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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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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짓는 즐거운 지성 품앗이

다양한 대중 모여 새 지식 만드는 ‘백인천 프로젝트’ ‘번역연대’ 등 집단지성 실험… 재미·소통 욕구로 지식 민주화 부른다
등록 2012-02-23 17:20 수정 2020-05-02 04:26
» 작은 잉여 시간들의 네트워크로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자는 ‘집단지성’ 실험이 한창이다. 인터넷 지도 프로젝트에서 그린 IP 연결망. 위키피디아

» 작은 잉여 시간들의 네트워크로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자는 ‘집단지성’ 실험이 한창이다. 인터넷 지도 프로젝트에서 그린 IP 연결망. 위키피디아

“그 체계 전체를 뒤집어보라… 그러면 지식집단, 다시 말해 숨어서 자신들만을 위해 빛을 발하는 별들은 의미의 파도로 그 물결을 출렁일 것이다.”(피에르 레비, )

우리는 모두 알고 싶다. 아침부터 밤까지 트위터로, 메신저로, 블로그로 쉬지 않고 속살거리는 이 말들이 어떤 의미의 파도를 이룰지. 아직은 무엇인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 파도는 좀더 거세다. 미국의 정보기술(IT) 전문가 클레이 셔키는 “디지털 미디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직접 얼굴을 맞대는 대인 접촉의 붕괴를 염려하지만, 세계에서 유선 및 무선 연결이 가장 잘된 서울에서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다”며,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전혀 다른 관계와 지식을 공유하고 창조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물결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SNS로 능력 공유해 연구 논문 쓰자

2011년 12월18일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바이오및뇌공학)는 자신의 트위터에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지난 30년간 한국 야구 데이터를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트위터에서 자원자를 모아 1월부터 시작합니다. 영문 논문과 우리 글 리포트로 세상에 내놓을 예정. 많이 참여해주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그가 “트위터로 모인 집단지성으로 연구하는 첫 시도”라고 규정하는 이 프로젝트를 소개하자, 주로 그를 팔로잉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70여 명이 그날로 참여하겠다는 답을 보냈다. 정말 논문이 나온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저자가 많은 논문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이어졌다. 야구광들에게 ‘꿈의 4할 타자’라는 미끼를 던진 이 프로젝트는 곧 1982년 마지막 4할대를 기록한 선수의 이름을 따서 ‘백인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졌다.

“프로야구에서 왜 4할 타자는 사라졌을까?”는 실은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미 수십 년 전에 던졌던 질문이다. 그는 타자들이 멍청해서 투수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전통적인 선입견뿐만 아니라, 상업화된 현대 야구가 선수들에게 장애가 되었다거나 지나치게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반박하며 “야구 생태계가 안정화되고 변이가 줄어들수록 4할 타자라는 예외적인 존재는 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내놨다.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이 오히려 프로야구 경기의 수준 향상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아직도 야구팬들에게는 논란거리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한국 프로야구 30년의 방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그 공격력과 수비력을 분석하기 위해 스티븐 제이 굴드를 비롯한 여럿의 가설을 검토하자는 제안이기도 했다. 정재승 교수는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다양한 대중이 모여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지가 4할 타자의 비밀 못지않게 궁금했다”고 털어놓는다. “어떤 사람은 야구 데이터가 없고, 다른 사람은 분석할 시간이 없다. 논문을 쓴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다. 지적 욕구만 있는 이들이 소셜네트워킹의 힘을 통해 야구 데이터나 분석 능력이나 논문 경험을 서로 공유해 과학 전문지에 세이버메트릭스 연구 논문을 낼 정도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3월 말까지 한국 프로야구 30년을 결산하는 논문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정재승 교수와 함께 전문가들의 집단지성 모임인 ‘신경건축학 프로젝트’와 ‘백인천 프로젝트’에 나란히 참여한 건축가 조성행(41)씨는 두 종류의 집단지성을 비교한다. “전문가들의 집단지성 프로젝트는 집중력은 높지만 재미가 덜하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훨씬 재미있지만 예측 불가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통계분석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한 데이터 처리를 하고 홈페이지를 구축하며 과학 논문을 작성할 사람들”을 찾는 트윗이 올라오자, 1월14일 첫 모임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100여 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중 15명은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트위터 아이디로만 존재하는 그들이 논문을 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인지, 무엇보다 이런 방식으로 모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을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지난 2월4일 열린 ‘백인천 프로젝트’ 전체모임. 백인천 프로젝트 제공

