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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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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가 교차한 인생

5·16 쿠데타 참여 뒤 ‘철강왕’까지 파란많은 삶 살다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YS때 정치탄압 받다 DJ 정부에서 국무총리 지내
등록 2011-12-21 14:44 수정 2020-05-03 04:26
우리나라 최초로 포항제철 제1고로에서 쇳물이 터져나온 1973년 6월9일, 박태준 당시 포철 회장은 임직원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포스코 제공

우리나라 최초로 포항제철 제1고로에서 쇳물이 터져나온 1973년 6월9일, 박태준 당시 포철 회장은 임직원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포스코 제공

1992년 10월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일생의 목표이던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연산 2천만t 조강체제 구축을 25년 만에 완성했음을 보고했다.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그의 얼굴에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계 4위의 철강기업 일궈

그로부터 어언 19년. ‘세계 최고의 철강인’으로 불린 박태준은 지난 12월13일 오후 5시20분 지병인 폐질환으로 84년의 생을 마감하고,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옆에 눕게 됐다.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이 되어서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짤막한 유언을 남기고….

포철 신화의 주인공, 한국 산업화의 영웅, 세계의 철강황제…. 박태준은 자신에게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치하인 1927년 미역 산지로 이름 높은 동해안 최남단의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났다. 갯마을 아이는 6살 때 아버지가 일하는 점령국 일본으로 건너가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45년 조국의 해방과 함께 와세다대학 2학년 생활을 중간에 접고 귀국한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생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그는, 당시 교관이던 박정희와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두 사람은 1979년 박정희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그는 초급장교 시절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생사기로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최고실력자인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상공담당 최고위원을 지낼 정도로 핵심 역할을 했다. 1963년 군에서 예편했고, 다음해 대한중석 사장을 맡았다. 박정희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얻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운 뒤 일본통인 박태준에게 제철소 건립 사업을 맡겼다. 1968년 포철 초대사장으로 취임한 박태준은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죽자”는 제철보국의 정신으로 끝내 세계 4위의 철강기업(연산 조강능력 3540만t)을 만드는 신화를 일구었다.

그는 “정치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대로, 말년에 정치에 참여했다가 시련을 맞았다. 1981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92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92년 대선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김영삼 후보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정치보복성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로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본 도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4년간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한다. 김영삼 정권 말년인 1997년에 귀국해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포항 북구 국회위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다. 같은 해 대선에서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3자 연대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는 데 일익을 맡고, 2000년 총리를 지냈다.

그는 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87년 한겨레가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자금을 모을 때, 그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며 지원에 나섰다.

후진적 무노조 경영의 시발점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유난히 눈썹이 짙고, 인중이 길었던 박태준. 그의 인생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했다.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켰지만, 5·16 군사정권 출범에 핵심 역할을 했다. 또 포철 신화로 ‘조국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지만, 그 밑천은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대일청구자금이었다. 평생 포스코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음에도 정치 외풍을 막는 데는 한계를 보였고, 후진적 무노조 경영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또 20년간 정치 외도를 통해 집권당 대표와 국무총리를 맡는 영예를 맛보았지만, 혹독한 정치보복과 4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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