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마당을 나온 이들의 길고 긴 여름

뜻하지 않게 찾아온 무기한 휴가… 비정규직 차별 반대하다 광주MBC에서 해고된 방송작가가 보내온 지난한 여행기
등록 2011-09-08 05:32 수정 2020-05-02 19:26
사연을 보낸 정재경 작가(오른쪽 세 번째) 등이 지난 8월 중순께 전남 장성에 위치한 한마음공동체에서 격려차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연을 보낸 정재경 작가(오른쪽 세 번째) 등이 지난 8월 중순께 전남 장성에 위치한 한마음공동체에서 격려차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날씨가 유난히 변덕스럽던 올여름, 우리 9명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여행을 했습니다. 고참 선배는 18년 만의 휴가였고 제일 어린 친구에겐 1년 만의 휴가였습니다. 휴가 장소? 마당을 벗어난 넓은 세상입니다. 휴가 기간? 무기한입니다.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았거든요.

반쪽짜리 책상

우린 방송작가입니다. 지역의 아프고 후미진 구석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고 올바른 목소리로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나간다는 작은 사명감을 갖고 광주문화방송이라는 방송사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왔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작가들에게 다시는 못 돌아올 수도 있는 긴 휴가를 결심하게 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7월 초 회사에서 업무 환경을 개선한답시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차별적으로 책상을 지급했습니다. 비정규직 책상은 정규직 책상에 비하면 딱 반쪽짜리에 서랍 하나 없이 칸막이가 돼 있는 독서실 책상이었답니다. 게다가 비정규직들을 아주 좁은 곳으로 몰아넣고 정규직이 쓰는 공간과 파티션으로 분리해놓았더군요.

우린 참 서운했습니다. 우리가 파티션 너머 멋지게 꾸며진 넓고 안락한 곳에 앉아 있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거든요. 우린 늘 그들과 함께 손을 모아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스태프이자 가족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방송 제작의 주역이라며 노고와 책임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항상 말씀하시던 회사의 높은 분들이 갑자기 작가는 프리랜서라며 프리랜서에게 책상을 주는 것도 감사할 일이라고 나무라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방송작가는 원래 프리랜서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프리랜서죠. 우리 직업을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전자우편으로 원고를 보내는 아주 고상한 직종으로 생각합니다. 그럴 때면 참 난감해집니다. 사실 방송작가들은 방송 기획부터 아이템 선정, 섭외, 구성, 대본까지 도맡아 하고, 또 촬영과 편집에까지 참여하거든요. 심지어 때때로 행정까지 담당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출퇴근이 자유롭지 못하고 일반 사무직처럼 상근을 해야 하죠. 그런 우리에게 프리랜서라고 닭장처럼 좁은 공간에서 일을 하라니요.

우린 책상을 바꿔달라고 회사에 말했습니다. 그것도 새 책상이 아닌 예전에 쓰던 헌 책상으로요. 그랬더니 회사는 작가들이 단체 행동을 한다며 1명을 주동자로 몰아 해고해버리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높은 분은 술에 취한 채 회사에 들어와 작가들에게 막말과 욕설까지 했습니다. 우린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막말과 본보기식 해고를 문제 삼았죠. 그랬더니 이번엔 회사가 작가 9명을 내쫓아버렸습니다.

우린 그렇게 회사를 나왔습니다. 18년을 일해온 작가부터 1년차 작가까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것이죠.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휴가, 아니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린 아프고 억울한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기자회견도 했고 성명도 발표했죠. 참 두렵고 망설여지는 일이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회사는 거대한 방송기관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주었습니다. 신문이 우리의 사연을 소개해주었고 시민단체가 함께 싸우겠다고 나서주었습니다. 인터넷과 트위터에서 격려 글이 올라왔고 가는 곳마다 우리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었습니다. 우리 편이 돼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눈물 나게 고마웠습니다. 부당함에 분노할 줄 아는, 가슴 뜨거운 이가 세상에 많다는 걸 알게 된 값진 시간이었죠.

세상을 품는 시선을 얻다

우린 동료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자기 일 하느라 바빠 누가 부당하게 그만두는지,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산 우리였거든요. 똑같이 힘든 처지에 있는 서로를 못 본 체하고 지내온 시간들을 뜨겁게 울며 반성했답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따로 있습니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과정이라고 하죠? 우리에게 이번 여행이 그랬습니다. 그동안 방송을 통해 비정규직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린 그들과 같은 처지라는 걸 외면해왔습니다. 밖에서 멋진 전문직업인으로 비치길 바랐고, 안에서 겪는 모순 같은 것은 애써 덮어왔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우리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현실에 눈감지 않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작가들과 광주문화방송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여행 중입니다. 여행의 끝이 회사 복직일지 아닐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있습니다. 여행이 끝났을 때 우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걸요. 여행을 통해 넓은 세상을 만났고, 따뜻한 친구를 만났고, 진정한 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정재경


■ 당선자 정재경씨의 2등 당선 소감

“ 사이좋게 나눠 보겠다”
우리 9명 작가들의 뜨거웠던 여름 이야기를 특별한 휴가 공모에서 뽑아주셨네요! 부당한 일로 회사 밖에 나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귀기울여준 곳도 였는데, 이런 행운까지 에서 안겨주시다니 정말 사랑합니다. 요즘 우리 작가들에게 좋은 일이 연달아 터졌답니다. 며칠 전 회사가 해고된 작가들의 전원 복귀를 공식 발표했거든요. 물론 우리가 바꾸고자 했던 게 다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희망을 걸게 됐답니다. 이벤트 당첨 소식을 들은 작가들은 를 ‘211년’씩이나 정기구독할 수 있는 혜택이 생긴 거냐며( 1년 정기구독을 오독^^), 사이 좋게 23년씩 돌아가면서 구독하자고 뜨거운 우정을 확인했답니다.


■ 당선자와 나눈 짧은 인터뷰

전쟁 같은 휴가가 끝나고 찾아온 복직 약속
기뻐했다. 작지만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공모에 뽑힐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우리 사정을 알리고 싶기도 하고….” 이들의 특별한 여름휴가는 회사 쪽의 사과와 전원 복직 및 환경 개선 약속으로 끝났다. “작다면 작지만 크다면 큰 싸움에서 이겼어요. 단번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방송사의 고질적 문제를 점진적으로 바꿔나가도록 도와야죠.”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