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3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평양 동대원구 연제동 방직거리에서 평양대마방직 평양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서울에서 전세기를 타고 250명이 참석해 10년 만에 이룬 쾌거를 축하했다. 평양대마방직은 북한에 진출한 첫 남북 합영회사로, 남쪽 안동대마방직과 북쪽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산하 새별총회사가 공동 투자했다. 4만7천㎡ 터에 북한산 대마로 삼베 제품을 생산하고, 양말과 속옷 등 일반 면직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 주변 지역과 격리된 개성공단과 달리, 평양 시내에 지어졌고 전문대를 졸업한 북쪽 노동자를 350명이나 뽑아 북쪽 사회에 끼칠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았다. ‘평양 진출 1호 한국 기업인’ 김정태(69) 안동대마방직 회장은 “북쪽은 그런 말을 쓰지 않지만 사실상 개방을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쪽 기업의 직접 손실만 약 5조원
지난 5월17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건물에서 만난 김정태 회장은 줄담배를 피웠다. 2010년 5월24일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응해 북쪽과 교역 및 교류 중단을 선언(5·24 대북 조처)한 뒤, 그는 한국 공장과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고 신용불량자가 돼 신용카드 한 장도 쓸 수 없는 처지가 됐다. 1968년 섬유업계에 뛰어들어 40년간 실크·면·삼베 등을 짜서 연매출 60억원을 올리던 그였다. 삼베 기술 특허로 ISO9001 인증을 획득해 섬유업계 최고 영예인 한국섬유대상(1999년)을 받았다. 김 회장은 지난 1년6개월간 속병으로 매주 세 번씩 병원을 들락거렸다. 잠을 이룰 수 없어 거실 쇼파에 기대어 눈을 붙였더니 어깨도 망가졌다. 북쪽에 투자한 1500달러(약 180억원)을 날린 것은 물론이고 회사마저 지난 4월 휴업했다.
남북경협피해조사단이 지난해 1월부터 석 달간 실태를 조사해보니, 남북경협 업체 1107곳 가운데 497여 곳이 폐업·휴업 등의 이유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홍순직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이 2008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에 따른 남북한 경제 손실을 분석한 결과, 남쪽 기업의 직접 손실만 45억8734만달러(약 5조원)에 이르렀다. 개성공단 사업이 23억2141억달러로 가장 많았고, 남북교역(14억6734만달러)과 금강산관광사업(7억5350만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이는 북쪽의 손실 추정액인 8억8384만달러(약 1조원)의 5배가 넘는 액수다. 북쪽을 압박하려고 이명박 정부가 남북경협을 중단시켰는데 남쪽 기업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경남 안동이 고향인 김 회장이 북쪽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1997년 여름이었다. 섬유회사로 돈을 모은 김 회장에게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미국 신부가 연락해 미국 신문에 실린 북쪽의 참상을 보여주며 돕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가난한 아이들도 돕는데 북쪽은 우리 동포가 아니냐고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는데 그들은 북쪽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지 않은가’ 싶었다. 그는 미국 신부들과 수도회 소속 신자들이 구성한 선교구호회에 참여해 북쪽에 국수 제조 설비와 밀가루를 지원했다.
1998년 8월 김 회장은 북쪽의 상황을 들여다보려고 미국 신부들과 함께 중국 지린성 투먼시 웨칭진에 방문했다. 웨칭진 거주자는 대부분 조선족이라서 탈북자가 많이 찾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북쪽 소년을 처음 만났다. 부모 잃은 ‘꽃제비’였다. 몸집은 초등학생 3∼4학년 정도인데 나이가 17살이라고 했다. 부모는 마지막 밥상을 할아버지·할머니께 올리고는 먹을거리를 찾아나섰다. 스무 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소년이 부모를 찾아보니 주검 안치소에 잠들어 있었다. 굶어 죽은 부모를 뒤로하고 소년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만강을 넘은 참이었다.
북에 섬유산업 기술 이전하려 노력
안동대마방직은 한반도와 환경이 비슷한 웨칭진에 땅을 사서 대마를 키우며 중국 산둥성 타이안시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했다. 김 회장은 본격적으로 북쪽 소년들을 도왔다. 돈을 주는 게 해결책이 아니었다. 소년들은 술·담배에 중독됐고, 돈이 떨어지면 도둑질을 했다. 남한으로 데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 할아버지·할머니가 살고 있는 북쪽으로 소년들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손수레와 석탄을 구입해 장사를 할 수 있게 1천달러를 챙겨주면 소년들은 비닐에 싼 그 지폐를 먹었다. 북쪽 어른들이 중간에 빼앗지 못하도록 말이다. 김 회장을 유난히 따랐던 한 소년이 북쪽으로 되돌아가며 말했다. “돈을 벌어서 회장님처럼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조국으로 돌아가면 공장이 없어서 기술을 배울 수 없습니다.”
