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지난 8월30일 병역법 88조 1항 1호와 향토예비군설치법 15조 8항에 대해 7 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의 의미는 앞으로 몇 년간 다른 사람을 때리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도 않고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해온 젊은이들이 매일 2명씩 감옥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 진영이 획기적 승리를 거둔다 해도 최소 2천 명은 더 감옥에 가야 할 것이고,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한나라당이 재집권한다면 족히 5천 명의 젊은이가 감옥에서 1년6개월을 썩어야 한다. 선한 기운이 자연스럽게 얼굴에까지 배어나오는 해맑은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1만6천 명이 감옥에 갔던 것처럼 조용히 감옥에 가고 말 것이다.
대체복무 길이 열리는 듯 했지만지금부터 7년 전 헌법재판소는 동일 조항인 병역법 88조 1항 1호에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수십 년간 묻혀 있던 병역거부 문제는 2001년 1월 의 보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2001년 12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오태양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해 논쟁은 가열되었고, 2002년 1월에는 당시 서울남부지법 박시환 부장판사가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원래 헌법재판소는 180일 이내에 결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지만, 헌재는 이 사건을 2년이 훨씬 넘도록 묵혀두다가 2004년 5월 서울남부지법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오고, 대법원이 7월에 병역거부자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리자 8월에 서둘러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2004년에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모두 병역법 88조 1항에 의거한 병역거부자 처벌을 정당화해주었지만, 2011년 헌재 판결에 비해서는 훨씬 더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내비쳤었다. 대법원 판결의 경우 전체 대법관 12명 중 절반인 6명은 “이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관용” 차원에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헌재에서 병역법의 처벌 조항이 합헌이라는 다수 의견을 낸 7명의 재판관 중 5명은 “이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고뇌와 갈등을 외면하지 말고 나름대로 국가적 해결책을 모색, 입법을 보완하는 방안을 숙고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위헌 의견을 낸 2명의 재판관을 포함한다면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7명이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촉구한 것이다. 요컨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자 처벌 문제를 입법정책을 통해 해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민주개혁 진영이 다수를 점한 17대 국회는 2005년 3월 국방부에서 병역법 개정안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병역법 개정안은 한나라당의 완강한 반대로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병역거부 문제에 소극적이던 김대중 대통령에 비해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방부뿐 아니라 기획예산처 등 다양한 부처의 의견을 조율해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의 일환으로 저출산·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른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병역거부 문제를 연동해 ‘사회복무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2009년부터 시행이라는 단서가 달리고 대체복무 기간이 현역 복무의 2배로 너무 길긴 했지만, 이제 병역거부자들이 무조건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해주기가 싫어서 그랬을 뿐
노무현 정권이 끝나기 불과 몇 달 전에 발표된 이 안은 보수적인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금방 뒤집히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마련한 사회복무제도가 실시되었다면 더 이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2004년에 결정을 내렸던 헌재가 7년이 지나 동일 조항에 대해 다시 결정을 내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2004년 당시 헌재와 대법원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권리로서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병역거부를 선언한 젊은이들을 무조건 전과자로 만드는 일을 피하는 방안을 국회에서 찾아볼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국회는 손을 놓아버렸고, 행정부에서 뒤늦게 해결 방안을 마련했지만, 정권 교체로 새로이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이를 뒤엎었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물로 탄생했다. 유신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은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을 빼앗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헌법위원회에 주어버렸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때 위헌법률심판권을 대법원에 돌려주지 않고 따로 헌법재판소를 만든 것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상호 견제와 협력을 해가며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고 애쓰라는 뜻이었다. 2011년의 헌재 결정이 절망스러운 것은 헌법재판소가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파괴했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헌법소원을 내고, 법관은 현행 법률에 위헌 소지가 있으면 위헌심판을 청구한다. 헌법재판소가 2004년 나름의 고민 끝에 입법권고를 붙여서 사회로 돌려보낸 결정은 입법부에서 방기되고, 행정부에서 해결책이 나올 듯하다가 정권 교체로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위헌법률심판이 다시 제기되어 병역거부자 처벌 문제를 헌법재판소에서 재검토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무책임한 뺑뺑이를 도는 사이에 감옥에 간 젊은이가 1년 평균 700여 명씩 근 5천 명이 된다. 병역거부자들에게 선고되는 형이 징역 1년6개월이니, 2004년 헌재 결정에서 2011년의 헌재 결정까지 이들이 산 징역을 합치면 8천 년이 된다. 입법부에서 잘 해결해보라고 내보낸 사안이 수천 명을 감옥에만 보내고 다시 헌법재판소로 돌아왔다면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7년 만에 돌아온 이 문제에 대해 2004년에 비해서도 훨씬 후퇴한 결정을 내보냈다. 이제 국민은 만약 헌법재판소가 입법권고를 한 사안이 개무시당하면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한단 말인가. 2004년보다 더 강력하게 입법권고를 하는 수준이어도 시원찮을 판에 헌법재판소는 2004년보다 더 후퇴한 입법권고조차 사라져버린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선한 젊은이들이 살아야 했던 징역도 모자라 짧으면 한 3천 년, 길면 한 7천~8천 년어치 징역을 더 살라는 것이 이번 결정이다.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의 특유한 안보 상황’을 들어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할 수 없으며, 대체복무제도 도입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급증해 병력자원 손실이 예상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 앞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한 독일·대만 등의 경험이나, 노무현 정부 시절 국방부와 병무청에서 국방력에 지장을 주지 않고 병역거부자의 급증을 막는 현실적 방안을 검토해 사회복무안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것에 다름없다. 해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해주기 싫어서 그랬을 뿐이다. 아, 안보재판소여….
국가기밀에 붙여야할 결정헌법재판소는 유엔 인권이사회나 유엔 인권위원회가 한국도 가입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근거해 여러 차례에 걸쳐 권고한 사실과 관련해, 그런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부터 유엔의 권고를 개무시하고 있다. 인권 옹호의 최후 보루인 헌법재판소의 이런 민망한 결정 내용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위해 국가기밀에 부쳐 외국에 알려지는 것을 절대 막아야 할 것이다. 전세계 병역거부자의 90% 이상이 한국 감옥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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