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회원들이 2011년 12월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강원도 삼척과 경북 영덕의 신규 핵발전소 선정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2011년 12월23일 오전 10시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이하 한수원)는 핵발전소 신규 건설을 위한 부지 예정지 후보로 강원도 삼척과 경북 영덕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한수원은 일개 사업자에 불과하다. 핵발전소는 어마어마한 주제다.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정책에 속하는 일이다. 한번 결정하면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까지 몇백 년, 아니 몇천 년이 걸릴지 모를 국가 중대사다. 이런 거대한 계획을 일개 사업자가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과연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지난 1년6개월 동안 삼척에서는 해괴한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 삼척이 핵발전소 신규 부지 후보지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고도로 계산된 방식으로 삼척 시민들을 농락하려는 갖가지 속임수가 난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야기는 201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대수 삼척시장은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고, 무소속으로 재선 도전을 선언했다. 그해 5월11일 출마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김 시장이 “21조원 규모의 세계원자력연구원을 유치하겠다”고 선언하며 문제가 시작됐다. ‘연구원’이라는 단어가 갖는 속성이 뭘까? 사람들은 그저 흰 가운의 연구원과 대학 건물·연구동 등을 떠올렸을 게다.
원자력연구원 → 스마트 원자로 → 핵발전소
연구원이 핵발전소로 둔갑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저 ‘21조원 규모의 국책사업을 유치한다’는 공약만이 삼척 시민들에게 먹혀들어갔다. 김 시장은 건강을 핑계로 시장 후보 텔레비전 토론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비민주적 행태에도 그는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선거에서 ‘핵발전소 유치’라는 말을 했다면, 아마 선거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선 직후부터 김대수 시장은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괜한 트집을 잡는 게 아니다. 삼척시가 내놓은 ‘시장 지시사항’이란 공문서를 근거로 하는 말이다. 어떻게 바뀌는지 눈여겨 살펴보자.
2010년 7월2일엔 분명 ‘원자력발전연구원’ 유치였다. 그해 9월8일엔 ‘스마트 원자로 유치’로 말을 바꾸더니, 마침내 10월18일 간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핵발전소 유치’를 선언한다. 그리고 핵발전소 유치 신청 동의안을 제출해, 시의회마저 농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해 12월에 발표한 국토해양부의 ‘동해안권 발전종합계획’에 이미 원자력 클러스트 사업은 경북과 울산 지역 동해안권으로 등재돼 있음에도, 같은 달 6일 시의회에 제출한 동의안의 명칭을 ‘원자력 클러스터 구축을 위한 원자력발전소 신규 부지 유치 신청 동의안’으로 적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불과 6개월이 걸렸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다. 말없는 다수의 시민들까지 유치에 동의하는 것으로 오산한 김 시장은 시의회에 유치 신청 동의안 처리를 요구하며,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투쟁위원회(이하 반투위·상임대표 박홍표 도계성당 주임신부)가 일부 시의원들을 설득해 마련한 주민투표 요구를 받아들였다. 시의원 8명 전원이 원전 유치 주민투표 동의 서명부를 작성·서명했고, 삼척시는 주민투표를 하겠다는 뜻을 담은 문서를 시의회에 보냈다.
반핵 여론 거세지자 후보지 발표 연기 ‘꼼수’
2011년 새해가 되자 김 시장은 막강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관변단체들을 총동원해 유치 찬성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핵발전소 단체견학이 줄을 잇더니, 관변단체 명의로 유치 지지 펼침막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펼침막은 처음엔 한두 장씩 걸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설을 지나자 읍·면·동장까지 나서 독려하며, 각 지역의 자잘한 단체들은 물론 시에 납품하는 업체에 이르기까지 흡사 펼침막 걸기 경쟁이라도 벌이는 모양새가 됐다. 심지어 시내 식당과 여관까지 유치 신청 찬성 펼침막을 내거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시내에 내걸린 현수막만 1천 장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펼침막 전성시대’였다.
그 무렵 아예 ‘원자력발전소 유치협의회’가 만들어져, 2월 중순부터 유치 신청 찬성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서명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시 공무원이 동원됐다. 그렇게 받은 유치 찬성 서명자 명부가 삼척시 유권자의 96.9%에 이른다고 시 쪽은 선전했다. 따져보자. 전체 유권자 가운데 3.1%만 반대한 셈이다. 약 1788명이다. 그런데 2011년 4월 강원도지사 보궐선거 때 부재자로 신고한 사람만도 1859명이다. 삼척에 없던 사람까지 유치 찬성 서명을 했다는 얘긴가? 그럼에도 김 시장은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강조하며, 2011년 3월2일 직원 조회에서 “약속한 적도 없고, 법적으로도 안 된다”며 시의회에 약속한 주민투표를 무질러버렸다.
그리고 3월11일 일본 도호쿠 지방 강진과 함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핵발전소 상황을 접하자,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석 달여 흉물스럽게 버티고 있던 유치 찬성 펼침막이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반투위 사무실을 찾는 이가 꾸준히 늘었다.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은 버거울 정도였다.
드디어 4월4일 반투위는 삼척 대학로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전국적 관심을 반영하듯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진보정당의 이정희·조승수 의원 등 유력 정치인이 대거 참여했다. 1천여 명이 모인 이날 집회로 시민들도 차츰 자신감을 갖게 됐다. 전국의 환경단체들과 연대체도 만들어졌다. 세계적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레인보워리어’호가 6월22일 17년여 만에 다시 삼척항에 입항해 시민들과 어깨를 걸고 거리행진을 벌였다. 매주 수요일 ‘핵 없는 세상’을 기원하는 미사와 촛불집회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상반기 안에 후보 예정 부지를 발표하겠다”던 한수원이 연말로 발표 시점을 바꾼 것도 들끓는 여론에 밀렸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겠다는 일종의 ‘꼼수’였다.
삼척은 1990년대(발전소)와 2000년대(폐기장) 두 차례에 걸쳐 ‘핵’을 물리친 소중한 역사가 있다. 지금도 근덕면 덕산리 마읍천 자락에 가면 당시의 반핵투쟁을 기념해 만든 ‘8·29 기념공원’과 ‘원전 백지화 기념탑’이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원전 백지화 기념탑’이 있는 곳은 세계에서 삼척이 유일하단다.
지난 1993년에도 이번에 새로 핵발전소 후보 부지로 선정된 바로 그 자리에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해 8월29일 근덕면민들은 근덕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약 7천 명으로 불어난 인파는 ‘핵발전소 부지 해제’를 요구하며 시내로 몰려갔다. 당시 근덕면의 인구가 9천 명 남짓이었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만하다. ‘8·29 기념공원’은 고스란히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수원도 “원전 유치 삼척 시민 찬성 50% 미만”
한수원은 2011년 12월23일 신규 핵발전소 후보 부지를 발표하며, “원전 유치에 대한 삼척 시민들의 찬성 여론이 50%에 못 미친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후보 부지 선정 결정은 즉각 철회돼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일본에서는 54기의 핵발전소 가운데 6기만 가동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이 전국적 정전 사태를 겪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세계 각국이 에너지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탈핵’이 대세다. 핵발전소는 이제 ‘양심의 문제’가 됐다. ‘생명’보다 소중한 게 뭐가 있는가.
이광우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투쟁위원회 기획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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