소년의 말에 김 회장은 ‘마지막 사업’을 구상했다. 당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20만 곳이 넘었다. 김 회장도 특허기술을 갖고 중국에 공장을 열었지만 몇 년만 지나면 중국 직원들이 기술을 빼내 다른 공장을 차리기 일쑤였다. 북쪽은 중국보다 토질이 좋아 대마가 잘 자라고, 한국이나 중국처럼 발전하려면 모든 산업의 기초인 섬유산업이 북쪽에 필요할 것이라는 데 그의 생각이 미쳤다. 섬유 제품을 3억달러만 생산하면 북쪽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마지막 사업’은 북쪽에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곡식이 부족한 북쪽에서 콩과 대마를 이모작할 수 있게 기술을 개발한 김 회장은 조선족 사업가와 재일동포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뚫으려 힘썼다. 3년간 북쪽의 당·군부·보위부에 사업계획서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2002년 12월 마침내 새별총회사가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한걸음에 북쪽을 방문했더니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면 돈을 내라고 요구했다. 북쪽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 그는 버텼다. 그러자 북쪽이 다시 연락해와 임가공공장을 먼저 세우자고 했다. 합영공장을 원한 김 회장은 성에 차지 않았지만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던 재래식 공장을 섬유공장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대마 종자를 평양·황해도·평안도·자강도 등의 농가에 나눠줘 시범재배해, 대마로 실과 천을 제조했다. 가능성을 확인한 북쪽이 평양 시내에 남북 합영회사를 설립하기로 김 회장과 2003년 11월 합의했다. 북쪽이 부지에 공장을 건설해 종업원을 주면 남쪽이 첨단설비를 채워 기술력을 전수하는 방식이었다. 북쪽 소년을 만난 지 5년 만이었다.
북쪽의 산업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터라 A부터 Z까지 다 손을 봐야 했다. 불안정한 전압을 잡으려고 발전소에서 직접 케이블을 7∼8km씩 공장으로 연결하고 들쑥날쑥한 전력 주파수를 잡는 첨단설비를 추가했다. 북쪽 방직공장의 기술력이 1970년대 수준이라서 분업이 불가능해 원사공장부터 염색·가공 공장까지 16개 공장을 지었다. 컴퓨터 자동직기 등 충격에 민감한 첨단기기는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육로로 옮겨졌다.
“우리가 개척한 걸 중국이 싼값으로 빼앗아”
남쪽 기술자들이 평양에 상주하며 공장을 시범운영하자 북쪽의 잠재력이 드러났다. 중국 노동자가 8년에 걸쳐 익힌 기술을 북쪽 노동자는 1년이면 습득했다. 하지만 월평균 임금은 100달러에 못 미쳐, 중국 노동자보다 훨씬 적었다. 노동시장에 따라 임금을 3단계로 차등 지급했더니 더 많은 월급을 받으려고 야근하는 북쪽 노동자가 생겼다. “손재주가 좋고 성실해서 똑똑한 우리 민족다웠다”고 김 회장은 회고했다. 우수한 원자재(북한 대마)에다 값싼 노동력을 결합하면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008년 소년을 만난 지 10년 만에 꿈에 그리던 평양공장 준공식을 했다. 감격도 잠시, 남북관계가 악화됐다며 정부가 통행을 막아 남쪽 기술자의 발이 묶였다. 원자재도 제대로 살 수 없어 정상 가동을 못한 채 고사 직전으로 내몰렸다. 아내가 노후자금으로 푼푼이 모은 마지막 자금까지 털어넣었는데 5·24 조처가 터졌다. 노동자 3300명, 연매출 6천만∼1억달러의 목표는 멀어져만 갔다.
김 회장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남북경협은 노태우 정부가 1988년 7월 7·7 선언(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한 이후 20여 년간 지속돼왔기 때문이다. 연평해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수많은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위기 때도 지속돼왔던 사업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 정부’라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5·24 조처가 시행되고 2년이 지난 현재, 김 회장은 “한국 기업이 20년간 개척한 것을 정부가 막아 중국이 싼값으로 다 빼앗아가고 있다”고 한숨지었다. 실제로 북쪽 경제의 중국 의존도는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북-중 무역은 2003년 10억3천만달러였는데 2010년 34억6천만달러로 7년 만에 3배로 증가했다. 특히 5·24 조처 이후 남북교역은 위축돼 2011년에는 17억1300만달러로 2010년(19억1100달러)보다 11% 줄었지만, 북-중 무역은 60억달러(2011년 추정치)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급진전에 힘입어 어깨를 겨루던 남북교역과 북-중 무역의 격차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급속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이제 남북경협을 허가하더라도 평양대마방직 공장을 다시 운영할 수 있을지 김 회장은 걱정스럽다. 오랫동안 서 있던 탓에 기계는 다 녹슬었고, 사업 파트너로서 신뢰관계가 다 깨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집까지 잃고 월세로 살아가는 그가 사업자금을 다시 마련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래도 평양대마방직이 뽑은 노동자 350여 명이 공장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트럭 40대를 사서 물류사업의 기틀을 마련해뒀더니 그걸로 먹고살고 있다고 한다.
남북경협이 쌓아온 상호신뢰의 노둣돌
“평양 인근의 대마 재배 농가를 방문해 농부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한 농부가 ‘비료는 중국보다 남조선 제품이 훨씬 좋다’고 말하더라. 남쪽을 찬양해 그가 고초를 겪지 않을까 걱정스레 봤더니, 옆자리에 북쪽 관리도 ‘쌀밥도 남조선 쌀이 훨씬 맛나다’고 거들었다. 20년간의 남북경협이 북한을 그토록 많이 변화시켰는데….” ‘마지막 사업’을 포기하지 못한 기업인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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