» 지난 2월4일 열린 ‘백인천 프로젝트’ 전체모임. 백인천 프로젝트 제공

“재미있을 거 같아 참여, 핵심은 재미”

정재승 교수는 첫 모임을 “음지에서 혼자 기록을 수집하던 야구광들이 공동체라는 양지로 나온 날”로 기억한다. 첫 모임에 모인 51명의 참석자들은 처음에는 제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는 듯했다. 내로라하는 야구광들이 다 모이다 보니 야구에 대한 지식과 분석을 견주느라 격론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의 직업을 보면, 통계 전공자나 공학도부터 IT 종사자, 프로그래머, 군의관, 건축설계사에다 기자도 여럿이다. 그런데 야구와 통계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은 쉽게 길을 텄다. 직업과 전공, 관심에 따라 자연스레 역할 분담이 됐다. 운영팀, 데이터수집팀, 데이터분석팀, 과학논문작성팀, 홈페이지구축팀, 그리고 홍보리포팅팀(결과비주얼팀)으로 나뉘었다.

데이터수집팀에서 1982년부터 2011년까지 전체 타자와 투수의 기록을 수집하면, 데이터분석팀에서 연간 표준편차 변화를 분석한다. 굴드의 그래프와 거의 일치하는 그 결과를 두고 과학논문작성팀과 결과비주얼팀에서는 “왜 그 한계가 하필 4할이었느냐?” 등 질문과 토론을 한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1시간 정도를 이 문제를 생각하고 분석하는 데 보낸다고 했다. 돈 안 되는 이 연구에 사람들이 시간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여자간호대 교수학습지원센터 연구원을 그만두고 시험을 준비하던 박상화(29)씨는 정재승 교수의 트위터를 보자마자 단박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무엇보다 “야구 기록 데이터를 내 눈으로 먼저 구경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다. 야구팬들은 본질적으로 기록광이다. 통계와 확률의 신봉자다. 박씨는 “야구팬이라면 가장 소망하는 것은 완성된 데이터다. 나만 해도 타자 이대호와 투수 류현진의 대결 기록 전부를 원한다. 그런 기록을 통해 경향을 파악하고, 내가 아끼는 신인 선수들의 가능성을 알고 싶은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데이터수집팀장을 맡았다. 대학원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하는 이충한(31)씨는 ‘백인천 프로젝트’에 들어오며 “공신력 있는 대량의 자료를 만질 수 있겠구나. 이 자료를 가지고 한번 놀아보자”고 했단다. 게다가 “공학자들이 남과 소통하는 데 서투른데, 정재승 교수는 어떻게 다른 전공자와 소통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은 팀내에서만도 2~3시간씩 논쟁한다는 이씨는 데이터분석팀장을 맡았다. “어차피 재미있을 것 같아 참가하는 겁니다. 핵심은 재미예요.” 이충한씨의 말처럼 사람들이 집단지성 프로젝트에 뛰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재미와 소통에 대한 욕구다. “젊은이들이 온라인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하찮고 경박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이 하는 일은 연결하고, 소통하고, 궁극적으로는 동원하는 능력을 쌓아간다”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이토 미미의 말 그대로다. (공저)를 쓴 연세대 조화순 교수(정치외교학)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개인들의 삶이 사회화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지금 세대는 자신의 일상을 사회적으로 공표하는 일에 개방적이다. 참여 이슈도, 방식도 다르다. 생활형 이슈에 민감하고 놀이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한다”고 했다.

4대강 사업 실상 독일에 알린 ‘번역연대’

» ‘번역연대’ 홈페이지.

» ‘번역연대’ 홈페이지.

집단지성은 지식세계의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이다. 재미만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행동할 기회가 있다면, 아무 대가 없이 집단지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2008년 1월 독일에 사는 임혜지씨는 인터넷 게시판에 독일의 운하사업에 대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 등이 “독일 도나우 운하에서 보듯이 대운하 사업은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사업”이라고 홍보하는 것을 듣고서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운하사업의 치명적인 결과를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독일의 운하사업에 관한 자료를 번역하다 힘에 부친 임씨는 2010년 6월 독일 동포들이 가장 많이 찾는 포털에 “함께 하자”는 글을 올렸다. 그때 모인 사람들과 함께

» 위키리크스 한국의 홈페이지.

» 위키리크스 한국의 홈페이지.

