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처럼 사법제도가 입길에 오른 적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과 같이 사법 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연이어 등장한 것이 원인일 수 있겠지만, 영화와 현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은 단선적이지도 일방적이지도 않기에 그 관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이 공동체의 사법 시스템에 발생한, 또는 오랜 기간 잠복하고 있었으나 이제 드러난 어떤 질병의 증상들이다.
예외인가, 반복되는 규칙인가
웰메이드 상업영화인 은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사법 시스템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법률가들을 그리고 있다. 게임의 규칙은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며, 관객은 장르영화의 약속 안에서 영화를 수용한다. 범인은 잡히고 정의는 발견되며 우리는 안도한다. 그러나 현실은 매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도되어 있고, 착종되어 있으며, 은닉되어 있다.
훼손될 만큼 훼손되었기에 이제는 ‘사법적 정의’를 말하기조차 어렵지만, 시대착오적 상황을 극복하면 우리는 과연 ‘사법적 정의’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에서처럼 잘 작동하는 ‘사법적 정의’가 현실에서 희귀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건에서 ‘사법적 정의’는 실제로 회복된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건에서는 가해자는 늘 가해자고, 피해자는 늘 피해자다. 사법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은 예외적인 사례들로 인한 불신이라며 반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예외인가, 아니면 반복되는 규칙인가.
어느 공동체에서나 규범이 운영되는 과정에 대한 구성원의 신뢰는 필수적인데, 이때 우리는 ‘실제로 신뢰할 만한 것’과 ‘외관상 신뢰를 받고 있다’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괜찮은 민주주의’는 고결한 이상이지만, 어떤 공동체도 ‘정의와 민주주의의 외관’을 획득할 뿐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우선 ‘무엇이 생명인지 아닌지’, 그리고 ‘생명들에게는 어떻게 자원을 배분할 것인지’에 관해 불가피하게 당파적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염원하는 ‘완전한 정의’란 불가능한 무엇이고, 우리는 ‘부분적 정의’만을 누리게 된다. 다만, 구성원들이 그 ‘부분적 정의’에 공감하면 ‘민주주의와 정의가 작동되고 있다’는 판타지 속에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판타지에서 깨어나고 있다. 유포될 수 있는 정보를 규정하고 관리하던 기존의 게이트웨이들이 권력을 상실하면서 시민들에게 사법제도의 속살이 노출되자, 그들은 그런 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법 시스템이 얼마나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인가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착취를 지속하기 위한 판타지
생매장된 가축, 성폭행당하는 학생, 제주도 강정에서 잡혀가는 신부, 크레인 위의 노동자, 목숨을 끊는 해고자, 수많은 1인시위자, 쫓겨나는 기자, 쫓겨나는 판사, 감옥에 갇힌 시인이 즐비하다. 사법이 그들의 보호자이기는커녕 거대한 불의의 공모자가 아니냐는 혐의를 받고 있는 지금, 사법은 언제까지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배반당한 시민들은 이제 신뢰를 버린 것을 넘어서, 사법 시스템이 ‘실재’의 사막에서 착취당하는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거대한 매트릭스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충분하지 못한 정의’가 아니라, ‘착취를 지속하기 위한 한 조각의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민들이 느끼기 시작할 때, 어차피 ‘부분적인 정의’ 외에 줄 것이 없는 사법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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