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어서들 오게. 내 오늘 자네들을 친히 부른 것은 올 한 해 드라마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즐거움을 준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네. 기왕에 이렇게 모였으니, 과연 그중 수훈갑(甲)은 누구인지 한번 가려보는 게 어떻겠는가?
김주원 조금 귀찮지만 이런 자리에도 나와야 하는 게 사회 지도층의 윤리의식이죠. 난 그렇게 배웠습니다. 아무래도 상반기 최고의 히트 드라마인 의 김주원, 바로 제가 그 주인공 아니겠습니까? 잘생겼지, 돈 잘 벌고 잘 쓰지, 그런데다 우리 길라임씨를 위해 보장된 미래와 엄청난 유산을 포기하는 용기와 결단력까지 겸비했다, 이 말입니다. 재벌 3세라고 해서 무조건 미움받는 짓만 해야 합니까? 그게 최선이에요?
독고진 안 그래도 바쁜데 우리 띵똥이랑 친구 먹게 생긴 어린 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소중한 내 하트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이야. 나, 독고진이야! 김주원 넌 그냥 아
무나 도련님이고, 난 특별한 독고진이야. 네가 최고의 캐릭터라고? 어디 돈 좀 만져봤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드라마 제목에서부터 이미 판가름이 난 거야. 의 ‘최고의 캐릭터’, 그게 바로 나 독고진이란 말이지. 핫핫핫!
차봉만 이거 왜들 이러시나. 의 ‘보스’란 드라마의 주인공인 아들(지성)이 아니라 나 차봉만인 것을 몰랐나? 자식에게 경영권을 넘기려고 불법과 탈법마저 주저하지 않는 과감성! 폭력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위해 직접 몸을 날리는 부성애! 결국 검찰에 출두할 때 휠체어를 타는 치졸함까지 재벌가의 온갖 찌질한 행태를 답습하지만 그래도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뭐겠나? 내가 10대 재벌 총수 중에서 가장 잘생기고 주먹도 세서? 아니지. 바로 다른 세계 사람인 줄 알았던 재벌 총수도 그저 엄마한테 어리광 피우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야. 니들 자꾸 억지 부리면 엄마한테 이른다? 엄마, 엄마!
세종 그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너희들 말에 일리가 있구나. 그동안 드라마에서는 힘이든 돈이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악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아주 단선적인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지. 하지만 너희들은 뭔가 다르구나.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어. 하기야 의 나와 내 정적인 정기준도 마찬가지다. 백성들이 나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당연하나, 성리학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정기준의 이야기에도 충분한 논리와 근거가 있지 않나. 오로지 백성들만 생각하는 임금이나, 나라의 도(道)를 바로 세우려면 왕의 권력을 분점해야 한다는 정기준의 신념이나 사리사욕에 눈먼 이 시대 정치인들에 비할 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2011년 드라마의 특징을 ‘권력자의 새로운 얼굴’, 이렇게 정리해보면 어떻
겠는가?
정기준 틀렸다, 이도!
세종 아니, 어디서 갑자기…. 좋다, 정기준. 어디 네 생각을 말해보라.
정기준 백성들이 너와 나, 김주원과 독고진, 차 회장 같은 인물들에게 열광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희망이 투영된 결과일 뿐! 인간의 얼굴을 한 권력자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자네도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모든 것은 정치, 즉 정치를 매개로 한 인간들의 쟁투로 통하게 돼 있다. 이 여인, 김인숙(염정아)의 생애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김인숙 그래요. 18년 동안 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저 K로 살아왔어요. 착한 권력자?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나를 금치산자로 만들어 내쫓으려던 시어머니 공순호 회장, 더 큰 힘과 더 많은 돈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정가원 사람들. 나는 그 속에서 내 이름을 되찾기 위해, 내 남편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워왔지요. 권력의 속성은 전하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말처럼 ‘독’, 그 자체일 뿐이에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네요. 엄 집사, 차 대기시키세요. 엄 집사!
정기준 그래, 지금 모두 이 자리를 떠나라. 그리고 이 나라의 뿌리 밀본이 되어라!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궤변으로 국정을 농단하는 왕 이도를 견제하고, 삼봉 선생의 높은 뜻 재상총재제를 실현시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야! 으하하핫!
세종 아…, 안 돼! 나는 아직 더 할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기다려라, 이런 우라질, 빌어먹을!
그리하여 세종이 모처럼 마련한 자리는 성과 없이 끝났다. 세종은 이날의 아쉬움을 담아 라는 책을 한글로 편찬했으나 유실됐고, 그 전설 같은 논쟁의 잔상은 후세 사람들에게 ‘드라마투르기’로 잘못 전해지고 있다나 뭐라나. 아니면 말고~.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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