‘번역연대’(www.hanamana.de/dul/)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글을 올리자 이틀 만에 번역 한 편이 뚝딱 완성됐다. 유학 온 지 얼마 안 되는 학생들도 번역을 나누어 맡아 사전을 뒤졌고, 전문 번역가들도 아낌없이 힘을 보탰다. 아예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은 한글 다듬기에 나섰다. 보가 만들어진 뒤 홍수와 숲이 망가지는 폐해를 겪은 독일인들이 어떻게 건설을 반성하고 복구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왔는지를 알리는 자료들을 번역한 것이 30여 건. 국민소송단에 참여할 독일 전문가를 섭외하고 이들에게 4대강 사업의 실상을 알리는 자료를 독일어로 제공하기도 하는 등 이 카페는 전업으로 하는 번역가들 못지않게 많은 양의 작업을 해왔다.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지만 밤을 새워가며 번역에 매달려 독일의 환경보고서를 한국에 보내고, 한국의 4대강 사업 실상을 외국의 환경전문가들에게 고발해왔다. “우리 회원들이 정치의식은 같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눈앞에서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어요. 게다가 독일에선 환경 의식이 높거든요. 환경이 나의 행복과 경제적 부와 직접 연결돼 있다는 걸 모두 알지요. 번역을 할 만큼 독일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독일 사회에 이미 동화된 만큼 환경의식도 독일 사람들 수준이라고 봐야죠. 여기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외국 사람이라도 그 정도는 알기에 설명할 필요 없이 공감대가 형성됐어요.” 임혜지씨 또한 독일 문화재 관리일을 하다가 지금은 보육교사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회원 수는 많지 않지만 ‘번역연대’를 집단지성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위키피디아 사이트와 같은 원리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번역할 내용을 올리면 익명의 번역가들이 역할 분담을 해서 초벌 번역을 하고, 누군가 또 고쳐가며 완성한다. 완성된 결과물은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공동의 작업일 뿐이다. 복잡한 기술용어로 문제를 덮으려 할 때 집단지성의 힘이 드러난다. 한국의 수자원학회 전문가의 손을 거친 ‘두부침식’이라는 말보다 ‘번역연대’가 주장한 ‘역행침식’이라는 말이 지금은 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4대강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좀더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집단지성이 개인 전문가를 이긴 사례로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지난해 9월에는 위키리크스 한국(www.wikileaks-kr.org/dokuwiki/) 사이트가 문을 열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의 비밀 전문 25만 건 중에서 주한 미국대사관 전문 1980건을 집단지성의 힘으로 번역하자는 시도다. 2월17일 기준으로 이 사이트에서 번역한 전문은 1980건. 42% 정도가 번역된 셈이다. 이 사이트를 개설한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처음 제안한 춘천문화방송의 박대용 기자, 그리고 거들고 나선 수많은 누리꾼들이 힘을 합친 결과물이다.

집단제작하는 ‘쌍용차 해고자’ 이야기

집단지성 프로젝트는 대부분 미완성이며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벌써부터 퇴화 가능성이 나오기도 한다. 국민대 최항섭 교수(사회학)는 “어떤 집단이 다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이야기만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자 할 때, 크기는 눈덩이처럼 커지는데 위험한 눈덩이가 된다”는 피에르 레비의 말을 인용하며 집단지성이 우중으로 변질할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집단지성으로 향한 기술이 이미 열렸다면 전문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해 6월 다큐멘터리 영화 의 이성규 감독은 자신의 블로그에 ‘집단창작을 제안하며… 휴머니즘으로 만나는 카메라’라는 글을 올렸다. 이 감독은 글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정신적 외상으로 고통받는 그들의 사연을 알리기 위해 를 독립 PD들의 힘으로 제작해보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9명의 독립 PD들이 우선 화답했다. 촬영을 분담하거나 제작비를 십시일반 보태기로 했다. 막상 7월에 촬영이 시작되자 더 많은 PD가 왔다. 이성규 감독도 모두 몇 명이 여기에 참여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대부분 방송사에서 외주 제작일을 하는 PD들로 이 촬영 전까지는 노동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단다. 알려진 예능 프로그램들의 한 코너를 찍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 그들의 시선을 사회로 돌리도록 했다. 이들은 릴레이식으로 카메라를 이어가며 촬영을 진행하거나 나중에 편집을 분담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를 도운 이상욱 PD는 “방송사 다큐멘터리 PD들과 독립 PD들이 힘을 합쳤다. 한국 사회에서도 전문 직종 종사자들이 자기 계급의 문제를 사회적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다른 계급과 소통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했다. 집단지성은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지닌 맥락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참고 문헌
(조화순·민병원·박희준·최항섭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피에르 레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클레이 셔키 지음, 갤리온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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