰 단속이다. 벌금(5만~10만원)이야 암표 몇 장 더 팔면 해결되지만, 문제는 조사를 받는 동안 장사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한참 표 팔아야 할 시간에 단속에 걸려봐. 빅경기에선 어렵게 확보한 몇백 장이 그냥 휴지 조각 되는 거지. 그 돈이 얼마야?”
최근 야구장 암표에 대한 팬들의 민원이 늘어 경찰 단속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었다. 관할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지난해 5월까지 23건이던 암표상 단속 건수는 올해 들어 56건으로 늘었다. 경찰 관계자는 “평일에는 경기장 인근 잠실지구대에서 단속을 나가고, 주말에는 형사과와 기동대 경력까지 지원을 받아 대대적 단속을 벌이지만, 웃돈을 받고 팔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지 않는 한 현장 체포를 할 수 없어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효율이냐 가치냐, 경제학계 오랜 논쟁거리
유통되는 암표의 규모에 대해선 구단과 암표상 쪽 얘기가 크게 엇갈렸다. 한 서울 연고 구단의 마케팅팀 관계자는 “많아야 전체 발매권(2만7천 장)의 1%(270장) 수준”으로 추정했다. 반면 암표상 이씨는 “그건 주중 일반 경기에나 해당할 뿐, 주말 빅매치나 포스트시즌 경기는 3천 장 이상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줄서기의 평등주의’가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한국 사회에서 암표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하지만 암표는 그 자체로 경제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그레고리 맨큐 같은 시장주의자들은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면, 그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소비자에게 재화가 돌아가야 한다”며 암표를 옹호해왔다. 반면 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생각은 다르다. 기꺼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려는 것이 꼭 그 재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샌델은 말한다. “VIP 관람석에 앉을 만한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선발 출전 선수들의 평균 타율을 전부 꿰는 팬들이 그(돈 많은 암표 구매자)들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누구 말에 공감하는가. 망설이는 당신을 향해 암표상 이씨는 말한다. “우리가 명절날 고향 갈 기차표를 팔아먹는 놈이라면 비난받아도 싸지.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스포츠, 즐기는 오락이잖아. ‘서비스업’이라 인정 안 해줘도 좋아. 그냥 ‘필요악’ 정도로 봐주면 안 되겠어?”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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